땅 한평 사려도, 줄 한줄 그어도 한평은 듸야 씨를, 함평을 알면 손바닥이 보인다.

2020. 4. 2. 16:02330. 빈말아~냐 !

꼬시키 드가기? " 향어 특유의 왕성한 식욕과 번식력으로 급격히 세력권을 확보,기존 고유어종의 터전을 빼앗으면서 토종잉어와 향어의 교잡으로 인한 잡종어로 전락하는 등 수중 생태계를 교란 " 천연염색, 약초 등

내 어릴쩍 우리논 못짜리서  눈금쟁잉캉 놀다가 올챙이 달뭉거 본 기억 소록소록 떠올라 " 긴수염투구게 "

로 뻐저 드강기이 또 머 황소개골챙이랑 떡붕어랑 베스 불루길   카다가 드디어 이스라엘 향어 까지로 드가믱 그저께 잡아옹 가창꼴짝 중태기 캉 전뻔 군위 매곡지서 잡응거캉 합사시킹거 사진도 찍꼬 

모이를 주고 우에 조뭉능강 동영상도 짝꼬 

옳치 향어캉 잉어캉 교배된 잡쫑도 키아볼수있실랑강 ....  점점 뻐저드가는데     케케묶은 ?앙잉

어찌보망 신삥ㄹ 찌도 모릴 찐한 진한으로 빠저 드가는데  

 민물기기 어종 이랑 

    약초랑 

       한의학 처방전 이랑 

          어들로 우예 드가는동 몰래ㅜ자꾸만 빠저 드가 


행잉나 씨앗 한톨 숭굴 땅 한평 .....?


       

  ~~~~~~~~~~~~~~~~~함평군을 알면~~손바딱이 보잉랑강 ?~~~~~~~~~~~

================ 향어 특유의 왕성한 식욕과 번식력으로 급격히 세력권을 확보,

기존 고유어종의 터전을 빼앗으면서 토종잉어와 향어의 교잡으로 인한 잡종어로 전락하는 등 수중 생태계를 교란===============


함평군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서해안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이 함평

( ) 9 (1409) ( ) ( ) 咸平 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조선조 태종 년 함풍현 과 咸豐縣 모평현 을 牟平縣 합병하면

서 “ ” “ ” 함풍 에서 咸 모평에서 “ ” “ ” 平 자를 따 함평현 을 신설하면서 비롯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군역이 변동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평군은 1 , 1 , 3 개 광역시 개 시 그리고 개 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고 다도해상에 위치

한 신안군과 무안군 등 전남 서해안의 섬지역으로부터 반도의 내부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의 관문에 해당된다.


 최근에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어종으로 블루길 (월남붕어 과) , 향어가 수원지 저수지에 다수 서식되고            떡붕어가 신품종으로 수입되어 성장속도가 빨라

            서식력이 차츰 증대되고 있다.


 긴꼬리투구새우 Triops longicaudatus ( ) 멸종위기 Ⅱ급 무척추동물


꼬리채찍을 제외한 성체의 몸길이는 2.7cm , 이고 갑각

은 타원형의 투구모양이며 살아 , 있을 때 채색은 진한

초록색 또는 갈색이다 몸은 . , 전체적으로 원통형이며 앞

부분이 넓고 납작하다 다리에 . 이가 있어 다리로 먹이

를 잡고 이로 , 먹이를 갉아 가슴과 복부에 있는 부속지

로 섭식한다.

긴꼬리투구새우는 중앙아프리카가 원산지이나 2억 5 천만 년 전 도이칠란트의 고생대 지

층에서 화석상태로 발견된 적이 있으며 현재까지 , 거의 진화되지 않고 생존하고 있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를 . , , , , 비롯하여 일본 중국 서인도제도 갈라파고스 하와이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긴꼬리투구새우는 알 상태로 오랜 세월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서식지 환경이 양호해지면 

월중 하순경 벼 · , . 생육초기의 논이나 못자리 등지에서 발생하여 7 월 하순경에 소멸한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식물의 어린 싹을 비롯하여 모기 유충 물벼룩 각종 , , 유기물 등 아무거나

잘 먹는다 최근 .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긴꼬리투구새우 복원 증식시켜 친환경농법에 적용

          하는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 참고문헌 : 영산강유역환경청 남도의 . 2006. .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시보출판사


1) 향어 Cyprinus carpio ( ) 이스라엘 잉어1975년부터 소양호에서 처음으로 길렀는데 토종 잉어보다

두배 이상 빠른 성장률이자 수자원 이용 차원에서 미국 일본등지에서 다량 수입하여 여러 곳에서 기르다가 홍수 등으로방류되어 함평군에도 대소 하천과 저수지에 자연 서식하게되었다.

향어 특유의 왕성한 식욕과 번식력으로 급격히 세력권을 확보,기존 고유어종의 터전을 빼앗으면서 

토종잉어 향어 교잡으로 인한 잡종어로 전락하는 등                 수중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2) 블루길 수입종 불루길이 서식하는 주변에는 우리 고유의 어족인 붕어와 잉어, , 피라미 치어 등의 토종이 보이지 않고 있으며 우리 어종 중에서도 공격력이 뛰어난 쏘가리마저도 적수가 될수 없었다.

산란기는 4-6월로 알려졌으며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주위를 보호하느라 다른 어종을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며  피라미나 각종 고기의 알 등을 마구 잡아먹는 난폭자로 자신의 천지를 만들어 나아갔다.


4) 떡붕어 훼라붕어 Carassius cuvieri ( ) 1960년대 일본에서 수자원 이용 차원에서 블루길과 같은 시기에 

수입된 붕어로 성장이 토종어종보다 2-3배 빨라 소득 향상위해 도입했찌만 확산되어 피해를 주고 있다.

훼라붕어(떡부어)는 토종붕어보다 둥글고 타원에가까우며 힘이 약해 그렇게 빠르지도 않은 점이 특징이다.

저수지나 흐름이 완만한 하천의 하류부 약간 깊은 곳의 중층이나 때로는 , . 표층 가까이에서 떼지어 다닌다.먹이는 주로 식물성 플랑크톤인녹조류와 규조류를 섭식하지만 때로는 ,수초도 먹어대는 대식가이다.

본 종은 붕어의 산란 성기인 5-6월과 거의 비슷하거나 이보다는 약간 빠르게 산란을 한다고 한다.

 붕어보다 성장이 빨라서 5-6 .년 지나면 40cm 를 넘는다 일본 비와후가 원산으로 일본 전역에 이식되었고 국내에서도 , . 이식 정착되어 저수지와 대형댐의 여러 곳에서 우점적으로 분포한다 현재는 전국의 저수지 및 댐에 정착되어 재래종 붕어보다 우점종일 뿐만 아니라 재래종과의 교잡에 의한 잡종이 나타나고 있다.

함평군에는 하천과 저수지에서 살고 주로 물의 중층에 떠서 생활하며 수초가 많은 저수지에 군집되어있다.

우리 고장 이곳저곳의 하천이나 저수지에 살고 있는 우리 붕어들의 모습과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우리 . .


5) 베 스 Micropterus salmoides

흐름이 없는 정수역인 호소나 하천 하류의 흐름이 느린 곳을 좋아한다 원산지인 . 미국에서는 염분

이 있는 기수역에서도 서식한다. 공격력이 아주 강한 어종으로 새우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산다. 산란

은 16-22℃가 되는 지역의 수초가 있는 바닥에 수컷이 청소를 하고 직경 50cm, 15cm 깊이 의 둥지를

만든 후 암컷을 , ( ) . 유도하여 산란 방정 방정 한다.

 한마리의 수컷은 여러 마리의 암컷을 유도하여 산란 행동을 하는데 보통 1개의 둥지에 수백

개로부터 1 . 만개까지의 알을 낳아 부화하도록 한다 수컷은 산란 후 둥지에 있는 알과 치

어를 보호한다 낚시나 . , 식용으로 이용되는데 국내에서도 자원 조성용으로 수산청에서

1973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경기도 가평 조종천 등의 여러 곳에 시험 방류를 하는 동안 적절치 , . , 못한 어종으로 판단되었다 그 이후 10 여 년이 지나는 동안 국내 하천에 정착

한강과 낙동강 금강과 , 섬진강 수계의 댐호에서도 매우 우세하여 생태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내용이 방대해서 발체 복사중 어순도 바까지고 내용도 불실한점 양해바람니더.

제 (1 절 자원식물 資源植物

식물자원의 사전적 의미는 육지에서 생육하고 있는 식물로서 현재 인류가 재배, 이용하고 있

는 작물밖의 이용목적이 , , 뚜렷하여 다소의 노력으로 탐색 선발 순화해 재배할 수 있거나 야생

상태의 식물을 채취 간단히 , . 가공해 이용할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종류에 따른 자원식물의 분류는 개발정도에 따른 분류와 용도에 따른 분류가 있다.

개발정도에 따른 분류에는 재배식물의 원종 재배식물의 , , ( , 근연식물 경제적 자원식물 미개발

개발중 개발된 , ) , , , , 자원식물 이 있고 용도에 따른 분류에는 식용자원 섬유자원 약용자원 관상

자원, ( ) , ( ) , ( ) , , , ( ) 유지 油脂 자원 기호료 嗜好料 자원 당료 糖料 자원 향신료자원 염료자원 밀원 蜜源 자원, ( ) . 수지 樹脂 ․ 탄닌자원 등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분류는 전체적이고 개괄적인 것으로 함평이라는 작은 공간에 모두 적용할 수

는 없다. 여기에 함평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의 종류와 분포상황에 대해 지금까지 조사된바 또한

없다.

본 장에서는 전체적인 식물자원의 종류와 내용만을 서술하되 함평군에서 특별히 많이 자생하

고 있거나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식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다만 약용식물 만은 ( ) ( ) 1962 1964 藥用植物 고 이현석 故 선생이 년부터 년까지 종류를 조사했었

고 1994 . 년에 보강했기 때문에 본 장에 일람표를 수록한다

1. ( ) 식용식물 食用植物 자원

식용자원은 일상생활에서 주식 또는 부식용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미 순화 되어 이용

되고 있는 작물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 앞으로 취급되어야 할 식용자원은 야생으로 산과 들에

서 자라는 식용이 가능한 야생 채소류가 주요 범주에 속한다.

야생채소류의 예로 개미취, , , , , , , , , 고비 고들빼기 냉이 고사리 곰취 달래 도라지 더덕 돌나

물, , , , , , , , , , , , , , 두릅 미역취 마 머위 모시대 부추 비름 수리취 쑥 쑥부쟁이 씀바귀 연근 참나물

제 장5 식 물 ( ) 植物

제5장 _ 식물 173

토란 등이 있다.

채소류에는 먼저 엽경채소에 배추, , , , , , , , 양배추 상추 시금치 미나리 잎들깨 셀러리 대위 산

채류 등이 있다 다음으로 . , , , , , 근채류에는 무 당근 우엉 더덕 도라지 등이 있고 과채류에는 고

추 도마도 가지 수박 참외 , , , , , , , . 메론 오이 호박 딸기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경채류에는 마

늘, , , , , , , . 파 양파 부추 달래 아스파라가스 생강 토란 등이 있다

함평에서는 유민봉 군수가 재직할 즈음인 1982년 봄 “야생초의 원예화 를” 군 시책으로 정

하고 함평군농촌지도소 현( ) , , , , 함평군농업기술센터 를 통해 두릅나무 돌나물 취 머위 쑥 등의

야생 식용식물에 대한 생태와 재배법을 연구하는 시범포를 운영했었다 하지만 . 유군수가 이임

한 후 연구가 중단된 사실이 있다.

야생초의 원예화는 앞으로 각광 받을 수 있는 사업으로 다시 추진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함평 쑥은 바다 바람의 영향으로 다른 지방의 쑥에 비해 영양이 풍부하고 섬유질이 연해 전국

제일의 품질을 자랑한다.

쑥은 식용도 하려니와 약용으로도 널리 쓰이며 자생력과 생장력이 강해 재배가 용이하기 때

문에 쑥차 쑥떡 쑥국 목욕탕의 , , , . 욕재 등 용도별 생산시설을 갖추고 권장하면 수익성이 높을 것이다

또 돌나물은 간 질환의 성약으로 알려오고 있어 수요가 급증할 수 있다.


2. ( ) 공업용식물 工業用植物 자원

해송, , , , , , , , , 적송 삼나무 리기다소나무 리기데타소나무 잣나무 편백 낙엽송 느티나무 초피나

무, , , , . 산초나무 때죽나무 이태리포푸라 메타세코이아 등이 있다

메타세코이아는 원시 수종으로 생장이 빠르고 또 거목 으로 ( ) 1962 巨木 자라는데 년 함평농고

에서 처음 사들여 30 30 여 그루를 심었으며 몇 그루는 군내 기관에 심었고 현재 직경 ㎝ 이상

높이 15m . 가 넘게 자랐으며 학교면 월산리 등지에 개인의 묘목장이 있다

1980 . 


5. ( ) 염료식물 자원과 染料植物 함평의 염색

염료식물은 염료를 만드는 원료가 되는 식물로 잇꽃 치자 쪽 ( ), , . 紅花 따위가 있다

• 염료식물의 종류

1. 매염제와의 결합성에 따른 종류

(1) 단색성 염료

한 종류의 염료로 한 가지 색만이 염색되는 식물성 염료이다.

(2) 다색성 염료

한 종류의 염료가 각종 매염제와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색을 발색시키는 식물성 염료로 그

성질에 따라 다시 건염염료 직접 , , , . 염료 염기성 염료 화염계 염료 등으로 나누어진다

① 직접 염료

염료의 가용성 색소를 추출 그, , , , 염액에 섬유를 담가서 염색하는 염료로 치자 황백 사프란

울금 등이 해당된다 이. . , , , , 염료의 염색은 대부분 염료식물의 꽃 잎 뿌리 수피 수목 심재 열

매 등을 가늘게 부수고 물에 달여서 염료 추출, . 염색한다

② 건염 염료

성분이 은인 돌유도체이며, , , , , , . 요람 인도남 숭남 대청 유구남 보라조개 등이 해당된다 건

염 염료 염색은 남 쪽 과 ( ) , 같은 불용성 색소를 알카리로 환원시켜 염색 공기 중에서 산화 발생

시켜 본래의 불용성 색소로 돌아가게 하는 견뢰도가 높은 염색방법이다. 대표적인 건염 염료로

188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는 남 쪽 염이 ( ) . 있으며 견뢰도가 매우 높은 염료이다

③ 염기성 염료

황벽이나 황련 등이 해당되며 주성분은 거의 베르베린을 함유하고 있다 다른 . 염료와 혼합하

면 침전을 일으키고 동물성 섬유에는 염색이 잘 이루어지는 반면 식물성 섬유에는 탄닌산 선매

염 과정을 거쳐야만 염색이 잘 이루어진다.

④ 화염계 염료

봉선화 산남 딸기 홍화 , , , , 등이 해당되며 그 성분은 안토시안류와 함께 산남의 경우에는 클

로포필 홍화는 , . 칼콘 유도체 성분으로 반드시 매염제에 의해 염색이 이루어진다 전통적으로

사용된 홍화 꽃에는 수용성의 황색색소와 불용성의 홍색색소가 함유되어 있는데 황색색소는 물

에 용해되는 직접성 염료인 반면 홍색색소인 카르타민은 알카리에 의해 추출되어 색상이 변하

는 다색성 색소로 다시 산에 중화시켜 염색이 이루어진다.

2. 색조에 따른 종류

(1) - ( ), , 적색계 염료 홍화 잇꽃 소목 꼭두서니 등

(2) - . , , , , , , 황색계 염료 황백 치자 울금 황련 괴화 환삼덩굴 매리골드 프리지어 민들레 등

(3) - , 청색계 염료 쪽염 치자청색소 등

(4) - ( ), 자색계 염료 자초 지치 비파 등

(5) - , 갈색계 염료 감염색 밤껍질 등

(6) - , , , , , , 녹색계 염료 생쪽 호박 무궁화 파키라 칡 익모초 쑥 등


(1) 치자

꼭두서니과의 다년생 상록관목으로 학명은 Gardenia Jasminoides . 이다 치자의 황색소는 카

로테노이드계 에 (carotenoid) . 속한다 카로테노이드계는 다중이중결합성의 카르복실산 탄화수소

화합물로서 일반적으로 지용성이지만 치자의 색소는 겐티오비오스 가 (gentiobiose) 결합된 일종

의 배당체인 크로신 이라는 (crocin) . 수용성의 색소이다

(2) 감

감은 오배자와 같이 탄닌 성분이 주를 이루는 염료식물로서 예로부터 제주도 갈옷의 염료로

많이 쓰여 온 염료식물이다 감염료로는 . , 풋감이 많이 쓰이지만 감잎 줄기 추출물 등도 염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염료로서 . 감은 탄닌 성분이 가장 많을 때로 씨가 갈색으로 초기변화 할 때며

시기적으로는 7 ~8 . 월말 월 초순이 가장 적합하다 감은 늦어도 염색하기 하루 전에는 따야 하며 따, 놓은 감을 방치하면 물러지고 당화됨으로 짖은 발색이 잘 안되며 무른 감은 찌꺼기가

많아 얼룩의 원인이 된다.


쪽 

남빛 푸른색과 ( . ) 藍 자주색의 중간 색 물

감으로 어지간히 사는 집안이면 쪽이불 쪽옷이 , 마련되어 있었고 “남색짜리 라는 ”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쪽물 들인 옷을 입으면 독사가 싫어하는 냄새가 있어 독사에게 물리지 않고 이가 번지지 않는다하여 더욱 중히 여겼다.

한방에서는 “남 이라하여 (藍)  ” 잎과 열매를 해독 해열 상처 , , 또는 독충에게 물린 곳을 치료하는 약으로 응용하였고 이와 같은 약효는 앞서 언급한 쪽물의 제독작용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특히 나산면 수상리는 나주시 문평면과 함께 전남에서 쪽물을 잘 들이는 곳으로 알려졌고

1980 . 년대까지 기능 보유자가 생존했었다

기능 보유자였던 김종환 년 (1982 75 ), (1982 70 ) 당시 세 김종수 년 당시 세 의 경험담에 의해 쪽

물을 들이는 방법을 간략히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 꽃이 약간 필 무렵 쪽을 베어 큰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며칠을 두면 쪽물이 우

러나오고 쪽의 잎은 누렇게 변색한다.

● 이 때 쪽풀은 건져내고 우러나온 쪽물에 조개껍질을 구어 밀가루처럼 가늘게 빻은 “사회

가루 를” 넣고 저으면 거품이 나오는데 거품이 많이 나도록 잘 젓는다.

● 시간이 지나면 쪽물은 밑으로 갈아 앉고 맹물은 위로 뜨는데 위로 뜬 맹물을 퍼낸 후

“잿물15)”콩대나 메밀대 또는 목화대를 태운 재를 시루에다 넣고 물을 부어 매끈매끈한 잿물을 만들어 쓴다.를 넣고 다시 “사회가루 를” 적당히 섞어 잘 젓는다.

● 거품이 항아리를 넘쳐흐르면 찌거기를 건져낸 다음 쪽물이 담긴 항아리 주변에 뜨뜻하게

불을 지핀다 계속 . . 불을 지피면 쪽물이 구름처럼 피어 솟구치는데 이렇게 되면 성공이다

● 쪽이 바로 피어오르지 않기 때문에 며칠간 꾸준히 불을 지피고 또 항아리 속을 잘 점검해야한다.

● 이 과정이 끝나면 베에 물을 들이는데 단 번에 작업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담구었다가 꺼

내고 말리는 일을 십여 번 되풀이하면 고운 남빛이 들게 된다.

● 이렇게 들인 물은 이 후 빠지거나 퇴색하지 않는다.


< 1 > 표 함평군의 염료식물 자원

식 물 명          색 깔    

산오리나무    누른다갈색 

산뽕나무       누른다색

 매자나무      누른다색

아그배나무    금 갈 색

 다정금나무    갈 색 

개살구나무    황 갈 색

자귀나무       담 황 색 

다릅나무       엷은다색

 칡              회 다 색

아카시아      다 갈 색

 북 나 무      다 갈 색

 봉 선 화      붉 은 색

제 비 꽃       황 록 색 

층층나무      다 갈 색

 작살나무     회 다 색

누리장나무    푸른취색

개 오 동       누른다색

 참 쑥          다 록 색

조 개 풀       농 황 색 

억 새           다 갈 색

 감              흑 갈 색


“잿물15)”콩대나 메밀대 또는 목화대를 태운 재를 시루에다 넣고 물을 부어 매끈매끈한 잿물을 만들어 쓴다.


최근 . 국내의 천연염색계는 소수의 장인 중심의 공방염색을 탈피하며 ‘ ’ 세노코 및 ‘텍스켐 원광대를 ’ 중심으로 한 ‘BTNT’ 등이 천연염료의 분말화 엑기스화 , , 등을 개발하여 상품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산업염색으로서의 가능성을 열고 있으며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서 시도되고 있는 

감마을 - ( 먹고 곶감 · 홍시 · 단감),

          ( 마시고 홍시술  감잎차 · 홍시쥬스 · 감식초 )

          ( 바른다 종이 ,  천의 감 염색 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또한 . ,

 일부 공방의 경우 기존에 없는 새로운 느낌의 염색법 및 염색물을 고안하여 다른 공방과 차별화를 시도하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모습도볼 수 있다 

색깔 :- 있는 흙과 식물염색을 결합하여 기존의 식물염색과 차별되는 느낌을 만들어 내는 염색 및 감 염색


세종 31 1449 ( ) 년인 년에 인제 강희안 이 仁濟姜希顔 쓴 양화소록에 “호남 연해의 여러 산에 자생하는 난은 가히 일품이다 라는 .( ) 生湖南沿海諸山者品佳 ” 구절이며 

이, 구절로 당시 호남의 자생 춘란이어느 정도 호평을 받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향기가 없는 우리 춘란은 난으로 대접 받지 못했다.


 일륜 형태 월륜 형태 도산금 형태 ( ) , ( ) , ( ) , 日輪 月輪 桃山錦 등이 전부 한국에 있고 또한

도산금 형태의 소심 투구화 두화 질부금 형태의 , ( - ), ( ) ( ) . 兜花 秩父錦 홍염 도 紅染 있다 일본에서 

70 년에 걸린 품종 선발의 역사가 한국에서는 불과 15년 만에 응축되어 훌륭하게 개화전부 한는 것이다

전국 자생란 전시회에서 대상 또는 입선한 난들 대부분이 함평인들에 의해 산채


기화( ) 奇花

단엽( ) 短葉

두화( ) 豆花 원판화

백화

복륜반

복륜화( ) 覆輪花

복색화( ) 複色花

산반화( ) 散斑花

소심( ) 素心

소심기종

소십두화

소심색화( ) 色花 

소심황화

야생란

원판화

자화( ) 紫花

적화

주금화( ) 朱金花〃

중투호

중투화( ) 中透花

투구화

호( ) 縞

호피반( ) 虎皮斑

호화

홍화( ) 紅花

황화( ) 黃花


함평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춘란의 최대 자생지이며 희귀 변이종 등 다양한 종류의우수명품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난의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지나친 남획으로 인한 생태계 우수형질의 난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가 용천사 . 꽃무릇

함평하면 가정 먼저 자랑할 명품으로 한국 100경 중 하나인 용천사 꽃무릇을 연상하게한다 여만평에 . 20 100 이르는 꽃무릇을 지금 인공적으로 조경한다고 생각하면 억원을 들여도 어찌 그 모습을 재현하겠는가 

누가 ? 처음 심었는지 몰라도 함평에 사는 우리 후손들은그 분에 대한 감사의 비라도 세워야 

화사한 봄이 오면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함평의 꽃잔디 길을 택한다. 핑크빛 물결이 함평 어느 길을 가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창문을 열면 향긋한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함평에서는 . ( ) 2001 최초로나산면에서 나홍채 면장 현 세계나비․곤충엑스포 사무총장 이 년도에 황곡소공원 500평을 꽃잔디 공원으로 조성하여 꽃이 피자 지나가는 관광버스가 멈춰사진촬영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져 

IMF 한파와 함께 일자리 창출의 일환으로 공공근로제도가 생겨 이분들과 함께 읍면에서 ․ 대대적으로 삽목 번식하여 천만그루 이상을 생산하여 꽃잔디길과 공원을 조성 하였는데 이를 구입 금액으로 환산하면 45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비용이며 특히 , 이른 봄 꽃이 없을 때 좋은 밀원식물이 되어 관내 양봉농가에 큰 효자노릇을해내고 있다

함평의 첫 관문인 검정교 밑 둔치는 잡풀이 무성하여 쓰레기 불법투기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2001 16 년에 농업기술센터에서 생태연못 개소를 조성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35종의 수련과 수생식물을 심어 형형색색의 예쁜

꽃이 피자 그 해에 전국 사진작가들 사이에 가장 좋은 사진촬영장소로 각광을

아파트 문화로 정착하게 됨에 따라 자리를 많이 차지하

는 대형 식물 보다는 꽃이 피는 소품 분화쪽을 선호하고 있으며 아파트의 , 특성상 그늘에서도 잘 견디는 식물을 가지고 실내조경을 할 수 있는 양치류 식물의 분화를 개발 상품화 하고 절화류 거베라는 함평에서 수경 재배한 상품이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 관광 형태 전개 과정에 있어서 고정된 명승고적이나 유적지관광에서 스포츠 레저로 발전하여 자연을 소재로 한 생태체험관광으로 옮겨 가고 있다.

7. ( ) 섬유식물 纖維植物 자원

섬유식물은 식물 가운데 수피 목부 엽신에 , , , , , 있는 섬유가 밧줄 의류 제지 깔개 바구니 등 원료가 되는 식물로 유사 이전부터 일상생활에 중요한 역할

 닥나무 목화 황마 양마 모시풀 골풀 왕골 삼 , , , , , , , , , , , 2000 아마 어저귀 고리버들 수세미 칡 뽕나무 등 종

이상의 종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필리핀에서만도 , 750 . 종을 상회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통되는 것은 방적용의 목화나 삼 등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화학섬유나 . 합성섬유의 출현으로 가공적인 경공업은 쇠퇴하 생태자원 탈공해

섬유식물은 건축의 영역에서 인공재료 텍스 ( · 파이버보드 의) . 형태로도 이용된다섬유식물은 용도에 따라 방적 · 제지용 닥나무 ( · 참동자꽃 · 삼지닥나무 · 대나무 · 전나무속 · 가문비나무속 등 솔 ), · 비용 코코야자 ( · 비수수 · 보리사초), 멍석이나 모자 ·바구니 등의 엮음용 밥풀고사리 ( · 고리버들 · 으름덩굴 · 등 · 개왕골 · 골풀 · 보릿짚등 쿠션이나 ), ( 구명용구 등의 충전용 케이폭 · 짚 등 천연포용 종려 ), ( · 수세미오이 등)으로나눌 수 있다.

또한 식물조직의 이용 부위에 따라 종자의 표피 털인 표피세포성의 섬유를 이용하는 것(목화· 블라드플라워 등 외떡잎식물의 ), ( 기계조직에 있는 후벽세포성 섬유를 이용하는 것 마닐라삼· 사이잘삼 · 월도 · 파초 · 파인애플 등 물관부섬유를 ), 이용하여 주로 제지펄프에 이용

하는 것 대나무 ( · 가문비나무 · 참피나무 · 오리나무 · 버드나무 등 체관부에 ), 발달한 길고 부드러운 체관부섬유를 이용하는 것 아마 ( · 삼 · 황마 · 꾸지나무 · 뽕나무 · 개모시

함평에서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왕골돗자리를 생산하는 왕골이 유명하다 물론 . , , , 목화 닥나무 삼 모시풀 등 어느

종류인들 함평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은 없지만 극히 소량일 뿐이다 하지만 . 왕골은 재배를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 70% . 생산되는 왕골돗자리는 전국 생산량의 를 차지한다 대표적인 섬유식물의 종류를 살펴보자.

 잎에서섬유를 얻는 외떡잎류의 마닐라삼 · 사이잘삼 · 모리셔스삼 · 뉴질랜드삼 등이 포함된다.

국내 제일을 자랑하는 함평 왕골돗자리는 전국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1991 . 년 이래 사업단이 구성되어 대량생산을 하고 있다 촉감이 상쾌하고 부드러우며 왕골자체에 염분성분이 함유되어 땀 흡수력이 뛰어나 건강에 좋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사용 및 보관이 간편하여 반영구적이다 우리 . 고유의 전통공예품으로 우아함과 품위가 돋보이며 생산 제품으로는 간석, , , , , . 요석 다단석 베개 방석 자동차시트 등 다양하다

(1) 1 : , , , , , 년생 초본류 나팔꽃 결명자 백편두 소회향 겨자 아주까리 등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함평의 토공물 중 ( ) ( ), 土貢物 약용식물을 보면 석류 石榴 비자( ), ( ) , , , 榧子 맥문동 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麥門冬 함평의 토산물로 석류 감 비자를 들었고 그산지는 가을고지 갈고지 ( . ) . 加乙古之 또는 갈구지라 부르던 현 대동저수지 수몰지 라 하였다

현재는 석류나 감의 특산지는 없고 군유산에 비자림만 있다.


옛 함평현읍지에 기록된 약용식물은,

반하( ), ( ), ( . ), ( . ), ( . 半夏 선모초 仙母草 익모초 益母草 암눈바앗 천화분 天花粉 하늘타리 뿌리의 전분 지부자 地膚子 댑싸리), ( . ), ( ), ( . ), ( . ), ( . 금은화 金銀花 인동꽃 석창포 石菖蒲 하수오 何首烏 큰조롱 차전자 車前子 질경이씨 고련근 苦楝根 멀구

슬나무 뿌리), ( . ), ( . ), ( . ), ( . ), ( 괄루인 括蔞仁 하늘타리씨 창출 蒼朮 삽주 홍화 紅花 잇꽃 복령 茯笭 소나무 뿌리의 혹 박하 薄

荷. ), ( . ). ( . ), ( . , ), ( ), ( . 영생이 지실 탱자나무 枳實 열매 갈근 칡 葛根 뿌리 천초 川椒 조피나무 분디나무 택사 澤瀉 우슬 牛膝

20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쇠무릎), ( ), ( . ), ( ), ( ), ( . ), ( . ), 목단 牧丹 작약 芍藥 함박꽃 치자 梔子 모과 木瓜 방풍 防風 병풍나물 감국 甘菊 국화의 일종 고삼

( . ) 苦蔘 너삼 이다 군내 . 각처에 흔하던 석창포와 군유산에 많이 자생하던 하수오는 희귀해 졌고

택사는 몇 농가에서 재배할 뿐이다.

괄루인 지부자 차전자 창출은 , , , , ,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우슬 갈근 고련근은 다른 지방에 비해 월등히 많이 자생하고 있다.


옛 기록에는 없지만 율초 환삼덩굴 는 ( . ) ( . ), 葎草 어느 지방보다 많이 자생하며 사삼 沙蔘 더덕천문동 호라지좆 은 ( . ) . 天門冬 군유산과 모악산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

1980 ( ) 년대에 들어서 작약과 목단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었고 어성초 와 魚腥草 인삼을 재배하는 농가도 생겼다.

함평에서 생산되는 약용식물 중 약효가 뛰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반하와 은행이다.

1) ( . ) 반하 半夏 끼무릇

반하는 끼무릇 · 소천남성 · 법반하라고도 하며 밭에서 자란다 높이 . 30cm . 정도이다 지름1cm 1 2 10 20cm 정도의 알뿌리에서 ∼ 개의 잎이 자라고 잎자루는 길이 ∼ 이며 밑부분이나 위쪽에 1 ( ) . 개의 주아 가 珠芽 생겼다가 떨어져서 번식한다잎은 3 .

반하에는 정유 베타 , , , , , , , 시토스테롤과 배당체 콜린 글루콘산 아스파라긴산 아르기닌 리진포도당 람노즈 , 1.9% ( 49%, 15%), 등이 있고 기름과 의 회분 마그네시움 약 칼시움 약 프로토아네

모닌과 비슷한 점막자극물질 휘발성알칼로이드 의 , , 0.002% . 에페드린이 있다 뿌리껍질에는 아린맛이 있는 호모겐티산이 있다.

반하의 효능에는 본초경 또는 ( ) ( ) 3 ( 本草經 본경 이라 本經 불리는 신농본초경권지 본초부록 神農本草經卷之3 ) ( ) ( ), 本草附錄 에는 한사 의 寒邪 침범으로 인한 한열왕래 명치 寒熱往來 부위가 팽팽하고 아픈 것 가슴이 , , 답답하고 기침하는 증상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캄캄한 증상 인후가 , 붓고아픈 증상 장명 을 , ( ) ( ) . 腸鳴 치료하고 하기 시키며 下氣 땀을 그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별록 에는 ( ) ( ) 別錄 가슴과 명치 부위에 담열 이 痰熱 뭉쳐져서 그득하고 답답하며 기침하고 상기( ) , , 上氣 되는 증상 명치 부위가 팽팽하고 결리는 증상 전염병으로 인하여 구토하는 증상을 치료하며 종기의 붓기를 없애고 황달 을 ( ) ( ) . 黃疸 치료하며 안색 을 顔色 좋게 한다 태아를 유산시킬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또한 견권 에 ( ) ( ) ( ) ( ) 甄權 의하면 담 을 痰 없애고 폐기 를 肺氣 아래로 내리고 위 가 胃 잘 소통되게하고 소화를 도와 구토를 그치게 하며 가슴 부위에 담 을 ( ) . 痰 없앤다 날 것은 종기로 부은 부위

를 문지르면 좋고 혹을 없애기도 한다고 하고 있다.

지대명 은 ( ) , , 池大明 음식을 토하고 넘기지 못하는 증상 심한 구토와 설사를 동반한 근육경련배가 찬 증상 학질 을 , ( ) . . 瘧疾 치료한다고 했다


한편 반하는 동의보감에 법제 한방에서 자연에서 ( ; , 法製 채취한 원생약을 약으로 처리하는과정 방법을 ) . 별도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대체적인 방법으로는 반하의 아린 맛이 없어질 때까지 물에 우린 다음 백반물 또는생강즙에 넣고 속이 익을 때까지 끓여 말리는 방법을 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초제를 쓰지 않던 1970년대까지는 보리를 수확하고 나면 보리밭 속에서자란 자연산 반하만 거두어도 많은 양이 모였다 그러나 . 1980 제초제가 남용되기 시작한 년대에들어 귀해지기 시작한 반하는 근래에 자연산은 거의 멸종되었다.함평에서 반하가 다량 출하되던 때가 1960 . 년대며 서울에서 전국 반하 중 최고의 값으로 팔렸다반하의 약효성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반하를 제일로 치며 서산과 , 장수에서 많이 재배했으며 최근에는 제주의 서귀포시에서도 반하를 약용 소득작물로 재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 유의하여 함평에서도 함평 반하의 옛 명성을 다시 찾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 ( . ) 백과 白果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한방에서는 백과라고 하는데 " " 황금의 나무 라는 별명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실로 위대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지만 아직 산에 저절로 나서 자라고 있는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 은행나무는 . 여느 나무와는 달리 사람의 도움없이는 번식하지 못한다 수많은 .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가 저절로 싹이 터서 자라지는 못하는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나는 것보다 유효성분의 함량이 20 100 배에서배나 많아서 독일 등에서 수입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하니 은행나무는 , 활용하기에 따라 어쩌면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보물나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은행나무는 그 몸속에 「플라보노이드 라는 」 살균 살충 , , 성분이 있어 갖가지 벌레의 유충식물에 기생하는 곰팡이 바이러스 , . 등을 죽이거나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 왕성한 식욕을 가진딱정벌레도 굶어 죽을지언정 은행잎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농가에서 거름을 만들 때에도 은행잎을 섞어 만들면 흙 속의 해로운 미생물이나 벌레들을 죽일 수 있다.

은행에는 간놀 펙틴 히스티딘 전분 단백질 지방 당분 , , , , , , 등이 많이 들어 있어서 폐결핵 환자나 천식 환자가 오래 먹으면 기침이 없어지고 가래가 적게 나오는 약리작용이 있다. 이같은효과는 은행이 호흡기능을 왕성하게 하고 염증을 소멸하며 결핵균의 발육을 억제하는 작용을하기 때문이다.

은행의 또다른 작용에는 레시틴과 비타민 B의 모체가 되는 엘고스테린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서 성욕감퇴 뇌빈혈 신경쇠약 전신피로 , , , . 등에 뇌혈관을 개선해 주는 효능도 있다

그러나 은행알은 독이 있어서 날로 먹거나 한꺼번에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은데, 「동의보감 에」 보면 많이 먹으면 배 아픔 구토 설사 발열 , , , . 증세가 있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공복에 은행알을 많이 먹어 중독 증상이 있을 때 감초 달인 물을 마시면 바로 해독된다.

은행보다 더 놀라운 효능이 있는 것은 은행잎인데 예로부터 , 민간에서 심장을돕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며 폐를 튼튼하게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등의 효능이 입증되어 가슴앓이, 가래 및 천식 설사 백태 상피증 , , , . 등을 치료하는 약으로 널리 써 왔다

은행잎에 들어 있는 성분인 징코라이드 A,B,C , , 와 진놀 프라보놀 등은 말초혈관 장애 노인성 치매 등을 치료 예방하는 , 획기적인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현대의학에서 비상한 관심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은행 효능과 약효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먼저 가장 간단한 방법은 소금을 쳐서 프라이팬에 볶거나 불에 직접 구워 먹는 것이다 은행을 . 4~5 불에 구워 한 번에 개씩 먹어주면 위에 열거한 효능 외에도 정력을 강하게 하고 또, 밤에 오줌을 싸는 어린이에게 날마다 먹이면 얼마안 가서 낫는다.

다음으로 은행 두 근을 볶아 껍질을 까고 호두 속살 두 근을 살짝 찧어 함께 밥솥의 밥물이 잦아들 때쯤 밥 위에 삼베보자기를 펴고 얹어두고 밥솥 뚜껑을 닫아 찐다 이렇게 . 세 번을 찐후에 기름을 짜면 은행 호두기름이 되는데 오래된 , , 기관지염이나 해수 천식 등에 더없이 좋은효과를 낸다 소나 . 돼지 혓바닥을 삶아 죽염을 섞은 은행 호두기름에 찍어 먹으면 더할 나위없는 효험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약효 성분이 있는데 은행을 불에 볶아 껍질을 벗기고 찧어서 물 두 사발에삶아 그 물을 마시거나 죽을 쑤어 먹으면 남녀 생식기병에 좋고 특히 여성의 음부에 악취가 날때 탁효가 있다.

또한 불에 볶아 껍질을 벗긴 은행을 찧어 순두부에 삶거나 콩과 함께 삶아 먹으면 여성의 뒤가 깨끗해진다고 한다.

계란에 구멍을 내어 은행 알 두 개를 밀어 넣고 찐 것을 하루 세 개씩 닷새만 먹으면 여성의대하증이 말끔히 치유되는 신비한 효능도 있다.

음력 5 35g 15g 월에 따서 그늘에 말린 은행 잎 에 감초 을 넣고 달인 물을 수시로 마시면 몸안에 쌓인 독을 풀고 혈압을 내리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

날 은행을 껍질을 까고 설탕물에 달여 먹으면 신장 방광이 , 튼튼해지며 술에 삶아 먹으면 조루증이 낫는 등 은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마지막으로 은행은 죽을 쑤어 먹으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한다.

현재 우리 군의 군나무가 은행나무이다 하만 . 은행을 군나무로 정할 때는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었다 이제 . 우리의 군나무를 더 정성들여 가꾸고 또 더욱 더 가치 있게 이용하는데 깊은 연구가 있어야할 것이다.


3) ( ) 함평군 약용식물 일람 藥用植物一覽

·조사 기간∶1962~1964, 1994. 보강

·조 사 자∶리현석

·수정 보완∶1997년

·기술 방법 우리 ∶ 말 이름으로 쓰되 가 나 다 , , ( ) , 순으로 배열하였고 속에 생약명 줄을 바꾸어 학명을 썼으며 또 간략하게 용처를 썼다.


• 함평군 약용식물 일람


 가래 ( - ) 안자채 眼子菜

Potamgeton Franchetii Bennett et

Baagae

술 중독 가물치 , 및 날짐승을 먹고 중독을 일으켰을

때 삶아 먹음

 가새잎개머루

Ampelopsis. brevipedunculata var.

heterophyll for. citullodes

동상, , , 진통 종기 치질에 싸맴

 가지 ( - ) 가자 茄子

Solanum melongena var. Esculentum

얼굴 죽은깨, ( ), , , 부인탈음 婦人脫陰 새안손 요통 변혈

등에 씀

 각시취

Saussurea pulchella Fischer ex DC

토혈( ), , , 吐血 지혈 간염 황달에 씀

 갈대 ( - ) 노근 蘆根

Phragmites communis Trin

뿌리를 건위 해독 해열 담을 , , , 제거하는데 씀

 갈매나무 ( - ) 서이인 鼠李仁

Rhamnus davurica Pallas

악한( ), ( ), ( ) 惡寒 부종 浮腫 하혈 下血 등에 씀

 감국 ( ) 甘菊

Chrysanthemum lndicum Linne

풍열 두통 눈병 ( ), , 風熱 치료제로 씀

 감나무 ( - ) 시체 柹蔕

Diospyros kaki Thunberg var. domestica Makino

설사 딸국질을 , 할 때 달여 먹음

 갈참나무 ( - ) 토골피 土骨皮

Quercus aliena Blume

나무껍질을 수렴( ), ( ), 收斂 강장 强壯 종기독을

다스리는데 씀.

 감초 ( ) 甘草

Glycyrrhiza glabra

각종 독을 제거하는데 씀 재배만 . 하고 있음

 강호리 ( - ) 강활 羌活

Ostericum Koreana (Maximowicz)

Kitagawa

두통 중풍 , . 등에 뿌리를 쓴다 재배만 하고 있음

 개곽향 ( ) 藿香

Teucrium japonicum Houttuyn

해수, , ( ) 폐염 치혈 痔血 에 뿌리를 씀

 개구리미나리

Ranunculus Tachiroei Franchet et

Savatier

벌레 물린데 종기 , . 위에 싸맨다 독이 있는 품

 개구리밥 ( - ) 부평 浮萍

Spirodela polyrhiza (Linne) Schleiden

피부병 해열제로 , 전초를 달여 먹음

 개구리자리 ( - ) 석룡예 石龍芮

Ranunculus Sceleratus Linne

충독( ), ( ), 虫毒 진통 鎭痛 부스럼에 씀

 개갓냉이

Rorippa sublyrata (Miquer) Frarchet & Savatier

전초를 소화 버짐 ( ), , 消化 폐염 건위제로 씀

 개나리 ( - ) 연교 連翹

Forsythia koreana Nakai

창종 나력 버짐 , , . 등에 응용함

 개당주나무 ( - ) 수산사 藪山査

Ribes fasciculatum s. et z. var.

japonicum Jaenzewsky

요통( ), , , ( ) 腰痛 위장 옻 장출혈 腸出血 등에 씀

 개맥문동

Lipriope Koreana Nakai

이뇨( ), , , ( ), , 利尿 해열 감기 진정 鎭靜 강장 젖을 많이

나오게 하는데 씀

208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개맨드라미 ( - ) 청상자 靑箱子

Colosia argentea Linne

씨를 부인 음창( ), , , 陰瘡 살충 해열 통경에 씀

 개머루 ( - ) 사포도 蛇葡萄

Ampelopsis brevipedunculata var. heterophyll

Hara

동상, , , , ( ) 진통 이뇨 치질 종독 腫毒 등에 싸맴

 개벚나무 ( - ) 구내자 狗奈子

Prunus leveilleana var. typica Nakai

열매를 먹으면 강장제가 되며 껍질은 고혈압을

다스리는데 씀

 개비자

Cephalo taxus Koreana Nakai

구충( ), , 驅蟲 건위 장출혈에 씀

 개산초나무 ( - ) 죽엽초 竹葉椒

Zanthoxylum planispinum Siebold & Zuccarini

이뇨, , , , 중풍 치통 건위 진해제로 쓰임

 개시호 ( - ) 시호 柴胡

Bupleurum longe radiatum Turczaninow

해열제로 뿌리가 특효함

 개암나무 ( - ) 주인 楱仁

Conylus heterophylla var. japonica Koidzumi

열매를 보익( ), 補益 강장제로 씀

 개연꽃

Nymphozanthus japonicus (DC) Fernald

자양강장, , 지혈 해독에 씀

 개오동 ( - ) 반피동 半皮凍

Paederia scandens Louur Merrill

거풍( ), , , , , 去風 치통 해수 해독 이질 신장염 등을

치료함

 개옻나무

Rhus trichocarpa Miquel

소화, , , , ( ) 건위 당뇨 관절염 통경 通經 에 쓰임

 개자리 ( - . . ) 수숙 首蓿 고여목 거여목

Medicago denticulata Willdenow

황달의 요약 목초용으로 . 많이 재배함

 갯버들 ( - ) 수양 水楊

Salix graicilistyla Miqel

이뇨 종기 버짐 수렴 황달을 , , , , 치료하는데 가지와

잎이 쓰임

 겨우살이 ( - ) 동청 凍靑

Viscum coloratum var. jutescens Miy & Kudo

진정, , , 통정 허리아픔 고혈압에 전초를 이용함

 깽깽이풀 ( - ) 조황연 朝黃連

Plagiorhegma dubium Maximowicz

건위 설사를 , 멈추게 하는데 뿌리와 줄기를 씀

 고들빼기 ( - ) 황화채 黃花菜

Ixeris sonchifolia Hance

어린잎 식용 건위의 . 효과가 있음

 고로쇠나무

Acer mono maximowicz

수액을 자양강정제로 쓴다. 군유산에 자생함

 고본 ( ) 藁本

Angelica tenuissima Nakai

부인병 치료 배아픔 두통 , , 등에 전초를 씀

 고비 ( - ) 구척 狗脊

Osmunda japonica Thunberg

잎을 달여 마시면 각기병 및 수종( ), ( ), 水腫 구충 驅蟲

임질에 효과가 있음

 고삼 ( ) 苦蔘

Sophola angustifolia Siebold et Zuccarini

건위 구충약으로 , . 전초가 쓰임 약간 독성이 있음

 고수 ( - ) 호유 胡荽

Coriandrium sativum Linne

대변하혈 학질 이질등에 , , . 씀 열매가 익으면

방향성이 있고 정원에 재배도 함

 고욤나무 ( - ) 군천자 君遷子

Diospyros Lotus Linne

야뇨( ), ( ), , , 夜尿 지사 止瀉 토혈 중풍 동상 등에 쓰임

 고추 ( - . - ) 번초 蕃椒 고초 苦草

Capicum logum

담 결림, , , 발한 식욕부진 조충 구제 등에 씀

제5장 _ 식물 209

 고추나물 ( - ) 소연교 小連翹

Hypercum erectrum Thunberg

심장병 쇠붙이로 , , 인한 상처 뼈가 부러졌을 때

전초를 찧어 붙임

 곡정초 ( ) 穀精草

Erioca sieboldianum Siebold & Zuccarini

눈병 목구멍의 , ( ) 후비 를 喉痺 치료함

 골담초 ( ) 骨膽草

Cargana chamlagn Lam

풍습 신경통 , . 등에 씀 정원에 많이 심고 있었으나

근래에는 보기 드물게 됨

 골무꽃

Scutellaria indica Linne

폐염, , , 해열 위장병 해수에 전초를 씀

 골풀 ( - ) 등심초 燈心草

Juncus decipiens Nakai

이뇨, , , 임질 지혈 수종을 다스림

 관중 ( . - ) 貫衆 면마 綿馬

Dryopteris crassirhizoma Nakai

구충, , , 자궁출혈 해열 두통에 씀

 광나무 ( - ) 여정실 女貞實

Ligustrum japonicum Thunberg

잎은 여러 가지 부스럼 열매는 , 강장약으로 씀

 꽈리 ( - ) 산장 酸漿

Physalis Francheti Masters

열매를 이뇨 설파제 통풍약으로 , , , 쓰고 뿌리는 해수

해열, 이뇨제로 씀

 괭이밥풀 ( - ) 초장초 酢漿草

Oxalis corniculata Linne

피부병 소화 해독 벌레의 , , , 독을 제거하는데 쓰임

 꼭두선이 ( - ) 천초 茜草

Rubia Akane Nakai

황달, , , ( ), , , , 지혈 토혈 뇨혈 尿血 해열 통경 강장 풍습

등에 쓰고 또 염료( ) 染料 로도 씀

 꽃다지 ( - ) 정력 葶藶

Draba nemorosa Linne var. hebecarpa Ledeb

기관지염 천식 변비 , , 등에 씨를 씀

 꽃무릇 ( - ) 상사화 相思花

Lycoris radiata Linne var. Heric Herb

벌레물린데 화상 , . . 등에 응용함 용천사에 많이 자생

위기식물.

 구기자( . ) 拘杞子 새꼬치

Lycium chinensis Miller

열매는 강장, , , , 건위 당뇨 폐결핵 간장약으로 쓰고

가지와 뿌리껍질 지골피 은 ( - ) , 地骨 皮 해열 청량제로

 구릿대 ( - ) 백지 白芷

Angellica davurica (Fisher) Bentham et Hooker

감기, , , , . 두통 치통 부인혈증 태아 분만 촉진에 쓴다

재배를 많이 함

 구슬봉이

Gentiana squarrosa Ledobour

건위 종양 식은 , , . , 땀 회충 습진을 다스림

 구약나물 ( - . ) 구약 蒟蒻 곤약

Amorphophallus konjac

종기 장내 , 배설작용 촉진 등에 씀

 구절초 ( ) 九折草

Chrysanthemum sibiricum Fischer

건위, ( ), , , 보익 補益 정혈 보혈 신경통에 쓰임

 궁궁이 ( - ) 천궁 川芎

Angellica polymorpha Maximowicz

순혈( ), ( ), , . 順血 청혈 淸血 강장 진정제로 씀 재배를

많이 함

 꿀풀 ( - ) 서주하고초 徐州夏枯草

Brunella asiatica Nakai

건위 자궁병 , 등에 씀

 꿩의다리

Thalictrum aquilegifolium Linne var. japonica

Nakai

뿌리를 달여 배앓이에 쓰고 뿌리의 분말은 상처에

바름

 귤나무 ( - . - ) 진피 陳皮 청피 靑皮

Citrusnobilis Makino

잘 익은 귤의 껍질 진피 덜익은 ∶ . . , 껍질∶청피 건위

발한, 감기에 씀

210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긴병꽃풀 ( - . ) 연전초 連錢草 속칭 적설초

Galechoma hederacea Linne var. longituba

Nakai

전초를 소아의 경풍, , , , ( ) 해열 진해 지혈 이수 利水 에

 나도닭의장덩굴 ( - ) 즙채 蕺菜

Bilderdykia convolvulus (Linne) Dumortier

잎과 뿌리를 치질, , , , , 임질 부스럼 매독 요도염 음위

등에 씀

 냉이 ( - ) 제채 薺菜

Capsella barsa­pasroris Miquel Medicus

전초를 이뇨 해열 지혈에 , , . 응용한다 안질의 특효약

 나팔꽃 ( - . - ) 견우자 牽牛子 흑축 黑丑

Pharbitis rigida S. et Z.

씨를 설사, , , 이뇨 수종 각기병 치료에 응용함

 노간주나무 ( - ) 두송실 杜松實

Juniperus utillis Koidz

열매를 이뇨 거담제로 , . , 쓴다 건위 고혈압의 특효약

 노란하늘타리 ( - . - ) 왕과 王瓜 토과 土瓜

Trichosanthes quadricirra Miquel

이뇨, , 거담 수렴제

 노루발풀 ( - ) 녹제초 鹿蹄草

Pyrola japonica Klenze et Alefeld

이뇨 방부 각기 충독 , , , 제거에 전초를 씀

 녹두( ) 綠豆

Phaseolus radiatus Linne

씨를 두창, , , 부종 부종 제독에 응용함

 놋젓가락풀 ( - ) 초오 草烏

Aconitum ciliare DC

신경통, 류마티스에 씀

 누리장나무 ( - ) 상산 常山

Clerodendron trichotomum Thunberg

건위, , 종기 피부병에 씀

 눈개승마 ( - ) 죽토자 竹土子

Aruncus americanus (Person)

Rafinesque

씨를 정력, , , 해독 지혈 편도선염에 씀

 느릅나무 ( - ) 유백피 楡白皮

Ulmus davidiana var. japonica Nakai

가지나 뿌리 껍질을 이수, , ( ), 거담 소종 消腫 새살

차는데 씀

 느티나무 ( - ) 괴목 槐木

Zelkova serrata (Thunberg) Makino

껍질을 강장, ( ), , 안태 安胎 부종 이수에 씀

 다닥냉이

Lepidium micranthum Ledebour

해수, ( ), , 두풍 頭風 이뇨 대머리에 씀

 다래나무 ( - ) 후도 猴桃

Actinidia alguta S. et Z.

덩굴 즙액을 신장병에 복용하면 특효

 다름나무

Maackia amurensis Rupree &

Maximowicz

고혈압, , , 지혈 자궁출혈 충혈 등에 꽃을 응용함

 닥나무 ( - ) 저실자 楮實子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열매와 잎을 양기 피로 , , ( ) 회복 명목 明目 등에 씀

 단삼( ) 丹蔘

Salvia miltriorrhiza Bunge

뿌리를 자궁출혈, , , 월경불순 관절염 청혈제로 씀

 단풍취

Ainslia acerifolia Schulzii Bipontinus et Zollirger

건위에 효과가 있음

 달래 ( - ) 산 蒜

Allium monanthum Maximowicz

비타민 C , 가 다량 함유되어 있고 고혈압 강정

강장제로 쓰임 많이 . 재배함

 담배 ( - ) 연초 煙草

Nicotiana Tabacum Linne

피부약, ( ), ( ) 풍한 風寒 체기정담 滯氣停痰 에 씀

 당근 ( ) 唐根

Daucus Carota var. sativa

빈혈, , , 이뇨 신장염 담 제거에 씀

제5장 _ 식물 211

 닭의장풀 ( - ) 압척초 鴨跖草

Commelina communis Linne

종기, , ( ) 이뇨 강심 强心 에 응용함

 담배풀 ( - ) 천명정 天名精

Carpesium abrotanoides Linne

조충구제용( ) 條虫驅除用 으로 열매를 씀

 당단풍 ( ) 唐丹楓

Acer pseudo sieboldianum(paxii) Komarov

수액 을 ( ) ( ) 樹液 하리 下痢 에 씀

 딱지꽃 ( - ) 위능채 委陵菜

Potertilla chinensis Seringe

지혈, , , 보익 통경 해열제로 뿌리를 씀

 딱총나무

Sambucus willi9amsii Koreana Nakai

골절 신경통 해열 이뇨 폐염 , , , , 등을 치료하는데 씀

 땅콩 ( - ) 낙화생 落花生

Arachis hypogaea

건위, 강정제로 쓰임

 대극 속명 ( . ) 大戟 버들옷

Galarhaeus pekinensis (Ruprecht) Hara

행혈( ), ( ), , ( ) 行血 발한 發汗 배앓이 하설제 下泄劑 로 씀

 대싸리 ( - . ) 지부자 地膚子 속명 비싸리

Kochia scoparia Schrader

소변불편, , . 음경 대하 등의 특효약

 대왐풀 ( - ) 백급 白芨

Bletilla striata

비늘 줄기를 부스럼, , ( ), 지혈 보폐 補肺 간질환 등에

응용함

 대추 ( - ) 대조 大棗

Zizphus jujuba millear var. intermis Rehder

완화제 해열 목구멍 , , , 질환 요통 등에 씀

 대황 ( - ) 대황 大黃

Rheum urdulatum Linne

변비 소화불량 극소량 ( ), 복용 타박상에 뿌리를 응용함

 댕댕이덩굴 ( - ) 목방기 木防己

Cocculus trilobus DC

이뇨의 특효약

 때찔래 ( - . ) 매괴화 玫瑰花 일명 해당화

Rosarugosa thunberg var. typica Regel

수렴 교미 지혈 피를 , ( ), , , 矯味 맑게 하는데 꽃 열매를

응용함

 더덕 ( - ) 사삼 沙蔘

Condonopsis lanceolata Traut

뿌리를 식용도 하고 거담, , , , 건위 강장 폐열 제거

산기 에 ( ) . 疝氣 쓴다 재배를 많이 함

 떡갈나무 ( - ) 해두 檞斗

Quercus dentata Thunberg

잎과 껍질을 강장, , 수렴 해동제로 응용함

 떡쑥 ( - ) 서국초 鼠麴草

Gnaphalium luteoalbum Linne var. multiceps

(Wallich) Hooker fil

진해, 거담약으로 응용함

 도꼬로마

Dioscorea Tokoro Makino

어독( ), , , , 魚毒 매독 창산 젖앓이 토혈에 잎을 응용함

 도꼬마리 ( - ) 창이자 蒼耳子

Xanthium strumarium Linne

발한 해열 고혈압 , , 치료제로 전초를 씀

 도라지 ( - ) 길경 桔梗

Platycondon grandiflocum A. DC

진해 거담 젖을 , , , ( ), 많이 나게 함 배농 排膿 인후병에

응용함. 재배를 많이 함

 독말풀 ( - ) 만타라화 曼陀羅華

Datura tatula Linne

천식 경련성의 , , , , 해수 신경통 매독 암종에 응용함

 돌가시나무

Rosa wichuraiana crepin

복통, ( ), ( ), ( ), , 하리 下痢 누뇨 淚尿 음위 陰痿 관절염

강장, , 치통 종창에 응용함

212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돌감나무

Diospyros kaki var. silvestris Makino

야뇨, , , , 토혈 지사제 중풍 동상에 씀

 돌나물 ( - . - . ) 전채 錢菜 석채 石菜 일명 돈노물

Sedum sarmentosum Bunge

잎은 종양의 고름을 빼는데 삶은 , 물은 치질을

치료하는데 쓴다 최근에 . 간경화 증을 다스리는

요약으로 판명됨

 돌배나무 ( - ) 산이 山梨

Pyrus montana Nakai

토사, 해열제로 씀

 두릅나무 ( - ) 송목 松木

Aralia elata Seemenn

해열 강장 거담 당뇨 , , . . . 치료제로 씀 일부 재배를 함

 두충 ( ) 杜冲

Eucommia ulmoides Oliver

관절의 동통 척추의 ( ), , . 疼痛 여러 병 견골제로 씀

재배를 많이 하고 있음

 둥굴레 ( - . ) 편황정 片黃精 일명 괴불꽃

Polygonatum japonicum Morren & Decaisne

폐염, , , , , ( ) 부스럼 강심 강장 당뇨 풍습 風濕 에 씀

 뚝깔

Patrinia villosa (Thunberg) Jussieu

안질 화상 단독 버짐 , , , 등을 치료하는데 전초를 씀

 들깨 ( - . - ) 백소 白蘇 임자 荏子

Perilla frutescens var. typica

고혈압, , 산후회복 담제거 등에 씀

 들현호색( - ) 현호색 玄胡索

Corydalis ternata Nakai

진경, , 진통 월경조절 치료에 씀

 등 ( . . ) 藤 참등 등나무

Wisteria japonica Sieboid et Zuccarini

줄기의 혹을 암에 응용함

 등골나물 ( - ) 산란 山蘭

Euatorium japonicum Thunberg

황달, , , , , , , 보익 고혈압 토혈 폐염 산후 배앓이 중풍

당뇨 등을 치료함

 띠 ( - ) 백모근 白茅根

Imperata cylindrica Linne var. koenigii (Retz)

Durand et sunitz

주독 이뇨 지혈 발한 상처 , , , , 등에 쓰는데 특히

임질에 특효가 있음

 마 ( - ) 산약 山藥

Dioscorea batatas Decee

자양강장제, , , 동상 화상 젖앓이에 생즙을 씀

 마가목 ( - ) 마아목 馬牙木

Sorbus Commixta Hedlund

보혈, , 중풍 구충제로 활용함

 마늘 ( - . - ) 호 葫 대산 大蒜

Allium cativum var. Pekinense

치핵( ), , ,, , , 痔核 축농증 곽란 후두염 이질 더위 먹은데

응용함

 마디풀 ( - ) 편축 萹蓄

Polygonum aviculare Linne var. buxifolium

Ledebour

황달 곽란 어린이 , , 회충 구제에 전초를 씀

 마름 ( - ) 능실 菱實

Trapa natans Linne var. bispinosa Makino

덩이 뿌리와 열매를 자궁혈종, , 월경폐지 위암 예방에

 마삭나무 ( - ) 낙석 絡石

Trachelo spermum asiaticum (S. et Z.) Nakai

var. intermedius Nakai

하리, , , ( ), , , 안태 진통 거풍 去風 각기병 종기 강장제로

 마타리 ( - ) 패장 敗漿

Patrinia scabiosaefolia Fischer

안질 화상 단독 종기와 , , , , 부스럼 버짐에 씀

 만병초 ( ) 萬病草

Rhododendron faurica franchet var. rufescens

Nakai

내장약 해열 최음 신장 , , , . 질환의 묘약으로 알려 옴

불갑산에 10 1992 여 그루가 자생하였으나 년 무지한

채약꾼에 의해 모두 뿌리까지 뽑혔으며 새로

발견하지는 못했음

제5장 _ 식물 213

 만삼( . ) 蔓蔘 더덕

Codonopsis pilosula Nannfelelt

뿌리를 부인병, , ( ), 임질 패로 肺癆 태산불알 치료에 씀

 말냉이 ( - ) 퇴람채 退藍菜

Thlaspi arvense Linne

중풍, , , 이뇨 늑막염 신경통에 씨를 응용함

 말오줌나무 ( - ) 접골목 接骨木

Sambucus latipnna Nakai

타박상 발한 무좀 , , 등에 응용함

 맑은대쑥 ( - . ) 인호 茵蒿 개제비쑥

Artemisia keiskeana Miquel

해열에 달여 마심

 매화( - . - ) 백매 白梅 오매 烏梅

Prunus mume Siebold & Zuccarini

지혈 소화 담과 , , , 가래 곽란 등을 다스리는데 씀

 맥문동 속명 ( . ) 麥門冬 겨우살이

Liriop platyphylla wanget Tang

덩이 뿌리를 완화, ( ), , 청양 淸養 거담 강정제로 씀

 맨드라미( - . - ) 계관화 鷄冠花 청상자 靑箱子

Celosia cristata Linne

하리, , , , , . 눈병약 지혈 해열 옴 버짐 등에 응용함

복용시 가물치, 돼지고기를 금함

 머위 ( - ) 관동화 款冬花

Petasites japonicus (Siebold & Zuccarini)

Maximowicz

토혈 지혈 간염 황달에 , , , . 씀 폐병의 특효약

 멀구슬나무 ( , - ) 고련피 자 苦楝皮子

melia japonica Don

껍질 열매를 구충 피부병 , , , 씻기 동상 화상 등에

응용함 함평에 . 많이 자생함

 멍석딸기 ( - ) 홍매소 紅梅消

Rosa parvifolius linne

강장 설사를 , , , ( ) 멈추게 함 안태 명안 明眼 에 씀

 메밀 ( - ) 교맥 蕎麥

Fagopyrum escuentum

오래된 체증 편두통 설사 , , , , , 멈춤 종기 대하증 임질

등에 응용함

 멧꽃 ( - ) 선화 旋花

Calystegia japonica (Thunberg) Choisy

천식, , , ( ), 중풍 이뇨 익기 益氣 종기 등에 응용함

 멧대추 ( - ) 산조인 酸棗仁

Zizyhus jujuba miller var. spinosus Bunge

간, , , , 심장병 허한 신경예민증 불면증에 씀

 며누리배꼽 ( - ) 자리두 刺利頭

Persicaria perfoliata Gross

고기 먹고 체한데 피부병 , 치료에 전초를 씀

 명아주 ( - ) 여 藜

Chenopodium album var. centrorubrum Makino

중독, , ( ) 버짐 백전풍 白癜風 치료제

 멧두릅 ( - . ) 독활 일명 獨活 땃두릅

Aralia continentalis Kitagawa

두통 현기증 습 버짐 , , , . 등에 쓴다 많이 재배함

 모과 ( - ) 목과 木瓜

Chaenomeles sinensis Schneider

곽란 더위 , , , , 먹은데 각기 진통 감기에 씀

 모란 ( - ) 목단피 牧丹皮

Paeonia suffruticosa Anderws

월경불순, , , . 치질 진정제 통경제로 응용함 재배를

많이 하고 음

 모시풀 ( - . - ) 행엽채 杏葉菜 저마 苧麻

Bochmeria frutescens Thunberg

뿌리를 해독약으로 달여 마심

 목련 ( - ) 신이 辛夷

Magnolia kobus DC

꽃은 두통 창독 축농증 , , , 치료제로 쓰고 껍질은 요통

골통( ), 骨痛 폐결핵에 씀

 묏미나리

Ostericum sieboldii (Miquel) Nakai

해열, ( ), 구풍 驅風 중풍 등에 씀

 무궁화 ( - . - ) 목근 木槿 순화 舜花

Hibiscus syriacus Linne

장출혈 장티부스 이질 , , 치료에 응용함

21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무릇 ( - ) 면조아 綿棗兒

Scilla sinensis Merrill

벌레 물린데 응용함

 무우 ( - . - ) 대근 大根 나부 蘿부 富 芙

Raphanus sativus var. acanthiformis

숙취, , , 화상 중이염 신장염 치료에 씀

 무화과 ( ) 無花果

Ficus carica Linne

자양강장 건위 즙액은 , , 치질 치료에 씀

 물개암나무

Corylus sieboldiana var. mandshurica

Maximowicz et Ruprecht

보익, 강장제로 씀

 물봉선 ( - ) 휘채화 輝菜花

Impatiens textori Miquel

가슴앓이 타박상 독사에 , , , 물렸을 때 난산에 응용함

 물푸레나무 ( - . - ) 수창목 水蒼木 진피 秦皮

Fraxinus pubineruis Blume

해열 소염성 , 수렴약으로 씀

 미꾸리낙시 ( ) 여뀌때

Persicaria sagittata (Linne) Gross var. americana

(Meissner) Nakai

식욕부진 통경 고기에 , , 체했을 때 씀

 미나리 ( - ) 근 芹

Oenathe stolonifera (Roxburgh) DC.

주독, , , , , , 폐염 황달 해열 고혈압 전신이 부었을 때

신경통에 응용함

 미나리아제비 ( - . ) 모낭 毛莨 자래초

Ranunculus japonica Thunberg

종기와 부스럼을 다스림. 유독성풀임

 미역취 ( - ) 일지황화 一枝黃花

Solidago virgaurea subsp asiatica Kitamura

해수 이뇨 부종에 , , . 씀 재배하면 수익성이 높음

 민들레 ( - ) 포공영 蒲公英

T. platycarpum H. Dahlstaedt

건위, , ( ), , , , , 이뇨 최유 催乳 종독 해열 발한 위암

강장제로 쓴다 함평군에는 . 재배하는 곳은 없음

 민족도리풀 ( . - ) 조리풀 세신 細辛

Asiasarum heterotropoides (Fr. schmidt) F.

Maekawa var. mandshuricum

(Maximowicz) F. Maekawa = Asarum Sieboldii

Miquel

해수 입이 , , 비뚤어진 증세 두통 등에 씀

 밀 ( - . - ) 소맥 小麥 부소맥 浮小麥

T. vulgare Vill∶보통밀

밀은 번열 조갈 에 ( ), ( ) 煩熱 燥渴 쓰고 물에 뜨는

부소맥은 허한을 다스리는데 씀

 바디나물 ( - ) 전호 前胡

Angelica decursiva Pranchet et Savatier

해열 진통 해수 단 , , , 제거에 응용함

 바위손 ( - . ) 권백 卷柏 부처손

Selaginalla involvens Spring

파혈, , ( ), ( ) 통경 장풍 腸風 탈항 脫肛 을 다스리는데 씀

 바위솔( - . . ) 와송 瓦松 지부지기 지붕지기

Orostachys japonicus (Maximowicz) Rerger

독충에 물렸거나 쏘였을 때 화상에 , 응용함

 바위취 ( - ) 호이초 虎耳草

Saxifraga stolonifera Meerburgh

여러 부스럼, 동상에 씀

 박 ( - ) 포로 匏蘆

Lagenaria siceraria var. depressa

번갈 심열 부종 담석을 , , , 제거하는데 응용함

 박주가리 ( - ) 라마 蘿藦

Metaplexis japonica (Thunberg) Makino

강정약으로 씀

 반하( . ) 半夏 깨무릇

Pinellia ternata (Thunberg) Breitenb

거담 구토 멀미약의 , , . . 주원료로 쓰인다 극성양초임

함평산이 반하 중 최우수품임

 밤나무 ( - ) 율 栗

Castanea renata Siebold et Zuccarini

건위 하혈 종기의 , , , , 독 신장강화 수렴제로 씀

제5장 _ 식물 215

 방가지똥 ( - ) 고채 苦菜

Sonchus oleaceus Linne

종창 대하증 , 치료에 씀

 방동산이

Cyperus amuricus Maximowicx var. laxus

(Franchet & Swatiee) Nakai

임질, , 이뇨 지혈 등에 씀

 방애잎 ( - . ) 배초향 排草香 중개풀

Agastache rugosa (Fischer & Meyer) O. Kuntze

감기, , , , 종기 곽란 구토 풍습 치료에 응용함

 배풍등 ( - ) 백영 白英

Solanum lyratum var. pubescens Nakai

신경통 태산불알 , , , 통증 부종 해열제로 씀

 백년초 ( - . ) 백년초 百年草 선인장

Opuntia tuna

선인장의 종류는 세계에 3,600 . 여종이 있다

백일해, , , , , 늑막염 각기 수종 위병 당뇨 등에 씀

 백미꽃 ( - . ) 백미 白薇 아마존

Cynanchum atratum Bunge

해열, 이뇨제로 씀

 백선 ( ) 白鮮

Dictamnus aibus Linne

통경, , , , 낙태 황달 중풍 이뇨제로 씀

 뱀딸기 ( - ) 사매 蛇苺

Duchesnea wallichiana nakai

위염, ( ), , , , , , 상한 傷寒 해열 토혈 당뇨 통경 진해 여러

독을 제거하는데 씀

 버드나무 ( - ) 유목 柳木

Salix koreansis Andersson

수렴, , , , 치통 이뇨 지혈 종기에 응용함

 범부채 ( - ) 사간 射干

Belamcanda chinensis (Linne) Leman

소염, , , 진해 편도선염 진통제로 씀

 벚나무 ( - ) 산앵 山櫻

Prunus Serrulata var. spontaned Wilson

열매를 건위 강장에 , 쓰며 껍질은 고혈압을

다스리는데 씀

 변두콩 ( - . ) 백편두 白扁豆 일명 제비콩

Dolichos lablab Linne

곽란, ( ), 토리 吐利 술독을 푸는데 씀

 별꽃 ( - ) 번루 蘩蔞

Stellaria medica (Linne) Cyrillos

피임약으로 응용함

 병풍나물 ( - ) 방풍 防風

Siler divaricatum Bentham et Hooker

풍기를 다스리는 선약( ) 仙藥

 보리 ( - ) 맥아 麥芽

Hordeum sativum

보리밥은 각기 당뇨 , 치료에 효험이 있고 엿기름은

최생( ), 催生 낙태에 씀

 보리수나무 ( - ) 우내자 牛奶子

Elaeagnus crispa Thunberg

지혈 설사를 , 멈추게 하는데 씀

 복령 ( ) 茯笭

Poriacocos wolff Cpachyma hoelen Rumphius

백 적복령과 , . ( ), , , 복신이 있다 수종 붓는 병 임질 이뇨

해열, , 건위 안태에 씀

 복분자딸기 ( - ) 복분자 覆盆子

Rubus. coreanus Miquel

청량, , 갈증 자양강장제로 씀

 복수초 ( ) 福壽草

Adonis amurensis Regel et Radde ex Regel var.

parviflora Nakai

종창, , , 진통 이뇨 강심제로 응용함

 복숭아 ( - ) 도인 桃仁

Prunus persica Botseh

이뇨, , , , 두통 곽란 진해 월경불순에 응용함

 봉선화 ( ) 鳳仙花

Impatien balsamina Linne

고기류에 의한 식중독 등창의 , . 종기 치료제 극성약임

 뽕 ( - ) 상근백피 桑根白皮

Morus bombycis Koidzumi

한방에서는 이수 진해에 , 응용하고 민간 요법으로는 여러

병을 다스리는데 쓰이며 잎이 고혈압 치료의 명약임

216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부들꽃 ( - . ) 포황 일명 蒲黃 좀부들

Typha orientalis Presi

지혈, , 파열 이뇨제로 씀

 부추 ( - . ) 비 菲 일명 솔

Allium odorum Linne

잎은 반위 토혈 코피 ( ), , 反胃 흘리는데 쓰고 씨는

음위 유정 유뇨증 을 , ( ), ( ) 遺精 遺尿症 치료하는데 씀

 분꽃 ( - ) 백분초 白粉草

Mirabilis japonica Linne

절상( ), 折傷 버짐에 씀

 분디나무 ( - . ) 천초 일명 川椒 조피나무

Fagara schlnifolia var. Microphilla

해독, , 진통 구충제로 씀

 붉나무 ( - ) 오배자 五倍子

Rhus javanica Linne

출혈 해독 설사를 , , 하게 하는데 응용함

 붉은가시딸기

Rubus phoenicolasius Maximowicz

강장, , ( ), ( ) 지사 태생 胎生 명안 明眼 에 씀

 비름 ( - ) 야현 野莧

Amaranthus mangostanus Linne

안질 종창 , 치료제로 씀

 비자 ( ) 榧子

Torreya nucifera Sieb & Zuce

구충, , 건위 장출혈에 씀

 사리풀 ( - . ) 낭탕자 莨宕子 초우웡

Hyoscyamus niger Linne

발광 신경의 , , . 여러 병 나력을 치료하는데 씀 아주

독성이 강함

 사상자 ( . ) 蛇床子 일명 뱀도랏

Torilis japonica (Houttuyn) DC

음위, , ( ), 부인음종 악창 惡瘡 치통에 씀

 사위질빵 ( - ) 여위 女萎

Clematis apiifolia DC

천식 각기 발한 , , , ( ) 절상 풍질 風疾 에 씀

 사철나무 ( - ) 왜사중 倭社仲

Eupnymus japonica Thunberg

진통, , , 자궁출혈 강장 통경제로 응용함

 사철쑥 ( . ) 茵蔯蒿 일명 애탕쑥

Artemisia capillaris Thunberg

황달, , , 해열 더위풀이 잇몸느리 치료에 씀

 산검양옻나무 ( - ) 야칠 野漆

Rhus solvestris Siebold & Zuccarini

소염( ), , , 消炎 건위 당뇨 관절염 치료에 씀

 산달래 ( - ) 산산 山蒜

Allium grayi Regel

보혈 장염 위암 불면증에 , , , 전초를 달여 복용하고

타박상 벌레 , 물린데에 비늘 줄기를 찧어 싸맴

 산딸기나무 ( - ) 산매 山莓

Rubus crataegifolius Bunge

강장, , , 지사 태생 명안 등에 씀

 산들깨

Orthodon japonicum Bentham ex Oliver

고혈압 종기 , 등에 씀

 산박하 ( ) 깻잎나물

Amethystanthus inflexus (Vahl) Nakai

건위, 구충제로 씀

 산밤나무 ( - ) 산율 山栗

Castanea crenata S. et Z. var. kusakuri Nakai

건위 하혈 독종 신장을 , , ( ), 毒腫 강하게 하는데 응용함

 산뽕나무 ( - ) 산상 山桑

Morus bombycis Koidzumi

이뇨, , , , , , 각기 폐염 중풍 벌레의 독 제거 감기

고혈압 발한 , 등에 쓰이고 재배하는 뽕보다 약효가

좋음

 산부추 ( - ) 산비 山菲

Allium japonica Regel

구충, , , , , , , 이뇨 강장 해독 건위 풍습 진통 강심 등에

전초를 씀

 산수국 ( ) 山水菊

Hydrangea serrata var. acuminata Nakai

학질, 해열제로 씀

제5장 _ 식물 217

 산수유( ) 山茱萸

Cornus officinallis Sieb et Zucc

강장제 귀가 , , . 울리는 증세 코막힘을 치료함 극히

일부에서 심고 있음

 산앵도 ( - ) 도이 都李

Frunus padus Linne

이뇨, , , 통격 구충 진통의 효과가 있음

 산자고 일명 ( . . ) 山慈姑 까치무릇 얼레지

Amana edulis Honda

등창 여러 , , 종기와 부스럼 폐결핵 치료제로 씀

 산초나무 ( - ) 산초 山椒

Zanthoxylum schinifolium S et Z

해충구제 해독 살충제로 , , 쓰고 있고 기름은 전에

기계독을 치료하는데 응용하였음

 산해박 ( - ) 백미 白薇

pycnostelma paniculatum (Bunge) Kitagawa,

Schumann

부종, , , ( ), 해열 중풍 익정 益精 이뇨에 씀

 살구 ( - ) 행인 杏仁

Frunus ansu Komaror

천식 해수 신체부종 개고기 , , , . 중독에 씀 씨에 독성이

있음

 살비아

Salvia officinalis Linne

수렴약, 인후염 등에 씀

 삼 ( - ) 마인 麻仁

Cannabis sativus Linne

씨를 변비, , , . 난산 공수병 월경과다에 씀 자연산은

극히 귀함

 삼지구엽초( . - ) 三枝九葉草 음양곽 淫羊藿

Erimedium koreanum Nakai

이소변 근골을 ( ), , 利小便 강하게 함 양기 부족증을

치료하는 명약으로 알려 오고 있음. 함평군에서는

불갑산에만 자생하고 있음

 삽주 ( - . - ) 창출 蒼朮 백출 白朮

Atractyloides japonica Koidz

이수 해열 건위 , , 당뇨에 씀

 상사화 ( ) 相思花

Lycoris squamigera Maximowicz

창 화상 ( ), 瘡 등에 씀

 상산 ( ) 常山

Orixa japonica Thunberg

거담, , , 해수 학질 해열에 씀

 상수리나무 ( - ) 역연 櫟椽

Quercus acutissima Carruthens

수렴, , 강장 종독에 응용함

 새머루 ( - ) 조포자 鳥胞子

Vitis. flexuosa Thunberg

해독, , , , , , 중독 보혈 젖앓이 안질 폐질환

이뇨 두통 , 등에 효과가 있음

 새삼

Cuscuta japonica Choisy

강장, 수렴약으로 씀

 새양 ( - ) 생강 生薑

Zingiber dfficnale Rosocoe

구충, , , , 소화 건위 기침 타박상의 어혈을

푸는데 씀

 생강나무 ( - ) 단향매 檀香梅

Lindrera obtusiloba Blume

해열, , 강심 건위제로 씀

 서향 ( - ) 서향 瑞香

Daphne odora Thunberg

종기 창의 , ( ) . 발포약 으로 發泡藥 응용함 재배함

 석곡( ) 石斛

Dendrobium monile Thunberg

보위 강정 식은 , , . 땀을 잡히게 하는데 씀 재배하고

있음

 석장풀

Stachys riederi var. japonica Hara

해열, , , , , , , , 해수 폐염 하혈 진통 복통 정혈 맹장염

태독 등에 씀

218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석류 ( ) 石榴

Punica granatum Linne

촌충구제, , 수렴제 곽란 등에 씀

 석창포 ( ) 石菖蒲

Acorus gramineus Solander

신경 안정 부스럼등 , 피부 질환을 치료하는 명약

 선괭이밥풀

Xanthoxalis corniculata (Linne) Small f. erecta

(Makino)

피부병, , , ( ) 소화 해독 충독 虫毒 을 치료 하는데 씀

 선씀바퀴

Ixeris chinensis Nakai subsp strigoba Kitamura

진정, ( ), 최면 催眠 건위에 쓰임

 소나무 ( - . - ) 송지 松脂 송엽 松葉

Pinus densitlora Siebold & Zuccarini

거담, 강장제로 쓰임

 소철 ( ) 蘇鐵

Cycas Revoluta

폐질환, , , 천식 해수 소아경기 등을 치료함

 소태나무 ( - ) 고목 苦木

Pierasama quassioides Benneft

건위, , ( ), , 구충 고미 苦味 살충 학질 치료

 속썩은풀 ( - ) 황금 黃芩

Scutellaria baicalensis George

거담, , , , 이수 당뇨 임질 해열에 씀

 솜대 ( - ) 담죽엽 淡竹葉

Smilacina japonica A. Gray

이뇨, , , ( ) 해열 지혈 치풍 治風 에 씀

 송이풀

Pedicularis respinata Linne

종기, 피부병에 씀

 쇠뜨기 ( - ) 문형 問荊

Equisetum arvense Linne var. boreale(Bongars)

Ruprecht

자궁출혈, , , 하리 탈항 임질에 씀

 쇠무릎 ( - ) 우슬 牛膝

Achyranthes japonica (Miquel) Nakai

뿌리를 골절의 아픔 임질 부인 , , 통경에 씀

 쇠비름 ( - ) 마치현 馬齒莧

Portulaca oleracea Linne

임질, , , , 부인냉증 요통 습진 무좀 치료에 씀

 수국 ( . - . 水菊 수구화 水毬花

자양화- ) 紫陽花

Hydrangea masrophylla Seringe

해열 창 의 , ( ) 瘡 특효약

 수리딸기 ( - ) 산매 山莓

Rubus corchcrifolius Linne

명안, , , ( ), 설사 강장 양모 養毛 음위증에 씀

 수박 ( - ) 서과 西瓜

Citrullus vulgaris Schrad

이뇨, 건위제로 씀

 수선 ( ) 水仙

Narcissus tazetta Linne var. chinensis Roemer

종기 젖앓이에 밖에 바름

 수세미외 ( - ) 사과 絲瓜

Luffa cyindrica Roemer

열매와 액즙을 두창, , , , 건위 이뇨 치통 해수 등에

응용함

 수영 ( - ) 산모 酸模

Rumex acetosa Linne

통경, 피부병에 씀

 순채 ( ) 蓴菜

Brasenia schreberi J. E Gmelin

종기 부스럼에 , . 쓴다 월야면 순촌 마을에서 다량

생산하였고 진상품의 하나였음

 술패랭이꽃 ( - ) 석죽 石竹

Dianthus superbus Linne var. longicalycina

Maximowicz

이뇨, , , , 안질 늑막염 치칠 소염에 씀

제5장 _ 식물 219

 숫명다래나무 ( - ) 고려표단목 高麗瓢簞木

Lonicera. coreana Nakai

이뇨, , , , , 해독 종기 부종 지혈 정혈 감기 등을

치료하는데 씀

 승엄초 ( - . ) 당귀 일명 當歸 신감채

Angelica gigas Nakai

진정 통경 청량에 , , . 응용함 재배를 많이 함

 씀바퀴 ( - . , 고채 속명 苦菜 씹배나물

싸랑부리)

Ixeris dentata (Thunberg) Nakai

전초를 건위제로 씀

 시무나무

Hemipteleia davidii Planchon

부종, , , 이뇨 통경 안태에 응용함

 시호 ( - ) 시호 柴胡

Bupleurum falcatum Linne

해열, ( ), ( ), , , 오한 惡寒 조막염 助膜炎 진통 해수 기침에

씀 재배를 . 많이 함

 실새삼 ( ) 免絲子

Cuscuta chinensis Lamarck

정한( ), , ( ), ( ) 精寒 임질 명목 明目 거풍 祛風 등에 씀

 싱아 ( ) 일명 숭애

pleuropteropyrum polymorphum nakai

해열, 변비에 씀

 아그배나무 ( - ) 당이 棠梨

Malus sieboldii (Regel) Rehder

열매를 해열제로 씀

 아욱 ( - ) 동규자 冬葵子

Malva olitoria

씨를 이뇨, , ( ), , 급체 적리 赤痢 타박상 임부의 부종을

다스리는데 씀

 아주까리 ( - ) 피마자 萆麻子

Ricinus conmunis Linne

설사, , , , . 신경통 류머티스 피부병 각기에 응용함 극히

귀해졌음

 알로에 ( - . ) 노회 蘆薈 소코트린 알로에

Aloe perryi Baker (Socotrine aloe)

건위, , 강장 소화약으로 응용함

 애기똥풀 ( - ) 백굴채 白屈菜

Chelldonium sinense DC

황달 간장병 위궤양 종기 , , , 등을 치료하는데 씀

 약쑥 애엽 일명 ( - . . ) 艾葉 사재발쑥 다북쑥

Artemisia asiatica Nakai

지혈, , , , , 통경 곽란 살충 치질 자궁냉증에 응용함

 양배추 ( - ) 감람 甘藍

Brassica oleracca var. Capitata

당뇨 위궤양 , 등에 즙액을 복용함

 양파 ( - ) 옥총 玉葱

Allium cepa

고혈압 동맥경화에 , 껍질을 달여 복용하며 신장병에도

응용함

 엄나무 ( - ) 해동피 海桐皮

Kalopanax pictum var. typicum Nakai

진통제로 씀

 엉겅퀴( - . ) 대계 大薊 일명 항갈퀴

Cirsium maackii Maximowicz var. koreana Nakai

지혈의 명약. , . 이뇨 해독 수종에 씀

 여뀌 ( - ) 대료 大蓼

Persicaria Hydropiper(Linne) Spach var.

vulgaris(Meissner) Nakai

발포약( ), ( ), 發泡藥 살충제 며루 독성이 있으며 씹으면

이가 전부 빠짐

 여로 ( - ) 산로 蒜蘆

Veratrum japonicum Loesner fil

강심, , , , , , 감기 중독 임질 독사의 독 제거 곽란

피오줌, , 고혈압 중풍 등에 씀

 여우콩

Rhynchosia volubillis Loureiro var. typica

Maximowicz

기관지염, , , 폐염 천식 거담제로 씀

220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연 ( - . - ) 하엽 荷葉 연자육 蓮子肉

Nelumbo nucifera var. macrorhizomata Nakai

자양강장, , , 지혈 해독 이뇨 등에 씀

 영생이 ( - ) 박하 薄荷

Mentha sacharinensis (Briquet) Kudo

발한, ( ), , 구풍 颶風 건위 통경약으로 씀

 오갈피나무 ( - ) 오가피 五加皮

Acanthopanax sessiliflorus (Rupr et Max)

Seemenn

뿌리의 껍질을 강장, ( ), , 산기 疝氣 당뇨 복통에 응용함

 오리나무 ( - ) 적양 赤楊

Alnus japonica Steudel

강장제로 씀

 오미자 ( ) 五味子

Schisandra chinesis Baillon

열매를 강장, , , ( ) 자양 거담 보음 補陰 에 씀

 오수유 ( ) 吳茱萸

Evodia officinalis Dode

간 계통 질환, , , , 복통 구역 설사 치질 등에 응용함

 오얏 ( - ) 도이인 都李仁

Prunus salicina Lindely

수종 장염 , 등에 응용함

 오이풀 ( - ) 지유 地楡

Sanguissorba officinalis Linne

토혈, , , , , 하혈 이질 월경과다 절상 타박상에 씀

 옥수수 ( - . ) 옥촉서 玉蜀黍 강냉이

Zea mays Linne

수염을 신장질환 부종성 , 질환을 다스리는데 씀

 올괴불나무

Lonicera. praeflorens Batalin

해열, , , , 해독 이뇨 지혈 종기에 씀

 올방개 ( - . . ) 발제 葧臍 올메 올리장매

Eleocharis Kuroguwai Ohwi

황달, , ( ) 당뇨 명목 明目 에 응용함

 옻나무 ( - ) 건칠 乾漆

Rhus vernicflua Stokes

가지의 액즙을 통경회충 구제, ( ) 후비 喉痺 에 씀

 왕대 ( - ) 고죽 苦竹

Phyllostachys bambusoides S. et Z

구토 술의 , , , , 독 각혈 발한 중풍 등에 응용함

 왕머루

Vitis amurensis Ruprecht

식욕부진, ( ), , 금창 金瘡 종창 허약증에 씀

 왕버들

Salix glandulosa var. glabra Nakai

이뇨, , , , 종기 황달 해열 지혈제로 씀

 용담 ( ) 龍膽

Gentiana scabra Runbe var. buergeri (Miquel)

Maximowicz

건위, , ( ) 소화불양 이담 利膽 에 씀

 용둥굴레

Polygonoatum involucratum Maximowicz

폐염, , , , 강심 강장 풍습 당뇨에 씀

 우엉 ( - . - ) 우방근 牛蒡根 악실 惡實

Arctium lappa Linne

이뇨, . , , 각기병 강정 두드러기 해열 등에 응용함

 원지 ( ) 遠志

Polygala japonica Willdenow

강장, , 거담 이뇨제로 씀

 율무 ( - ) 의이인 薏苡仁

Coix agrestis Loureiro

이뇨, , , , 진해 건위 진정 폐병 등에 쓰임

 으름덩굴 ( - ) 목통 木通

Akebia quinata Decaine

이뇨, 소염제로 쓰임

 은방울꽃 ( - ) 영란 鈴蘭

Convallaria keiskei Miquel

강심, 이뇨제로 쓰임

제5장 _ 식물 221

 은행 ( - ) 백과 白果

Ginkgo biloba L.

열매는 해독 진해 거담 , , , 등에 쓰이고 잎은 살충

고혈압 등 많은 약의 원료로 쓰임 함평산 . 은행잎이

약효는 물론 성분에서 우월하다.

 이질풀( - ) 방우아 牻牛兒

Geranium thunbergii Siebdld & Zuccarini var.

roseum Nakai

이질의 명약. , , 출혈증 방광염 지사제로 쓰임

 익모초 ( . ) 益母草 암눈바앗

Danium sibiricus Linne

잎과 줄기는 식욕부진에 쓰고 씨는 산후 지혈, , 해독

건위제로 씀

 인동 ( - ) 금은화 金銀花

Lonicera japonica Thunb

각종 종기 및 부스럼에 씀

 인삼 ( ) 人蔘

Panax schihschg Nees

더위먹이, , . 기력쇠약 강정강장에 많이 씀 함평에도

재배지가 늘고 있음

 잇꽃 ( - ) 홍화 紅花

Carthamus tinctorius Linne

종기 토혈 편도선염 , , . 등에 씀 관상용으로 재배함

 자귀나무 ( - ) 합환피 合歡皮

Albizzia koreans Nakai

진해 진통 골절의 , , , 접골 새 살이 차오르게 하는데

 자래나무 ( - ) 수서리 藪鼠李

Rhamnella. schneideri Leveille &

Vaniot

오한, , , , 부종 하혈 부스럼 버짐 등에 활용함

 자리공 ( - . ) 상륙 商陸 물나무

Phytolacca esculenta var. Houttyn

몸이 부은데, , . 신경통 신장병에 응용함 약간의

독성이 있음

 자원 ( . ) 紫苑 개미취

Aster tataricus Linne var. Nakai Kitamura

해수를 치료하는데 씀

 자주쓴풀 ( - . - ) 당약 當藥 천진 千振

Swertia chinensis (Bunge) Franchet

건위 태산불알 , , ( ), 통증 태독 胎毒 이질 등에 씀

 작약 ( , - , ) 적 백작약 赤 白灼藥

Paeonia albiflora Pallas var. trichocarpa Bunge

복통, , , , . 치질 진경 진통 통경제로 응용함 산작약도

있으나 주로 재배함

 잔대

Adenophora triphylla A. DC var. tetraphylla

Makno

한열 에 ( ) 寒熱 응용함

 잣나무 ( - ) 백 柏

Pinus koraiensis Siebold et Zuccarini

자양강장 굶주림을 , , 이김 암 등에 응용

 장구채풀 ( - ) 왕불유행 王不留行

Melandryum firmum Rohrbach

해열 악화된 , , , , , , , 부스럼 귓병 임질 이질 정혈 지혈

젖이 나오게 하는데 씀

 절구대( - . . ) 누로 漏蘆 둥둥방망이 개수리취

Echinops setifer Hzin

해독, , ( ), , , , 통경 하유 下乳 지혈 생살 돋는데 살충

뇨혈( ) 尿血 등에 씀

 절국대 ( - ) 음행송 陰行松

Siphonostegia chinensis Bentham et Hooker &

Arnott

황달, ( ), , , , , , 배농 排膿 간염 월경조정 임질 폐염 치혈

고혈압 등에 씀

 접골목 ( . , 接骨木 일명 말오줌나무

자반나물)

Sambucus latipnna Nakai

발한, , 타박상 무좀 치료에 씀

 접시꽃 ( - ) 촉규화 蜀葵花

Athaca rosea Cavanilles

산기 임질 이질에 ( ). , 疝氣 뿌리를 쓰고 적백대하증에

꽃을 응용함

 정가 ( - ) 형개 荊芥

Nepeta japonica

풍병 부스럼 산전 , , 산후약으로 씀

222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정금나무

Vaccinium oldhami Miquel

수렴제, , , , , , , 신우염 이뇨 구토 건위 하리 발진

방광염에 씀

 제비꽃 ( - ) 자화지 紫花地

Viola mandshurica W. Becker var. ciliata Nakai

태독, , , , , 해독 부인병 정혈 발한 설사 등을

치료하는데 씀

 제비쑥 ( - ) 모호 牡蒿

Arteminia japonica Thunberg

건위제로 쓴다.

 조팝나무 ( - ) 유포공영 柳蒲公英

Spiraea prunifolia var. simuliciflora Nakai

거담, , 이뇨 건위제로 씀

 족도리풀 ( - ) 세신 細辛

Asiasarum heterotropoides var. seoulense

(Nakai) F, Maekawa

해수 여러 , , , , 가지 풍 두통 발한 귀가 울 때 씀

 졸참나무 ( - . ) 포유 일명 枹楢 떡졸참나무

Quercus serrata Thunberg

수렴 강장 종기 , , 치료에 씀

 좀피나무 ( - ) 진초 秦椒

Q. serrata Thunberg

이뇨 복통 황달 뱀의 , , , , 독 중풍을 다스리는데 씀

 주엽나무 ( - ) 흡협 皀莢

Gleditsia japonica Miquel var. koraiensis Nakai

나력 버짐 , 등을 치료하는데 씀

 쥐꼬리망초 ( - ) 진봉 秦芃

Justicia procumbens Linne

치질, , , , 폐결핵 진통 진정 풍습에 씀

 쥐다래 ( - ) 목천료 木天蓼

Actinidia kolomikta Maximowicz

산기( ), , 疝氣 요통 이뇨제로 씀

 쥐똥나무 ( - ) 동청 冬靑

Ligustrum ibota Sieb et Zuce var. angustifolium

건위 강장 나무 , . ( ) 생김새가 여정실 과 女貞實 같으며

약효 또한 거의 같음

 쥐방울 ( - ) 마두령 馬兜鈴

Aristolochia contorta Bunge

거담 폐의 , 여러 가지 질환을 다스림

 쥐오줌풀 ( - . ) 길초근 吉草根 은댕가리

Valeriana dagoletiana Nakai et Maekawa

진정제로 씀

 지기다리스

Digitalis purpurea Linne

강심 이뇨제로 , . 씀 꽃을 보기 위해 정원에 심고 있음

 지모 ( ) 知母

Anemarrhena asphodeloides Bunge

해열제로 쓴다. 재배함

 지치 ( - ) 자초 紫草

Lithospermum erythrohizon Siebold et Zuccarini

절상, , 화상 피부병의 요약

 지칭개 ( - . - ) 야고마 野苦麻 니호채 泥胡菜

Hemistepta lyrata Bunge

건위, , 보익 이뇨제로 씀

 지황 ( ) 地黃

Rehmannia glutinoa (Gaertner) Liboschitz et

Fischer & Meyer

보혈, , , 강장 통경 수렴제로 씀

 진달래 ( - ) 백척촉 白躑躅

Rhodo dendron mucronulatum Turcz

살충, , 진통 신경통 치료에 씀

 진득찰 ( - ) 희렴 狶薟

Siegebeckia glabrescens makino

풍습 중풍 종기 피를 , , , 맑게 하는데 씀

 진황정 ( - . ) 황정 일명 黃精 대잎둥굴레

polygonatum falcatum A. Gray

자양강장, , , ( ) 해열 병후허약 구황 救荒 등에 씀

 질경이 ( - ) 차전자 車前子

plantago asiatica Decaisne

이뇨, , , 진해 지혈 소염에 씀

제5장 _ 식물 223

 짚신나물 ( - ) 용아초 龍牙草

Agrimonia pilosa var. japonica Nakai

지혈, , ( ) 구충 하리 下痢 에 씀

 찔레나무 ( - ) 영실 營實

Rosa multiflora Thunberg

설사, ( ), , , 이수 利水 관절염 복통 강장제로 씀

 차나무 ( - ) 다 茶

Thea sinensis Linne

이뇨 부종 강심 장 을 , , , ( ) 腸 튼튼히 하는데 씀

 차조기 ( - . - ) 소엽 蘇葉 자소 紫蘇

Perilla sikokiana Nakai

발한, , , , , 해열 진해 이뇨 어패류 중독 거담제로 씀

 차풀 ( - ) 산편두 山扁豆

Cassia nomame (Siebold) & Honda

잎과 씨를 위약증, , , 각기 수종 소화불량 치료에 씀

 참나무 ( - ) 토골피 土骨皮

Quercus acutissma Carruthers

태산불알, , 이질 수렴제로 씀

 참개암나무

Corylus siebodiana Blume

보익, 강장제로 씀

 참깨 ( - ) 호마 胡麻

Sesamum indicum Linne

강장, ( ), 점골 粘骨 해독제로 씀

 참나리 ( - ) 백합 百合

Lilium lancifolium Thunberg

자양강장, 진해제로 씀

 참나물 ( - ) 자근 紫芹

Cryptotaenia japonica Hasskarl

지혈, ( ), , , , 양정 陽精 해열 중풍 폐염 신경통에 씀

 참두릅나무

Aralia elata Seemenn

해열, , , 강장 거담 당뇨 치료에 씀

 참소리쟁이 ( - ) 양제 羊蹄

Rumex japonicus Houttuyn

버짐 종기의 , , 상처 설사를 하게 하는데 씀

 참억새

Miscanthus sinensis Andersson

지갈, 이뇨제로 씀

 참외 ( - ) 과채 瓜菜

Cncumis melon

꼭지를 황달 부종 담에 , , . 응용함 극성약임

 참으아리 ( - ) 위령선 葳靈仙

Clematis Maximowicziana var. paniculata Nakai

무릎 허리의 통증, , , 천식 악종 각기병에 씀

 참죽나무 ( - . ) 춘근피 椿根皮 일명 쭉나무

Cedrela sinensis Jussieu

뿌리의 껍질을 출혈 및 하리에 씀

 창포( ) 菖蒲

Acorus asiaticus Nakai

신경 안정 부스럼 , . 등에 씀 단오절에 부녀들이 창포

끓인 물에 머리를 감음

 천남성 ( ) 天南星

Arisaema amurense Maximowlcz var. serratum

Nakai

해수, , , , , . 거담 파상풍 구토 발한 건위제로 씀 독성이

강함

 청갈참나무

Quercus aliena Blume

강장 수렴 종기의 , , 독을 제거하는데 씀

 청미래덩굴 ( - . 토복령 土茯笭

산귀래 일명 - . ) 山歸來 명감덩굴

Smilax china Linne

뿌리를 류마티슴 이앓이 설사 , , 등을 치료하는데 씀

 초결명 ( - ) 결명자 決明子

Cassia tora Linne

간장질환, , , 류마티슴 천식 눈병약으로 씀

 측백나무 ( - ) 백자인 柏子仁

Thuja orientalis Linne

자양강장, , , 진해 거담 피의 질환에 응용함

22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층층이꽃

Clinopodium chinence O. Kuntze var. parviflorum

Hara

치통, , , 위장염 중풍 신장염에 씀

 치자나무 ( - ) 치자 梔子

Gardenia jasminoides Ellis

혈증( ), , , , , 血症 해열 황달 임질 화상 불면증에 씀

 칡 ( - ) 갈근 葛根

Pueraia thunbergii Bentham

해열, , , , 발한 강장 해독 완화제로 씀

 침향 ( ) 沈香

Aguilaria agallocha

곽란 심복통 적취 등에 , , ( ) . 積聚 쓰임 손불면 산남리

질흙 층에서 나옴

 큰괭이밥풀

Oxalis obtriangulata Maximowicz

피부병, , , 소화 해독 독충의 독 제거에 씀

 큰조롱 ( - . ) 하수오 何首烏 일명 새박풀

Cynanchum wilfordii Maximowicz & Hemsley

자양강장, ( ) 골연풍 骨軟風 에 씀

 키버들나무 ( - ) 행이류 行李柳

Salix koriyanagi Kimura

수렴, , , , 치통 이뇨 지혈 종기에 응용함

 탑꽃

Catureia. multicaulis (Maximowlcz) Nakai

치통, , , 위장염 중풍 신장염 등에 씀

 택사 ( ) 澤瀉

Alisma canaliculatum A. Braun et Bonche

소갈 구토 각기 뇨혈 등에 , , , ( ) . 尿血 씀 재배하고 있음

 탱자나무 ( - . - ) 지실 枳實 지각 枳殼

Poncirus trifoliata Rafinesque

거담, , , 이뇨 발한 소화약으로 씀

 털단풍나무 ( - ) 모단풍 毛丹楓

Acer pseudo siebolianum var. lanuginosum

Nakai

수액을 하리에 씀

 털제비꽃

Viola. phalacrocarpa Maximowicz

해독, , , ( ), 태독 중풍 강간 强肝 보익제로 씀

 토란 ( - ) 토란 土卵

Colcasia antiquorum var. esculentum

동상, , , ( ) . 폐염 소화 보폐 補肺 에 씀 재재함

 토목향 ( . ) 土木香 일명 황화채

Inula helenium Linne

뿌리를 건위, , . 방부제 구충제로 응용 재배함

 투구꽃

Aconitum jaluense Komarov

강심, , , , . 이뇨 관절염 신경통 중풍에 씀 독성이 있음

 파 ( - ) 총 葱

Allium fistulosum

세계에 30 . , , 여종이 있다 적백리 유행성감기

태동( ), , , ( ) 胎動 각기 절상 요혈 尿血 등에 쓰며 파의

껍질은 저혈압의 명약으로 전해옴

 파초 ( ) 芭蕉

Musa basjoo seibet Zucc

각기병, , , , 수종 해열 이뇨 황달에 씀

 팥배나무 ( - ) 두이 豆梨

Sorbus alnifolia (S. et Z.) Koch

해열, , , 곽란 토사 버짐에 씀

 패랭이꽃 ( - . - ) 구맥자 瞿麥子 석죽 石竹

Dianthus chinensis Linne

씨를 수종, , 임질 통경약으로 씀

 팽나무 ( - ) 박수 朴樹

Celtis sinensis Pers

대하증, , , , , 불면증 부종 결핵 이뇨 화상에 응용함

 패모 ( - ) 패모 貝母

Fritillaria ussuriensis Max

거담, , , , ( ), . 허로 해수 토설 폐위 肺痿 후비 등에 씀

재배함

 편백 ( ) 扁柏

Chamaecyparis obtusa S et Z Endlicher

화상, , , 곽란 간질 동상에 씀

제5장 _ 식물 225

 평지 ( - . - ) 운대 蕓薹 유채 油菜

Brassica campestris subsp napus var.

nippooleifera Makino

산후병을 다스림. 재배함

 포도 ( ) 葡萄

Vitis vinifera Linne

하복충혈증( ), , 下腹充血症 간장질환 암 예방제로 씀

 풀솜나물 ( - ) 천청지백 天靑地白

Gnaphalium japonicum Thunberg

건위, , . 지혈 이질 거담에 응용함

 피나무 ( - ) 모피목 毛皮木

Tilia amurensis var, Barbigera

이뇨. ( ), 진경 鎭痙 발한제로 씀

 피막이풀

Hydrocotyle sibthorpioides Lemarck

지혈, , 해독 구토에 씀

 하고초 ( . ) 夏枯草 속명 제비꿀

Thesium chinense Turczaninow

줄기와 잎을 나력, , , 자궁병 월경불순 눈병 치료에 씀

 하국 ( - . - . 선복화 旋覆花 금불초 金佛草

들국화. ) 옷풀

Inula japonica Thunberg

건위, , 거담 치질 등에 씀

 하늘말나리

Lilium miquelianum Makino

종기, ( ), , , , . 동통 疼痛 토혈 유방염 백일해 폐염

신경쇠약, 각혈에 씀

 하늘타리 ( - ) 괄루 括蔞

Trichosanthes kirrilowi Maximowicz

거담, , , , , , 진정 황달 당뇨 변비 강장 땀띠 제거에 씀

 할미꽃 ( - ) 백두옹 白頭翁

Pulsatilla koreana (Yabe) Nakai et Mori

지혈, , ( ), 월경폐지 열성하리 熱性下痢 치질에 씀

 향나무 ( - ) 회 檜

Juniperus chinensis Linne

이뇨, , 통경 살충에 응용함

 향유 ( ) 香薷

Elscholtzia patrini (Lebeckin) Garcke

발한, , 이뇨 수종에 씀

 헛개나무

Hovenia dulcis var. koreana Nakai

과실을 달여 복용하면 주독이 풀림

 현삼 ( ) 玄蔘

Scrophularia buergeliana Miquel

종기, , , 나력 폐결핵 인후병에 씀

 현호색 ( . - ) 玄胡索 연호색 延胡索

Corydalis Turtschaninovii Besser var. genuina

(Maximowicz) Nakai

어혈을 푸는 요약 자궁의 , . 여러 병에 씀 재배함

 협죽도 ( ) 夾竹桃

Nerium odrum Solander

잎 나무껍질을 , . 강심약으로 응용함 독성이 있음

 호도 ( ) 胡桃

Jugians sinensis Dode

자양강장, , 천식 심복통에 씀

 호라지좆 ( - ) 천문동 天門冬

Asparagus lucidus Lindley

거담 이뇨 강장 각혈 , , , . , 등에 씀 군유산 모악산에

많이 자생함

 호박 ( - ) 남과 南瓜

Cucurbita moschata var. Toonas

구충, ( ), , , 통기 通氣 강정 천식 이뇨제로 씀

 호장근 ( . ) 虎杖根 일명 감제풀

Reynotria japonica Houttyn

통월수( ), ( ), 通月水 지갈 止渴 해열 등에 씀

 홍괴불나무

Lonicera vidalii Frnchet & Savatier

해열, , . , 해독 이뇨 지혈 종기 다스리는데 씀

 화살나무 ( - ) 귀전 鬼剪

Euonymus alatus Thunberg et Siebold

최유 복통 자궁출혈 , , 등 부인병에 씀

226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환삼덩굴 ( - . ) 율초 일명 葎草 범상덩굴

Humulus japonicus Siebold et Zuccarini

위암 등 위질환의 명약

 황경피나무 ( - 황백 黃柏

Phellodendron amurens

e Ruprecht

속 껍질을 건위, , 강장 소염약으로 씀

 황촉규 ( . ) 黃蜀葵 일명 닥풀

Abelmoschus manihot Medikus

내장의 염증 약, ( ) 제조의 부형약 賦形藥 으로 씀

 황기 ( - . ) 황기 일명 黃耆 단너삼

Astragalus membranaecus Bunge

강장 부스럼 폐결핵 , , . 등에 쓰임 재배하고 있음

 회회산 ( . ) 回回蒜 일명 젓가락나물

Ranunculus chinensis Bunge

즙액을 발로약으로 씀. 독성이 있음

 회향 ( ) 茴香

Poeniculum vuigare Gaertnet

흥분 구풍약 으로 , ( ) . 颶風藥 씀 재배를 하고 있음

 회화나무 ( - ) 괴각자 槐角子

Styphnolobium japonicum Schott

지혈, , , 치질 이질 혈압 강하제로 씀

 후박나무 ( ) 厚朴

Machilus thunbergii Siebold et Zuccarini

위한( ), , , , 胃寒 구토 곽란 복통 설사 등에 씀

 흰독말풀

Datura alba Neesc

천식 신경통 매독 암종 , , , . 등에 씀 독이 아주 강함

 흰제비꽃

Viola prinulifolia Linne var. glabra Nakai

해독, , , , ( ) 태독 중풍 설사 강간제 强肝劑 로 씀


제 절2 멸종 위기 및 희귀식물

1. 고본 < . Angelica tenuissima Nakai. > 藁本 산형과

우리나라 각처에 분포하는 식물로 산록의 습기가 많은 곳에 자생하는데 향기가 좋아 뜯어서

떡을 해먹고 약용으로 쓰는 등 남획을 하여 근래에 그 수가 줄어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8 9 30 60 . ∼ 월에 꽃이 피고 색은 희며 줄기는 ∼ ㎝에 이르는 여러 해 살이 풀이다

2. 깽깽이풀 < - . Plagiorhegma dubium Maximowicz. > 조황연 朝黃連 매자나무과

산록에 자생하는 풀로 군유산 등에서 볼 수 있으나 채약자들의 마구잡이 채취로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여러 해 살이 풀로 잎은 둥글며 크기는 지름이 5 10 ∼ ㎝ 가량이며 끝 부분이 오목하게 들어

간 예쁜 풀이다.

4 5 . ∼ 월에 꽃이 피는 약용식물로 전국적으로도 멸종의 위기에 놓인 품종이다

3. 꽃무릇 < - . Lycoris radiata Linne Heric Herb. > 상사화 相思花 수선화과

가을에 꽃이 진 후 돋아난 잎은 여름이면 말라 죽고 꽃대가 나와 9~10월에 피빛 같이 붉은

국수발 모양의 꽃을 피운다.

잎과 꽃이 서로 엇갈려 피기 때문에 상사화라 한다.

이 꽃은 우리나라 남쪽의 한정된 습한 지대에 자생하는데 백양사, , 송광사 불갑사 등지에 많

이 자생했으나 줄어들었고 해보면 광암리 용천사 계곡처럼 광활하게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는

곳은 없다.

용천사 계곡에 자생하는 꽃무릇은 전 해보서초등학교에서부터 모악산까지의 계곡 전반에 퍼

져 있고 용천사 주변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자생하고 있는 주수는 가히 수백만주에 이른다고 해

야 할 것이다.

1984 100 1 . 년 한국자연보호협회와 한국일보가 지정한 한국


5. 끈끈이 주걱 <Drosera rotundifolia Linne > 끈끈이귀이개과

우리 나라 각처의 산록 습지에 자생하고 있는데 근래에 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우리 군의

실정도 같다.

여러해살이 풀이며 벌레 잡이 식물이고 7 23 . 월에 꽃이 피며 꽃줄기의 키는 ㎝ 정도다 잎은

뿌리에서 모여 나고 긴 잎자루가 있고 주걱 모양으로 연분홍인데 홍자색의 많은 잔털이 있어

끈끈한 액체를 분비하여 작은 벌레가 잎에 닿으면 털에 붙어 분비액에 의해 소화가 된다.

6. 노란하늘타리 < - . . Trichosanthes quadricirra Miquel > 왕과 王瓜 쥐참외 박과

마을 울타리 등지에 자생하는 여러해살이 덩굴식물로 열매와 뿌리는 약으로 쓰고 풀 전체에

부연 털이 나있다.

꽃은 암수 2 ( ) 7 . 가 로 家 백색이며 월에 피고 열매는 가을에 노랗게 익는다

농촌의 울타리가 브럭으로 바뀌면서 마을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게 되었다.

7. 말나리 <Lilium distichum nakai ex Kamibayachi > 백합과

함평의 각 산지 특히 군유산의 수림 및 정상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

여러해살이며 비늘 줄기는 둥글고 흰색이며 줄기 길이는 80 6 8 ㎝ 가량이고 ∼ 월에 붉은 꽃을

피운다 어린 . . 잎은 나물을 해 먹는다


11. 산작약 < . Paeonia albiflora japonica (Makino) Miyabe et Takeda var. 山芍藥

typica Nakai > 작약과

군유산 모악산에 , . 많이 자생하고 있었으나 채약자들의 남획으로 요즘은 참으로 보기가 힘들다

여러해살이 풀이며 초여름인 5 . 월경에 흰꽃이 핀다

12. 삼지구엽초 < . - . erimedium koreanum nakai > 三枝九葉草 음양곽 淫羊藿 매자나무과

다년생 풀로 뿌리줄기는 단단하며 가로 누었고 한 줄기가 돋아 세 줄기로 나뉘고 하나의 줄

기에 세 잎이 피기 때문에 삼지구엽초라 한다.

경기 강원 , 평남산이 유명하며 전남에는 완도의 약산에 자생하며 함평군에는 불갑산에 약간

자생하고 있다.

강정 명뇌 불임증의 , , . 요약으로 쓰인다

13. 속썩은풀 < - . Scutellaria baicalensis George. > 황금 黃芩 꿀풀과

해를 거듭할수록 자생종은 멸종 단계에 이르고 있고 종자 번식이 잘되므로 재배에 의존하고 있다.

다년초며 키는 60 7 8 . ㎝에 이르고 ∼ 월경에 자색의 꽃이 피며 뿌리를 약으로 쓴다

14. 순채 < . Brasenia schreberi J. F. Gmelin > 蓴菜 수련과

전남과 충남 일부에서 재배하며 멸종 단계에 이르고 있다.

우리 함평군에서는 월야면 월야리 순촌의 방죽에서 자라며 순촌이란 마을 이름이 순채가 자

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조선왕조 때는 진상품의 하나였다.

여러해살이 물풀로 줄기는 옆으로 뻗으며 많은 가지를 내고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이고 긴 잎

자루가 달려 물위에 뜬다.

잎의 크기는 길이 8 , 5 7 8 . ㎝ 폭 ㎝ 가량이며 ∼ 월경에 암홍자색의 꽃이 핀다

어린 순이 고급 요리에 쓰인다.


16. 용담 < . . Gentiana scabra bunge var. Buergeri (Miquel) Maximowicz 龍膽 초용담 용

담과>

각지 산야에 많이 자생하는 아름다운 가을 꽃으로 위장 질환의 요약으로 알려 오기에 근래

많이 채취하여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러해살이 풀로 키는 60 8 10 . ㎝ 가량이고 ∼ 월에 자주색의 종모양 꽃이 핀다

17. 줄 < . Zijania caduciflora (Turczaninow) Nakai > 줄풀 화본과

개울이나 연못가에 흔히 자생하는 풀이나 최근 농경지 정리 등으로 인하여 자생지가 점점 줄

어들어 위기에 처한 식물이다.

여러해살이 물풀로 키는 1~2m ( ) . 가량이며 옛날에는 우장 비


======https://www.hampyeong.go.kr/upload/gunsa/01.pdf=========

제 절1 전남 방언의 형성과 함평

고대 국어는 북방계 부여어 와 ( ) ( ) ( ) ( ) 北方系 夫餘語 남방계 한어 의 南方系 韓語 분기가 방언적 단

위를 형성하였을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남 방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백제어는 본시 남방계인 마한어에 남하하여 세력을 잡은

부여계의 언어가 혼합된 것이며 상류지배 , 계급사회에서는 부여계의 언어가 우세하였으나 마한

어와의 사이에 언어 투쟁 결과로써 혼효와 수정이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전남 방언은 고대에는 남부의 한어 계에 ( ) 三韓語 속한 마한어의 후예로써 고려 건국이후 오늘

날의 국어 체제가 성립된 뒤에도 역시 공통어의 방사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 문화의 , , , , 중심지와 인접한 지역의 방언과는 음운 어휘 문법 등의 언어적

사실에 차이를 유지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하겠다.

전남 지역이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동일지역에 속한다 하나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언어 사실

은 결코 동질적인 것이 아니요 그, 저변에는 꽤나 복잡한 방언적 특징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

하게 된다.

이돈주 교수는 ( ) 李敦柱 백운산과 섬진강을 분계선으로 하여 경상도 방언의 개신파에 영향을 받

은 동남부 지역의 방언과 서남으로는 노령산맥을 분계선으로 한 전북 방언권과의 대립에서 전남

방언을 다음과 같이 세 지구의 큰 핵 방언권으로 구분하고 있다.

( ) , , , , , , , 가 지역∶광산 담양 곡성 화순 나주 장성 함평 무안

( ) , , , , , , 나 지역∶보성 장흥 강진 해남 완도 영암 진도

( ) , , , , , 다 지역∶구례 광양 여천 승주 거문도 고흥

위의 핵 방언권 분류에 의하면 함평은 노령산맥 밑에서 전남 문화 중심권인 광주와 연결된

나주의 인접 서남방에 위치하고 있다 전남의 . 문화 중심지였던 광주와 나주에 인접하여 연결되

어 서울로부터의 문화 전파가 빨랐으므로 광양, , , , 여천 신안 진도 완도보다는 독특한 방언을

덜 보유하고 있다.

또한 지리적인 근접성 때문에 영광 무안 장성 나주 , , , 등의 언어와는 거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리적 근접성을 떠나 경상도나 강원도의 어휘나 음운과 친근성을 보이는 것도 상당

히 있어 방언 형성의 역사적 문화적 , . 복합성을 말해 주기도 한다

제 장6 함평 방언( ) 方言

232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제 절2 함평 방언의 특징

앞에서 지적했듯이 함평의 언어는 전남 방언 ( ) 가 지역권에 해당되는데 전남의 문화중심권인

광주와 나주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서해안에 접한 해안지대로써 해상등을 통해서도 우리 나

라 문화중심인 개경 즉 ( ) 開京 서울과의 문화를 비롯한 제반 사항의 전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져

어떤 특별한 특징을 드러내지 않고 있음이 일반적인 특성이다.

세분하여 살펴본다면 노령산맥 , 남쪽 내륙지방과 서해안의 일면에 접하여 위치하고 있어 전

남 서남권의 어휘나 음운을 특별히 보유하는 특정 지역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어 보다 세

밀하고도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함평을 구분하여 장성 광산 나주에 , , 접한 동부지역과 서해안에 인접한 서부지역으로

구분하여 볼 때 어쩌면 언어의 구성에 있어 많은 특이점으로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되나

지리적 위치와는 달리 현저한 차이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단지 발음면이나 언어 구사면에 있어

서의 약간의 차이가 표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 함평 방언의 특징을 장성권과 나주권에 연계

하면서 해안지대 특유의 언어 형성을 가미한 점에서 생각해 봄이 바람직하리라 믿는다.

함평 방언을 살펴봄에 있어서 인접지역인 장성 나주 , , 등의 방언편을 참조하여 음운 형태 어

휘상의 특색에 대하여는 이돈주 교수의 ( ) ( ) 李敦柱 저서를 참고하고 김형규 金亨奎 교수의 「한국

방언연구 에서 」 지적해 낸 이곳 방언을 가려 뽑았으며 1991년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간행한

방언연구집 전라남도편을 참고로 하여 자료를 정리하였다 미흡한 . ( ) 부분은 이 교수의 李 저서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현재에 . 이르러 컴퓨터 용어가 상용화되는 등 시대에 따른 새로운 용어

가 방언화 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본고에서 생략하였다.

1. 어 휘

1) 농 사

․ 가려낸다∶취레낸다 ․ 가지∶지 ․ 가지말랭이∶지말랭이

․ 감자∶감자 ․ 겨∶저 ․ 곁두리∶창꺼리, 새꺼리

․ 고갱이∶배추 ․ 고구마∶감자 ․ 고구마줄기∶감자쭐거리

․ 광주리∶꽝지리 ․ 괭이∶꾕이 ․ 그네외∶홀태

․ 김매다∶지심맨다 ․ 깨( , ) 참깨 들깨 ∶꽤 ․ 꼬-다∶꼰다

․ 꼬았다∶깠다 ․ 꽹과리∶깽새 ․ 나물∶노물, 풋노물

․ 논애벌( ) ( ) 매다 ∶초벌 판다 ․ 농기구∶연장 ․ 골라낸다∶발라낸다

․ 들기름∶들깻지름 ․ 등겨∶유까, , 뭉근재 누까 ․ 방아∶방애

․ 맷돌∶매 ․ 멍석∶덕석 ․ 메조∶모서숙

․ 무∶무시 ․ 무말랭이∶무시몰랭이 ․ 무잎∶무시잎삭

제6장 _ 함평 방언 233

․ 바구니∶바구리 ․ 방앗공이∶방앳고 ․ 밭고랑∶꼬랑

․ 밭두둑∶밭두룩 ․ 밭둑∶밭두럭 ․ 밭∶밧

․ 빻는다∶뽛는다 ․ 벼( ) , 열매 ∶나락 베 ․ 벼이삭∶나락모가지

․ 벼흝이∶가락홀태 ․ 볍씨∶씨나락 종자 ․ 볏가리∶나락비눌

․ 볏단∶나락뭇 ․ 보릿겨∶보릿저 보릿재 ․ 보습∶보십.

․ 봄보리∶춘모 ․ 삯군∶놉 ․ 삼태기∶송쿠리, 소쿠리

․ 새꽤기∶회기 ․ 새끼∶사내키 ․ 쇠스랑∶소시랑

․ 수수∶쑤시 쭈시 ․ 수숫잎∶쑤시잎사구 ․ 숫쇠( ) 아래 ∶숫중쇠

․ 시래기∶실가리 ․ 심는다( ) 씨감자 ∶놓는다 ․ 심는다( ) 콩.팥 ∶간다

․ 심는다∶숭군다 ․ 써레∶씨레 ․ 쐐기∶새악

․ 쓰레기∶씨레기 ․ 암쇠( ) 위 ∶암중쇠 ․ 어레미∶얼갱이

․ 역둥구미∶망태 망태기 ․ 옥수수∶깡냉이 ․ 왕겨∶맷저, 맷재

․ 자루∶자리, , 차두 차대기 ․ 자리개∶잘개 매개 ․ 장다리무∶짱다리무시

․ 절구공이∶도굿대 ․ 절구∶도구통 ․ 조밥∶서숙밥

․ 조∶서숙 ․ 조선무우∶조선무시 ․ 조이삭∶서숙모가지

․ 좁쌀∶서숙쌀 ․ 짚방석∶도레방석 ․ 짚∶집, 지푸라기

․ 차조∶차서숙 ․ 참기름∶참지름 ․ 채소∶노무새

․ 키∶치 ․ 팔다∶돈산다 폴다 ․ 팥∶폿

․ 팥죽∶폿죽 ․ 호미씻이∶풍년굿 ․ 호미∶호무

․ 호박고지∶호박써래기 ․ 확∶화약

2) 음식과 음식 관련 기물

․ 가래떡∶대떡 ․ 가루∶가리 ․ 가마솥∶가매솟

․ 간장∶장 ․ 간장종지∶장깍쟁이 ․ 고명∶국수

․ 고무래(재)(곡식)∶당그래 ․ 과줄∶약과 ․ 국물( ) 김치의 ∶짐칫국

․ 국물도( ) 없다 ∶콧물도 ․ 국물∶말국.몰국 ․ 국수∶밀국수

․ 굴뚝∶귀둑 ․ 그을음∶끼시름 끄스름 ․ 기계국수∶국수,

․ 기른다(콩나물을)∶지룬다 ․ 김치∶짐치 ․ 김칫국∶짐칫국물

․ 김∶해우.짐 ․ 깍두기∶쪼각지 ․ 냅다∶매웁다.시다

․ 누룽지∶깜밥 ․ 눌은밥∶누른밥 ․ 담배설대∶댐배설때

․ 담뱃대∶댐뱃대.대통 ․ 두부∶뚜부 ․ 뚝배기∶추머리

․ 뜬숯∶숫 ․ 물부리∶대뽈치 ․ 바가지∶바가치

․ 반찬∶겅개 ․ 부뚜막∶부수막 ․ 부삽∶불삽

․ 부시∶부수 ․ 부싯깃∶부숫집 ․ 부싯돌∶부숫독

․ 부엌∶정지.정재 ․ 부젓가락∶불저붐 ․ 부지깽이∶비땅

23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 부추∶솔 ․ 사발뚜껑∶반개 ․ 상추∶상추

․ 석쇠∶적사 ․ 성냥∶성낭 ․ 솥∶솟

․ 솥뚜껑(쇠)∶쇠소두랑 ․ 숭늉∶숭님 ․ 숯∶숫

․ 시루밑∶시리밋 ․ 시루변∶시릿변 ․ 시루∶시리

․ 식혜∶감주 ․ 쏱뚜껑.나무∶나무소두랑 ․ 씻다( ) 쌀을 ∶씨친다

․ 아궁이∶부석.부삭 ․ 양념간장∶파장 ․ 엿기름∶엿지름

․ 오이∶물외 ․ 오이지∶외짱아치 ․ 장독뚜껑∶바내기

․ 젓갈의( ) ( ) 젓국 ∶말국 몰국 ․ 주걱∶주벅 ․ 지핀다( ) , 불을 ∶살린다

․ 참숯∶참나무숫.참목나무숫 ․ 칼국수∶밀국수.칼국수 ․ 콩기름∶콩지름

․ 콩나물국∶콩노물국 ․ 콩나물∶콩노물 ․ 튀밥∶티밥,

․ 푼다( ) 밥을 ∶담은다.퍼 ․ 항아리뚜껑∶질소두랑 ․ 화로∶하리, 화리

․ 화롯불∶하릿불 ․ 흰떡가루∶흰떡가리

3) 가 옥

․ 거품∶버끔 ․ 고드름∶고두름 ․ 구기-다∶꾹적거린다

․ 구기었다∶꾹적거렸다 ․ 구려지다∶적거려진다 ․ 궤∶닫이

․ 급도리∶들 ․ 기둥∶지둥 ․ 기와집∶기아집

․ 낙숫물∶지시락물 ․ 누벼야한다∶뉘베야한다 ․ 누비이불∶뉘비이불

․ 담벼락∶담베락 ․ 도랑∶또랑. 똘 ․ 돌쩌귀∶돌쪼구

․ 두레박우물∶두룸박새암 ․ 두레박∶타리박 ․ 뒤꼍∶뒤안

․ 또아리∶또가리 ․ 똥장군 장군 ∶ 소매장군 ․ 퇴∶토방

․ 마루∶말레 ․ 목침∶몽침 ․ 미닫이∶밀창문

․ 바가지우물∶쪽박새암 ․ 바깥변소∶사랑치깐 ․ 바람벽∶베랑빡

․ 베개∶비개 ․ 베갯속∶비개속 ․ 베갯잇∶비개호지

․ 벤다( ) 베개를 ∶빈다 ․ 벽∶베랑빡 ․ 변소 벤소 ∶ 치깐

․ 샘∶도내기새암 ․ 서랍∶빼깐 ․ 수렁∶수랑

․ 숫쇠∶숫돌쪼구 ․ 시렁∶시렁까리 ․ 안변소∶안치깐

․ 암쇠∶암돌쪼구 ․ 여닫이∶외창문.쌍창문 ․ 열린다∶끌러진다

․ 열쇠∶쇳대 ․ 열어라­서랍∶잡아땡게라 ․ 열었다( ) 서랍을 ∶뺐다

․ 열었다∶땄다 ․ 옹마름∶용마람 ․ 욧잇∶요껍딱

․ 우물∶새암 ․ 울타리∶우타리 ․ 이엉∶마람

․ 자물쇠∶쇠통 ․ 잠근다∶장군다 ․ 잠긴다∶쟁긴다

․ 장독대∶장깡 ․ 종이∶종우 ․ 주춧돌∶지춧독

․ 처마∶처매 ․ 틀다∶튼다 ․ 펌프달린 우물∶작두새암

․ 흙손∶쇠손

제6장 _ 함평 방언 235

4) 의 복

․ 가위∶가새 ․ 겹옷∶겹것 ․ 고치∶뉘에꼬치

․ 골무∶골미 ․ 깁는다∶줍는다 ․ 끊다(옷감을)∶뜬다

․ 낀다( ) 골무를 ∶찐다 ․ 나막신∶나마깨 ․ 누덕누덕∶두덕두덕

․ 누에나방∶뽄대기나부 ․ 누에∶뉘에 ․ 다듬잇돌∶다듬돌

․ 다리다∶대룬다 ․ 다리미∶대루 ․ 대님∶댄님

․ 덧버선∶덧보신 ․ 두렁이∶두렁치매 ․ 두루마기∶두루매기

․ 매다∶쨈매다 ․ 면화의씨∶미영씨 ․ 목화∶미영

․ 미투리∶미터리 ․ 받짇고리∶바느질상지 ․ 버선∶보신

․ 번데기∶뽄대기 ․ 빨다∶뽈다 ․ 빨래∶서답

․ 빨랫돌∶빨랫독 ․ 솜∶소캐 ․ 씨아∶씨아시

․ 양복주머니∶개와.양복개와 ․ 염낭∶조마니 ․ 오디∶오도개.오둘개

․ 잠방이∶중우잠뱅이 ․ 재봉틀∶자방틀 ․ 주머니∶조마니

․ 짚신∶짚세기 ․ 조끼주머니∶개앗조마니 ․ 허리띠∶허리끈

․ 혼수감∶채단 ․ 홀옷∶홀것

5) 인 체

․ 가르마∶가리매 ․ 가마(숯)∶숫굴 ․ 가마∶가매

․ 가부좌∶행감 ․ 감기∶고뿔.개존머리 ․ 거울∶민경.새꼉

․ 검은자위∶거멍창.꺼멍창 ․ 겨드랑∶저탈밋 ․ 곰보∶빡보

․ 구레나룻∶굴레시욤 ․ 구린내 구렁내 ∶ ․ 궁둥이∶궁댕이.엉댕이

․ 귀머거리∶귀먹쟁이 ․ 귀에지∶귓밥 ․ 귀이개∶귀지개

․ 기계충∶기겟독 ․ 기미∶지미 ․ 기지개∶지지개

․ 나룻-이∶시욤이 ․ 넓적다리∶허벅다리 ․ 눈두덩∶눈뚜껑

․ 다래끼∶다랫.다래 ․ 대가리∶대그빡 ․ 대마디∶매답

․ 돼지대가리∶되아지머리 ․ 돼지머리∶되아지대그빡 ․ 두드러기∶뚜두럭

․ 딸국질∶포깍질 ․ 땀띠∶땀뜨래기 ․ 마른버짐∶모른버짐

․ 말더듬이∶밤버버리 ․ 머리∶머리빡 ․ 머리카락∶멀크락

․ 목∶모가지 ․ 목물한다∶허리막한다 ․ 목욕∶모욕

․ 무릎∶물팍 ․ 발가락∶발구락 ․ 방귀∶동.방구

․ 배꼽∶배꾸락 ․ 배추를 절이다∶간저린다 ․ 벙어리∶버버리

․ 보조개∶볼태기새암 ․ 복사뼈 복송씨 복송뼈 ∶ . ․ 볼거리∶항아리손님

․ 볼∶볼태기 ․ 비듬∶지개미 ․ 뺨∶뺨대기

․ 뼈∶빼 ․ 뼈의 마디∶매두.매두락 ․ 사마귀∶사마기.사마구

․ 새끼손가락∶깨끼손고락 ․ 세수대야∶세숫대 ․ 소경∶봉사

236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 손가락∶손고락.손구락 ․ 쇠대가리∶소머리 ․ 쇠머리∶소대그빡

․ 수염∶시욤 ․ 씻다(얼굴)∶닦는다 ․ 애꾸∶외퉁배기

․ 약손가락∶께끼안손고락 ․ 언챙이∶얼챙이 ․ 얼굴∶얼골

․ 얼레빗∶어리빗 ․ 엄지손가락 엄지손고락 ∶ ․ 엉덩이∶엉댕이

․ 여드름∶이두름 ․ 오금∶오굼쟁이 ․ 왼손∶외약손

․ 왼쪽∶외약쪽 ․ 정강이∶성문다리 ․ 졸-다∶자운다

․ 천연두∶외손님 ․ 코털∶콧시욤 ․ 콧구멍∶콧구녁

․ 콧수염∶웃시욤 ․ 턱수염∶택시욤 ․ 턱∶택

․ 트림∶트름 ․ 학질∶하리거리 ․ 혀∶서.섯바닥

․ 혓바늘∶섯바늘 ․ 홍역∶호녁 ․ 흰자위∶흰창

6) 육 아

․ 갓난아이∶갓난애기 ․ 고누∶꼰 ․ 곤지곤지∶지개지개

․ 공기놀이∶독줏어묵기 ․ 굴렁쇠∶동태 ․ 굴렁쇠 굴린다∶궁글린다

․ 그네∶군지 ․ 그네를 뛴다∶탄다 ․ 기저귀∶지저구.걸래

․ 남자아이∶머시마 ․ 누다∶싼다 ․ 도( ) 윷 ∶퇴

․ 돌∶똘 ․ 마렵다∶매릅다 ․ 목말∶목물

․ 밑싣개∶발판.안징개 ․ 버릇∶버르장머리 ․ 부라부라∶방애방애

․ 사금파리∶새금때기 ․ 소꿉질∶바끔사리 ․ 아장아장∶자박자박

․ 안기다∶보듬긴다 ․ 안다∶보듬다 ․ 안아서∶보듬아서

․ 앉히다∶앙친다 ․ 어린애∶꼬마.꼬맹이 ․ 얼레∶연자새

․ 얼음 지친다∶탄다 ․ 여자아이∶지집아 ․ 오줌∶오짐

․ 윷 두동가기∶둑동생이 ․ 윷∶숯 ․ 자치기∶때콩.때공

․ 자치기의 작은막대∶때콩 ․ 죄암죄암∶쥐엄쥐엄 ․ 지리다∶저리다

․ 큰막대∶뜰짱 ․ 팽이∶팽도리.뺑도리 ․ 포대기∶보대기

7) 인 륜

․ 결혼잔치∶대사잔치 ․ 남∶놈 ․ 남동생∶남동상

․ 남동생의 부인지칭∶동상의덕 ․ 도련님∶되련님 ․ 매부∶∶매양

․ 매형님∶매부 ․ 매형∶매양 ․ 며느리∶메느리

․ 백부∶큰아부지 ․ 사위∶사우 ․ 삼촌∶삼춘

․ 새색시∶새각시 ․ 서방님∶시아제 ․ 숙부∶작은아부지

․ 시누이∶시누 ․ 시동생∶시아제 ․ 아버지∶아부지.아부이

․ 아버지세째형∶세째큰아부지 ․ 아우∶동상 ․ 어머니∶어매.어무이머

제6장 _ 함평 방언 237

․ 어미∶어매 ․ 올캐∶오라부덕 ․ 외삼촌∶외삼춘

․ 중부∶작은큰아부지 ․ 처녀∶큰애기 ․ 할망구∶망구

․ 할머니∶할무니.할매 ․ 할아버지∶한아부지 ․ 할아비∶영감

․ 형∶성.성님 ․ 혼인∶혼연 ․ 홀아비∶홀애비

․ 홀어미∶홀엄씨 ․ 환갑∶한갑 ․ 효자∶소자

8) 경 제

․ 거스름돈∶낭거지 ․ 계란꾸러미∶계란줄 ․ 곱하다∶꼽허다

․ 구멍가게∶점방 2 ․ 꾸러미∶줄 ․ 다섯말∶단말

․ 담배가게∶담뱃집 ․ 대장간∶성냥간 ․ 덤∶우수

․ 두름∶룸 ․ 마을∶마실.모실 ․ 마흔∶마훈

․ 마흔살∶마훈살 ․ 머리카락 뭇∶뭉탱이 ․ 모루∶모릿독

․ 모루채∶매.쇠매 ․ 무묶음 뭇∶다발.단 ․ 뭇∶모들가리

․ 바퀴∶발통 ․ 병∶뱅 ․ 뼘∶뺌

․ 설흔∶서룬 ․ 설흔아홉살 서룬아홉살 ∶ ․ 세다∶시다

․ 쉰∶쉬운 ․ 스무살∶수무살 ․ 스물∶수물

․ 쌍∶장곤.장군 ․ 에누리∶외누리 ․ 여드레∶야드레,

․ 여든∶야든 ․ 여섯말∶연말 ․ 이야기∶이야그

․ 이웃∶윳.유제 ․ 일흔∶이른 ․ 자루∶자리

․ 잔돈∶낱돈 ․ 장작묶음 뭇∶다발 ․ 축∶동

․ 켤레∶커리 ․ 포기∶폭 ․ 풀무∶불무

․ 하나∶한나 ․ 하루동안∶하렛동안 ․ 하룻날∶하랫날

9) 동 물

․ 가물치∶까마치 ․ 가시∶까시 ․ 강아지∶갱아지

․ 개구리∶깨고리.깨구락지 ․ 거머리∶거마리 ․ 거미∶거무

․ 거위∶때까우 ․ 게∶기 ․ 고기( ) 魚 ∶괴기

․ 고기( ) 肉 ∶괴기 ․ 고삐∶괴뺑이.괴삐 ․ 고양이∶괴양이.괴댁이

․ 구유∶구수 ․ 깃∶짓 ․ 까마귀∶까마구

․ 까치∶깐치 ․ 까투리∶까토리 ․ 날것∶생맬치

․ 노래기∶사내기 ․ 노루∶노리 ․ 노른자위∶노랑창

․ 다슬기∶고동.물고동 ․ 닭똥∶달구똥 ․ 닭장∶장태

․ 대하∶대와 ․ 덫∶돗 ․ 도둑고양이∶도둑괴양이

․ 돼지∶되아지 ․ 돼지우리∶되아지집 ․ 두꺼비∶뚜개비

238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 두더지∶뒤제기.두지기 ․ 두엄∶뒤엄 ․ 딱따구리∶탁목새

․ 땅벌∶오빠시 ․ 뜸부기∶뜸배기 ․ 마구간∶말외양간

․ 말총∶몰총 ․ 메뚜기∶매때기 ․ 멸치말린것∶모른맬치

․ 멸치 맬치 ∶ 멸치 ․ 모기∶모구 ․ 모이∶모시

․ 미꾸라지∶웅구락대기 ․ 미끼∶낚숫밥 ․ 민물고기∶물천어

․ 민물새우 큰것∶징검새비 ․ 바구미∶바개미 ․ 바다다슬기∶고동.갯고동

․ 박쥐∶뽁쥐 ․ 반딧물∶개똥불 ․ 발채∶바작

․ 방개∶방기 ․ 방아깨비∶불땅깨비 ․ 벌레∶벌거지

․ 벌을 친다∶키운다 ․ 벼룩∶배룩 ․ 벼슬( ) 닭 ∶비실

․ 병아리∶삥아리.삥아리 ․ 뻐국새∶쑥꾹새 ․ 붕어∶붕애

․ 산돼지∶맷되아지 ․ 삵괭이∶싹 ․ 새우등∶새비등

․ 새우∶새비 ․ 생선∶갯고기 ․ 서캐∶써까리.싸가래

․ 소금쟁이∶소금장사 ․ 소입막이∶소망 ․ 솔개∶솔갱이

․ 송아지∶쇠앙치.송아치 ․ 쇠고기∶소고기.환육 ․ 쇠꼬리∶소꼴랑지

․ 쇠발톱∶소굽 ․ 쇠뿔∶소뿔 ․ 쇠죽바가지∶쇠죽쪽박

․ 수코양이∶숫괴양이 ․ 수탉∶장닥 ․ 쌀벌레∶쌀벌거지

․ 아가미∶아감지 ․ 암고양이∶암괴양이 ․ 암방아깨비∶땅깨비 숫

․ 여우∶여시 ․ 여치∶연치 ․ 염소∶맴소.맴생이

․ 올가미∶홀랑개 ․ 올챙이∶방망치 ․ 우렁이∶우렁

․ 잉어∶잉애 ․ 작대기∶짝대기 ․ 장구벌레∶곤자리

․ 장끼∶쟁끼 ․ 장어∶짱애 ․ 중고기∶중태기

․ 지느러미∶날개 ․ 지렁이∶거시랑 ․ 진드기∶진두개

․ 진딧물∶뜬물 ․ 창자∶창시 ․ 토끼띠∶퇴끼띠

․ 토끼집∶퇴끼집 ․ 토끼∶퇴끼.퇴깽이 ․ 토끼풀∶시계풀

․ 파리∶포리 ․ 피라미∶피리 ․ 하루살이∶하래살이

․ 황소∶부사리.뿌사리 ․ 회충∶홰벌거지 ․ 흰자위∶흰창

10) 식 물

․ 갈퀴∶갈쿠 ․ 개암∶깨끔 ․ 고들빼기∶꼬들빼기

․ 고비∶꾀충 ․ 고욤∶나도감 ․ 과일∶과실

․ 그루터기∶끌텅 ․ 껍질∶겁덕.껍닥 ․ 꽈리∶때왈

․ 냉이∶나숭개 ․ 달래∶달룸개.달롱개 ․ 덩굴∶넝쿨.넌출덩

․ 도깨비바늘∶지개비풀 ․ 도끼∶도치 ․ 도토리나무∶가랍나무

․ 돌배∶독배 ․ 딸기∶딸 ․ 떡갈나무∶가랑낭구

․ 머루∶모루 ․ 마름∶모람.모랑 ․ 뱀딸기∶배암딸

․ 벤다∶빈다 ․ 복숭아∶복송 ․ 복숭아씨∶복송씨

제6장 _ 함평 방언 239

․ 봉선화∶봉숭아 ․ 삘기∶삐비 ․ 사과∶능금

․ 삭정이∶삭다리 ․ 산딸기∶산딸 ․ 상수리나무∶참나무

․ 상수리∶상소리 ․ 솔가리∶갈쿠나무 ․ 쇠서∶쇠아서

․ 씀바귀∶싸랑부리 ․ 진달래술∶참꼿술 ․ 진달래∶참꼿

․ 질경이∶뻬쭌닢.쑥부쟁이 ․ 철쭉∶개꼿 ․ 청미래덩굴∶맹감

․ 콩껍질∶깍지 ․ 토마토∶늘렁감 ․ 해바라기∶해바라지

․ 호도∶호두

11) 자 연

․ 가을하다∶가실헌다 ․ 겨울∶시안 ․ 구석∶구석지

․ 그글피∶그고패 ․ 글피∶고패 ․ 내일∶낼

․ 노을∶북새 ․ 돌∶독 ․ 먼지∶문지

․ 모래땅∶목새땅 ․ 모래∶목새.모새 ․ 모래밭∶목새밧

․ 모퉁이∶모탱이 ․ 묘∶맷.맷동 ․ 바위∶바우

․ 벼락∶배락 ․ 비탈∶깔크막 ․ 산기슭∶산지시락

․ 산마루∶산뽕아리 ․ 새벽밥∶새복밥 ․ 새벽∶새복

․ 소나기∶쏘내기 ․ 아침밥∶아직밥 ․ 언덕∶엉턱

․ 윗마을∶웃몰 ․ 이끼 끼다∶입다 ․ 이끼∶바우손

․ 이슬비∶이실비 ․ 해거름∶해름판 ․ 홍수∶큰물

․ 회오리바람∶소소리바람

12) 상 태

․ 가깝다∶가차웁다 ․ 가렵다∶개롭다 ․ 가렵-어∶개루와

․ 가볍다∶개붑다 ․ 가엾어서∶짠해서 ․ 간지러워∶갠지럽다

․ 간지럽히라∶갠지럼미긴다 ․ 굵다∶굵다 ․ 굵어서∶퉁구와서

․ 길다∶질다 ․ 길어야∶질어야 ․ 길이∶지리.지래기

․ 깊다∶짚다 ․ 깊으니까∶짚응깨 ․ 낮다∶나찹다

․ 낮으면∶나차우문 ․ 넓다∶너릅다 ․ 높은게∶높응깨

․ 높이어야∶높애야 ․ 다르다∶달브다 ․ 다른말∶딴말

․ 더위∶더우 ․ 무섭다∶무숩다 ․ 묽어∶밀거다

․ 묽지∶무르지 ․ 뾰족하게∶날캄허게 ․ 어두우니∶어두웅깨

․ 없애다∶없앨라고 ․ 없으니∶없응깨 ․ 연필심이 툭하다∶퉁허다

․ 작아서∶적응께 ․ 짧다∶자룹다 ․ 짧은∶자룬

․ 줄곳.계속( ) 가시오 ∶상긋

240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13) 동 작

․ 가르치다∶갈치다 ․ 가져오너라∶갖고오니라 ․ 걷는다∶걸는다

․ 굽는다∶군다 ․ 기르고(수염을)∶지르고 ․ 끓으면∶끓응깨

․ 끓이어라∶끼레라 ․ 끼었다(가시가)∶찡개졌다 ․ 끼워준다(싼것을)∶쪄준다

․ 달라고∶도라고 ․ 들여다본다∶디래다본다 ․ 떼고∶띠고

․ 떼-어야∶띠어 ․ 뗀다( ) 뗏장 ∶뜬다 ․ 마르면∶모르믄

․ 마시어라∶마새라 ․ 만들다∶맨든다 ․ 만들어라∶맨들아라

․ 말리면∶몰리문 ․ 말리어야∶말개야 ․ 말린다∶말긴다

․ 맞추어진다∶맞차진다 ․ 맡기어∶맽개 ․ 먹이어라∶맥애라

․ 먹인다∶맥인다 ․ 먹힌다∶맥힌다 ․ 메우어야∶미어야

․ 메우지∶미지 ․ 모시고∶모새 ․ 모시어야∶모새야

․ 무치어라∶무채라 ․ 바뀌었다∶배깼다 ․ 버렸다∶배랬다

․ 보인다∶빈다 ․ 빌어( ) 돈울 ∶빌레 ․ 빻아서∶뽀사서

․ 숨기어∶숭캐 ․ 숨긴다∶숭킨다 ․ 식히고∶식후고

․ 쌓였다∶쌔였다 ․ 썩히고∶썩후고 ․ 썩히어서∶썩화서

․ 씻어라∶싳어라 ․ 옮겼다∶앵겠다 ․ 읽히어∶읽해

․ 잠보( ) 잠꾸러기 ∶잠충이 ․ 저어라( ) 노를 ∶젓어라 ․ 주십시요( ) 빌려 ∶주씨요

․ 줄까요/ / 드려라∶주까요 드래라 ․ 탄다( ) 생선배를 ∶딴다

․ 토라져서∶삐쳐서 ․ 튀겼다(물방울을)∶탱겠다 ․ 헤어졌다(옷이)∶무어졌다

․ 후비어라∶파라 ․ 후빈다∶판다 ․ 흩트리-어∶허쳐

2. 문 법

1) 대 명 사

․ 너­가∶니가 ․ 너­에게∶너한태 ․ 너­의∶니

․ 너희­가∶느그들이 ․ 너희∶니기들.느그들 ․ 너희­를∶느그들을

․ 너희­에게∶느그들한태 ․ 너희­의∶느그들 ․ 누구­가∶누가

․ 자기(집)∶지기 ․ 자기­가∶지가 ․ 자기­의∶지

․ 저­가∶지가 ․ 저­에게∶저한태 ․ 저­의∶지

․ 제 머리못깍는다∶지

제6장 _ 함평 방언 241

2) 조 사

․ 나­와∶나허고 ․ 동생­에게∶동상한태 ․ 동생­을∶동상을

․ 돼지­를∶되아지를 ․ 사람­에게∶사람한태 ․ 삵괭이­와∶싹과

․ 여우­와∶여시와 ․ 있는데­에∶있는디 ․ 팥­은∶폿은

3) 경 어 법

․ 가니?∶가냐 ․ 가시었니?∶가셌냐 ․ 가요∶가라우

․ 계시어요∶지시시오 ․ 계시지?∶지시냐 ․ 그랬잖아?∶그랬지않냐

․ 무엇이어요?∶믓이요 ․ 무엇인가?∶므신가 ․ 앉게∶앉소

․ 앉아라∶앉어라 ․ 앉아∶앉어 ․ 앉으세요∶앉으씨오

․ 오나?∶온가 ․ 오니?∶오냐 ․ 오시요?∶오요

․ 입으시어야겠어요∶입으서야겠소

4) 시 제

․ 떠났으면 좋겠다∶좋겄다 ․ 먹었던∶먹었든 ․ 비가 오겠다∶오겄다

․ 안 가겠다∶가겄다 ․ 오겠더라∶오겄드라 ․ 왔니?∶왔냐

․ 왔었니?∶왔디야 ․ 잡더냐?∶잡디야 ․ 잡았니?∶잡었냐

․ 잡았다∶잡었다

5) 사동․피동

․ 기다려진다∶지달라진다 ․ 닦게한다∶딲개헌다 ․ 닦아지느냐∶딱어지냐

․ 만져진다∶몬자진다 ․ 빨게해라∶뽈개해라 ․ 빨린다∶뽈린다

․ 싣게한다∶싫개헌다 ․ 쓰게해라∶씨겋게해라

6) 연결어미

․ 가난하면서도∶가난함서도 ․ 까치가 울더니만 우드만 ∶ ․ 매야하니까∶허니깨

․ 먹었기 때문에∶따매 땜새 ․ 모기때문에∶따매 땜에 ․ 보니까∶봉깨

․ 비가 오면∶오먼 ․ 사람이면서∶사람임서 ․ 잡으면서∶잡음서

․ 하느라고∶허니라고

242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7) 보조용어

․ 고픈가보다∶고픈가부다 ․ 깨끗하지않아요∶안깨깟허다 ․ 꿈이었나보다∶꿈이든갑다

․ 꿈인가보다∶꿈인가비다 ․ 쌌나보다∶쌌능가비다 ․ 쌌나봐요∶쌌능가비요

․ 올까봐서∶올감숭깨 ․ 웃어댄다∶싼다

8) 부 사

․ 갑자기∶느닷없이 ․ 곧장∶바로 ․ 깨끗하게∶깨깟아게

․ 다음에∶나중에 ․ 마치맞게∶마침맞개 ․ 먼저.앞에∶모냐.몬자

․ 모두∶모도 ․ 살짜기∶살차기 ․ 송두리째∶통째

․ 어떻게∶어틓게 ․ 어찌 웃니?∶어째 ․ 예∶얘.야

․ 일부러∶역불러 ․ 찬찬하게∶차박차박허게 ․ 하마터면∶하마트라믄

3. 음 운

1) 단 모 음

․ 글/걸∶글.걸 ․ 기/귀∶기.귀 ․ 떼/때∶때

․ 뙤( ) 윷놀이의 ∶태.토 ․ 시/쉬∶시.쉬 ․ 틀/털∶틀.털

2) 이중모음

․ 궤짝∶괘구짝 ․ 석유∶색유 ․ 양념/ , 고약∶양님 괴약

․ 예의/ , 계획∶얘이 게흑 ․ 의논/무늬∶이논.무누 ․ 의자∶이자

3) , 음장 성조

․ 감더라∶깜드라 ․ 감으면∶깜으먼 ․ 드물-지∶두물지

․ 부드럽-지∶부드롭지 ․ 알더라∶알드라

․ ( ) + - 머리를 감 기 었다∶깽갰다

․ ( ) 몸이 더럽혀졌다∶더럽개됬다

․ ( ) + - 물건을 잡 히 었다∶잽혔다

․ ( ) + - 소금을 물에 풀 리 었다∶푼다.풀렸다

․ ( ) + - 소식을 알 리 었다∶알렜다.알려졌다

․ ( ) 신발이 바뀌겠다∶배끼겄다

제6장 _ 함평 방언 243

4) 억 양

․ 어디를가니?( ) ( ) 어느곳에 ∶어디가냐 설명

․ 어디를가니?( ) ( ) 어디엔가 ∶어디가냐 판정

․ 어디를가니?( ) ( ) 아무데도가지않음 ∶어디가냐 수사

5) 자음탈락

․ 값-이∶갑시가 ․ 맑-어∶맑아서 ․ 밟- ( ) 어∶볼바라 볿아라

․ 삯-이∶싹이 ․ 젊-어∶젊어서 ․ 핥-아∶핥아라

6) 불규칙활용

․ 낫-고∶나코 ․ 낳으니까∶나니깨 ․ 노랗-고∶놀어고

․ 도-으니까∶도웅게 ․ 들- . 으니까∶들으니께 등깨 ․ 먹-으니까∶먹으니깨

․ 무서우니까∶무숭께 ․ 무섭고∶무숩고 ․ 묻고∶물꼬

․ 살-으니까∶사니께 ․ 앓으니까∶앓으니께 ․ 하-고∶허고

․ 하-니까∶허니께 ․ 흐르니까∶흐링깨

7) 자음축약

․ 굽혀라∶굽헤라 ․ 놓게∶놋소.농개 ․ 좋더라∶좋드라

․ 떡하고밥하고∶떡어고밥어고 ․ 먹힌다∶맥힌다

․ 깨끗하군요∶깨까더요 ․ 못했읍니다∶모댔십니다 ․ 떡했니?∶떡했냐

8) 경 음 화

․ 긁지/긁겠다∶극찌.그꺼따 ․ 먹을 것∶머글껏

․ 먹지/먹겠다∶먹찌.머꺼따 ․ 밥도/떡국도∶밥또.떠꾹또

․ 삶지/삶겠다∶쌈찌.쌍꺼따 ․ 삼지/삼겠다∶삼찌.삼꺼따

․ 쏟지/쏟겠다∶쏘찌.쏘꺼따 ․ 안지/안겠다∶보듬찌.보듬꺼따

․ 앉지/앉겠다∶앙찌.앙꺼따 ․ 어렸을적( ) 에 ∶애랬을쩍에

․ 입지/입겠다∶입찌.입꺼따 ․ 할수( ) 있다 ∶할쑤

․ ( ) /( ) 채소 밭보다 묵정 밭부터∶받뽀단.받뿌터

24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9) 비음절화

․ 가꾸어라∶가꽈라 ․ 내리어라∶내려라 ․ 놓아라∶놔라

․ 드시었다∶드르셨다 ․ 들리었다∶들렸다 ․ 띄우어라∶띠워라

․ 마시었다∶마셨다 ․ 배우어라∶배왔다.배와라 ․ 부시어서∶부서서

․ 씌우어라∶씨개해라 ․ 어두웠다∶어두왔다 ․ 이어라∶여라

․ ( ) - 꿈 꾸 지∶뀌지 ․ ( ) - 반지 끼 지∶찌지 ․ ( ) - 안개 끼 지∶찌지

․ ( ) - 장기 두 지∶뒤지

10) 모음조화

․ ( ) - 눈을 비비 ∶비배서 ․ ( ) 문을 두드리∶뚜드러라 ․ ( ) - 문을 잠그 ∶장가라

․ ( ) - ( ) 물이 새 ∶새아 들어온다 ․ ( ) - 발을 밟 ∶볼바라 ․ ( ) - 불을 켜 ∶써라

․ (사람이)게으르-∶기울러서 ․ ( ) - 술을 담그 ∶당가라 ․ ( ) - 실을 꿰 ∶끼어라

․ ( ) - 어깨에 메 ∶미어라 ․ ( ) - 오랫동안 기다리 ∶지달라라

․ ( ) - 줄을 당기 ∶당거라 ․ ( ) - 혹을 떼 ∶띠어라

11) 움라우트

․ 곰곰히∶곰곰이 ․ 교통∶개통이 ․ 굶기다∶궁긴다

․ 굶기도했다∶궁끼도 ․ 깍이다∶깩인다 ․ 넉넉히∶넝너기

․ 다음∶담이 ․ 똑똑히∶똑똑이 ․ 맡기다∶매낀다

․ 벗기다∶뱃긴다 ․ 숲∶숩이 ․ 안방∶안빵이

․ 앞∶압이 ․ 의복∶이복이 ․ 잡히다∶잽힌다

․ 접히다∶접힌다 ․ 축축히∶축축이

․ ( ) 개한테 쫓겨∶쬧겨 ․ ( ) 고집을 피워 우긴다∶위긴다

․ ( ) 그림을 그린다∶기린다 ․ ( ) 물 푸기쉽다∶품기 ․ ( ) 빨랫줄을 높여라∶높애라

․ ( ) 손이 저리다∶재리다 ․ ( ) 옷을 다린다∶대린다 ․ ( ) 음식을 삭인다∶색인다

․ ( ) 친구를 사귄다∶사군다 ․ ( ) 풀을 뜯기다∶뜨낀다

12) . 외래어 한자어

․ 껌/까스∶끔.까쓰 ․ 라면/룩작∶나면.니구사꾸

․ 리어카/라디오∶니야까.나지오 ․ 버스/빠꾸∶뻐스.빠구

․ 상류∶상뉴 ․ 손녀∶솔려

․ 예의∶얘이 ․ 육년∶융년

․ 육학년 육앙년 ∶ ․일학년∶일항년 ․ 잡년∶잠년

244 ┃ 제1편┃ 자연과 인문·지리

┃제1장┃ 개관 246

집필 / 이명헌

┃제2장┃ 선사시대 유적·유물 252

집필 / 이명헌

┃제3장┃ 함평에서의 벼농사 시작 376

집필 / 이명헌

제6장 _ 함평 방언 245

제 편2 선사시대( ) 先史時代 의 함평

24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제 절1 구석기시대

인간이 자연에서 채취한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때를 구석기시대라 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홍적세에는 커다란 자연환경의 변화가 여러 차례 있었다. 즉

4 , 차례에 걸쳐 빙하기가 닥쳐오기도 하였고 또 각 빙하기 사이에는 지금보다도 기온이 높

았던 간빙기가 있었다 이러한 . . 현상은 우리나라 부근의 자연환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빙하가 발달하였을 때는 바다가 얕아져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육지로 연결되기도 하였고,

지금의 서해바다도 육지로 드러나서 사람이 지금보다도 훨씬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구석기 시대는 5 . 3 , 3 시기로 나뉜다 즉 번째 빙하기까지를 전기 구석기 시대라 하고 번째

와 4 4 (7 ~4 번째 사이의 간빙기 말부터 번째 빙하기 초기까지를 중기 구석기 시대 만 만 년

전 그리고 ), 4 (4 ~1 ) . 번째 빙하기의 나머지 부분을 후기 구석기 시대 만 만 년 전 라 한다 전

기 구석기 시대의 이른 시기에는 손쓴사람 호모하빌리스 이 ( ) ( 살았으며 이후로는 곧선사람 호

모에렉투스 이) . ( ), 활동하였다 그리고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슬기사람 호모사피엔스 후기 구

석기 시대에는 슬기슬기사람 호모사피엔스 ( ) . 사피엔스 이 살았다 이러한 각 시기마다 인류가

사용한 석기의 종류와 만듦새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한 곳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살지 않았다 그들은 . 무리를 지어 더

나은 생활조건을 찾아 이동하면서 살았다 먹을 .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산이나 들판으로 다

니며 열매를 따 모아야 하였고 여럿이 힘을 합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짐승들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 사냥할 짐승이나 채집할 식물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

활은 불안정하였다 그러므로 . . 그들은 정착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동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오래 계속되었다 한. 무리가 살다 간 곳에 곧 다른 무리가 와서 일정 기

간동안 살다가 떠나기도 하였고 때로는 , 오랜 기간이 지나 그곳에 흙이 두껍게 쌓인 뒤에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 남긴 유적은 동굴이나 물가의 땅속에 묻

혀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게 ,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지층을 우리는 흔히 문화층이라

고 부른다 때로는 . , 한 유적에서도 제일 위층에는 신석기유적 그 아래에는 후기 구석기 유

적 다시 , . 그 아래에는 중기 구석기 유적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각 문화층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하여 연대를 추정하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 무렵의

제 장1 선사시대의 개관

제1장 _ 선사시대의 개관 247

것부터 확인된다 전기 . , 구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평양시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 충북 단양

의 금굴 청원의 , , , 두루봉 동굴 등의 동굴 유적과 충남 공주의 석장리 경기도 연천의 전곡

리 등 강가 근처에 있는 야외 유적이 있다 이. , , , 유적들에서는 동굴곰 하이에나 물소 원숭

이 큰쌍코뿔이 , , 등의 짐승 화석이 나와 당시 우리나라 지역의 기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

으며 그에 따라 동식물의 종류 등 자연환경이 매우 달랐음도 알 수 있다.

또 구석기 시대 유적 가운데 몇 군데에서는 사람의 뼈 화석도 발견되었다. 평남 덕천 승

리산 유적에서 나온 두개의 어금니와 어깨뼈 평양 , 역포 대현동 유적에서 나온 머리뼈 등이

그것이다 이를 . ( ), ( ) , 각각 덕천사람 슬기사람 역포사람 옛슬기사람 이라 부르는데 모두 중기

구석기 시대 문화층에서 나왔다 한편 . 후기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는 승리산 유적의 승리산

사람 평양 , , 승호 구역 만달리 유적의 만달사람 청원 두루봉의 흥수아이 등의 사람 뼈들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 , , 유적에서는 많은 석기도 함께 발견되는데 사냥 가죽 벗기기 고기 자

르기 등 쓰임새에 따라 각각 모양이 다르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우리 함평군에서는 함평읍 장교리 월봉을 비롯하여 당마산, 당하

산 손불면 , , , , . 석창리 대발 석계 해창 월야면 예덕리 등에서 조사되었다 21) 이 중 장년리

당하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22) 중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함께 신석기 시대와 초기철기

시대의 유적도 확인되어 함평지역에는 늦어도 2~3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 절2 중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우리나라 부근의 기후 조건이 지금과 비슷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쯤부

터이다 기후 . . 조건이 바뀌면서 물론 자연환경도 구석기 시대와는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즉

동물이나 식물의 종류가 현재와 비슷해지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 사람들의 생활도 거의 적응

되어 갔다 신석기 . , 시대가 아직 시작되기 전에 돌을 깨뜨려서 나온 얇고 작은 격지로 정교

한 석기를 만들어 쓰던 시대가 있었는데 이를 , . 중석기 시대라 한다

중석기 시대 사람들도 채집 경제 단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 사냥 도구를 비

롯한 기술적인 면에서는 이전 시기보다는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즉. 그들은 활과 화

살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고 물고기를 잡는데 작살을 이용하였다 활과 . 화살을 사용함으로

써 이제 위험을 무릅쓰고 사나운 짐승과 싸울 필요가 적어졌고 재빠른 , 짐승들도 더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 시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돌을 갈

아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흙을 , . 빚어 구워 토기를 만들어 썼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

21)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전라남도․함평군, - - ,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전남 함평군 』

22) 최성락이헌종 함평 ․ , , , 2001. 『 장년리 당하산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24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와서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집단

의 규모도 그전보다 훨씬 커져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인간 . 생활에 있어 아주 큰 변

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씨앗에서 싹이 터 열매를 맺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차츰 자

연 상태로 자라난 것을 모아서 먹기보다는 씨앗을 간수하였다가 다음해에 뿌려 가꾸며 더

많은 곡식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이

동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신석기 . 시대 사람들이 농사를 지은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신석기 ,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는 주로 탄화된 곡식의 낱알들이 많이 발견되었

다.

이렇게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돌아다니며 , 짐승을 사냥하기보다는 길러서 새끼를 낳게

하여 필요할 때 잡아먹는 지혜도 가지게 되어 이제는 가축 사육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사용되었던 토기도 식생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 음식물을 끊여서 먹

을 수 있게 되었고 더운 국을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남은 식량을 담아 보관할 수도 있게

되었다 신석기 . .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다 이 빗살무늬 토기는 우리 나라에

서뿐 아니라 시베리아나 중국의 발해만 연안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 비슷한 문화를 가진 신

석기 시대 사람들이 당시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신석기 시대에는 사회가 그 이전에 비하여 많이 발전하였다고는 해도 아직은 구성원 모

두가 평등하였다 거대한 . , 자연은 당시 사람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고 혼자의 힘으로는 자신

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혼자서는 사납고 날쌘 짐승도 사냥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노동을 힘을 합쳐서 해야 하였고 그, 결과물도 평등하게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었

다 그. 결과 개인이라는 생각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집단과 개인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었

으며 경험이 , .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공동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누린 평등은 아마도 생산력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

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대략 6,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 ,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평남 궁산리를 비롯하여 황해도 지탑리 함북 굴포리

부산 동삼동 서울 , , , . 암사동 강원 오산리 경남 상노대도 등에서 발견된 유적이 있다 우리

함평군과 관련하여서는 앞 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대표적으로 함평읍 장년리 당하산 유

적에서 중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함께 신석기 시대와 초기철기 시대의 유적이 확인된

바 있다.

어쨌든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는 대체로 집 자리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의 집

들은 대개 강가나 낮은 구릉지에 자리 잡은 움집이었다 집의 . 바닥은 흙을 고르게 깔거나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든 경우도 있다 이는 . .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집터의 한가운데에는 강돌을 둘러 화덕을 만들었던 흔적이 있고 때로는 , 구덩이를 파거나

흙을 발라서 화덕을 만들기도 하였다 화덕은 . 난방용이었을 것이고 음식을 조리하는 데도

쓰였을 것이다 한편 .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주거공간이 용도에 따라 나뉘었던 흔적도 발

제1장 _ 선사시대의 개관 249

견되고 있다 예컨대 . 생활공간과 함께 토기를 놓고 쓰던 공간을 비롯하여 석기나 도구를 만

들던 공간 또, .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 등이 구분되어 있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들은 움집에 살면서 가까운 강이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 고기잡이에는

작살이나 낚시를 사용하였고 때로는 , . 그물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미역이나 다시마 등을

비롯하여 조개 굴, . 등을 채집하는 것도 중요한 경제활동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 산과 들에

서 이루어지는 사냥은 그전과 같이 계속되었다 바닷가나 . 강가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조개무지 유적이다.

한편 신석기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돌을 떼거나 갈아서 석기를 만드는 기술이 고도로 발

달하였다 간석기로는 . , , 도끼 자귀 등이 있고 후기의 것으로는 무기로 사용되었으리라고 추

측되는 별도끼도 발견된바 있다 석기 . , 가운데는 농사 도구로 사용된 것이 특히 많은데 다

소 거칠게 떼어낸 돌로 괭이를 만들어 땅을 파서 농사를 지었고 이어 농사가 발전하면서

돌보습으로 땅을 좀더 깊이 파서 일구게 되었다 곡식을 . 거두어들일 때 사용하였던 반달 모

양의 돌칼도 이 시기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며 낱알의 , 껍질을 벗길 때 사용한 갈돌판도 농사

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유물이라 하겠다.

또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 한편 식물에서 , 실을 뽑아 가락

바퀴와 뼈바늘 등을 이용하여 베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 그들은 짐승의 뼈나

뿔을 가공하여 도구나 장식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정착함

으로써 이전에 비해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농사 , 자체가 자연조건에 절

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클 수밖에 없었

다 그래서 . 그들은 사람은 물론 산이나 바위 등 모든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또, . 풍요를 비는 주술적인 의미를 갖는 물건들을 만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 절3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신석기 시대 후기가 되면 이미 사회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곧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 즉. 정착 생활로 인해 사회의 규모가 커

지고 생산량이 많아지자 개인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남는 것이 생겨나게 되

었다 이를 . 흔히 잉여 생산물이라 하는데 이제 스스로 일하지 않고도 남을 부림으로써 풍족

한 생활을 누리는 자가 등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바탕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3,500년 무렵의 유적인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유적에서는 옥을 가공하여 용 모양

으로 만든 장식품을 비롯하여 토기 등의 부장품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나왔다. 이것은 금속

기가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사회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음을 말해 주

는 예라 하겠다 이렇게 .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진행된 생산력의 발전과 잉여 생산물의 증가

25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로 인한 사유재산의 발생 빈부의 ,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

회 즉, . 계급사회의 출현을 재촉하였다

청동기 사용은 이러한 변화의 추세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청동은 . 구리에 주

석이나 아연을 섞어 구리보다 단단하게 만든 것인데 발해 , 연안에서 청동기가 사용된 시기

는 기원전 10 . 세기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기는 이보다 다소 늦지만 한반도에서도 다

량의 청동기와 함께 거푸집들이 출토되어 청동기가 , 여러 곳에서 직접 제작되고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 시대의 유물로는 대체로 비파형 동검․세형동검․창 등의 무

기와 도끼 끌자귀 ․ ․ 등의 도구 그리고 , . 청동거울 방울을 ․ 비롯한 장식품 등이 있다 그러나 청

동기 시대라 하더라도 농기구로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 많이 쓰였다 그리고 . 이 때는

돌을 갈아서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가장 발달한 시기였다 간석기는 . , , 무기 농기구 목공구

등으로 쓰였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생활유적인 주거지와 매장유적인 무덤 등이 주를 이루는데, 이

중 무덤이 더 많다 우리 . (8 ) 함평군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로는 손불면 죽암리 소명 기 23)

을 비롯하여 함평읍 진양리 중량(3 ) 기 24), (6 ) 대덕리 고양촌 기 25), (6 ) 성천리 와촌 기 26), 해보

면 용산리 대성(2 ) 기 27)에서 조사된바 있다.

당시에는 이미 계급이 발생하였고 지배계급은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같은 생활을 누

린다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무덤에 여러 가지 부장품들을 함께 묻었다 무덤 . 형식으로는 돌

무지무덤 고인돌무덤 돌널무덤을 , , , . 비롯하여 돌깐무덤 움무덤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대표

적인 것은 고인돌무덤이다 고인돌은 . , 탁자 모양과 바둑판 모양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바둑판 모양의 것은 주로 남만주와 한반도 서북부에 많이 분포한다.

우리 함평군에 분포돼 있는 고인돌의 경우는 123 602 개 군 기가 확인되었는데28) 그동안

없어진 것을 감안하면 700~800 . 기에 이른다 29) 또 나산면 초포리유적에서는 적석목관묘로

추정되는 매장시설에서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동과․동모․중국식동검․동부․동착․동사․정문경․간두

령․조합식쌍두령․쌍두령․병부동령․곡옥․지석 등이 출토된바 있고30), 함평읍 장년리 당하산유적

에서는 세형동검이 방형 토광에서 출토된 바도 있다.31)

이러한 무덤에는 당시의 지배 계급들이 묻혔는데 때로는 어린아이가 묻힌 경우도 있어

그 권력이나 지위가 세습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 남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고인돌 중에는 무게가 수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덮개돌을 가진 것도 있다 이는 . 많은 사람

들을 동원하여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려고 한 지배자가 등장하였음을

23) 임영진이승룡전형민 함평 ․ ․ , , , 2003. 『 소명 주거지』 전남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24) 최성락고용규이영철최미숙김미연힌미진 함평 ․ ․ ․ ․ ․ , - - , , 2003. 『 중랑유적Ⅰ 주거지 』 목포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25) 이영철이은정 함평 ․ , ,( ) , 2005. 『 고양촌 유적』 재 호남문화재연구원․익산지방국토관리청

26) 임영진 등 함평 , , , 2007. 『 성천리 와촌 유적』 전남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27) ( ) , , 2003. 재 호남문화재연구원․익산지방국토관리청 『함평 창서 유적』

28) 동신대학교문화박물관․전라남도․함평군, - - ,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전남 함평군 』

29) 이영문 전남지방 , , , 1993. 『 지석묘 사회의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30) 이건무서성훈 함평 ․ , , , 1988. 『 초포리 유적』 국립광주박물관

31) 최성락이헌종 함평 ․ , , , 2001. 『 장년리 당하산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제1장 _ 선사시대의 개관 251

말하는 것이다.

이 지배자들은 다른 집단과의 교역을 주관하면서 더 많은 사유재산을 축적하고 부를 독

점함으로써 자기 집단 내에서 권력을 증대시켜 갔다 그리하여 . 이제는 평등한 사회의 지도

자가 아니라 불평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지배자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한 ,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리고 . .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힘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배자들은 더 많은 재화를 얻기 위하여 자주 예리한 청동 무기로 약탈전쟁을 벌

였고 이는 , . 계급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들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더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 싸움에 진 집

단의 구성원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잡혀가서 노예로 부려졌다 노예의 . 발생은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진행된 생산력 발전의 결과였다 즉. , 그 이전 한 개인이 일하여 자신이 먹을 식량

을 겨우 마련하던 단계에서는 노예가 생겨날 수 없었다 따라서 .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은 있

었지만 사람이나 땅을 빼앗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 차츰 잉여 생산물이

늘어나자 이제 , 전쟁에 진 집단의 구성원을 잡아다 부림으로써 생산물을 정기적으로 편안하

게 얻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 큰 힘을 지닌 세력을 중심으로 지배와 복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큰 정치집단이 성장하였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 대해 자행하는 지배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이는 , 사회 내부에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낳게 하였다 이. 대립이 점점 날카로워지는 가운데 가진 자들이 사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좀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관리기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요구

에 부응하여 출현한 것이 바로 국가였다 국가는 . 상비군과 법 등을 통하여 공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한편 국가 , 기구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징세권을 관장하는 기관

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 국가는 당시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모순과 깊은 대립으로 분열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으나 외형상으로는 , 사회적 대립과 갈등에 질서를 부여하는 객관적 권

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 과정을 거쳐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25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제 절1 구석기시대 유적·유물

1. 함평 장년리 당하산 유적

최근 전라남도 서해도서지역과 영산강 유역에서는 여러 지표조사와 발굴 결과 함평 장년

리 당하산 유적을 비롯하여 신안 압해도( ), ( 세천․신기․갯모실․월포․목교․터골․반월․상촌 나주 화

성 도면동 영암 송내 연화 화정 유적 ․ ), ( ) . ․ ․ 등 많은 구석기유적이 확인 보고 ․ 되었다 32)

함평 장년리에 있는 당하산 유적은 함평만 일대의 해안 저습지 상류의 낮은 구릉지에 위

치한다 무안 영광간 . ~ 1999 서해안고속도로 공사를 계기로 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

사를 진행하였다 층위는 . 6 , 기반암과 표토층을 포함하여 지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구석기시

대 문화층인 1 ( ) 2 ( ) 1 문화층 중기구석기문화층 과 문화층 후기구석기문화층 은 각각 제 지층과 제

3 . 1 지층에 해당된다 문화층은 대체로 당하산의 정상부로부터 동서로 형성된 비탈과 계곡성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물의 , . 위치는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홈날을 비롯하

여 찌르개 양면찍개 긁개 주먹도끼 격지 , , , , . 2 ,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문화층에서는 돌날

세형몸돌 등 혼펠스제와 여러면석기, , , , 긁개 소형찍개 톱니날 홈날 등 석영제 석재를 이용

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33)

2. 함평 장년리 당마산 유적

당마산 유적은 당하산 유적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낮은 구릉상에 위치한

다. 현재 이곳은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혼펠스 격지 1점이 수습

되었다.

3. 함평 장교리 월봉 유적

32) 연세대학교박물관 한국의 , , , 2001, 226~230 . 『 구석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쪽

이외에도 최근 목포대학교 이헌종 교수의 지표조사에 의해 완도군 본섬 의 ( ) 1지점과 해남군의 8개 지점(구성․황조․덕곡․월

산 신평척북방죽 에서도 ․ ․ ․ ) . 구석기시대 유물산포지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33) 목포대학교박물관․한국도로공사, , 2001. 『함평 장년리 당하산 유적』

제 장2 선사시대 유적 · 유물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53

월봉유적은 월봉마을의 낮은 구릉상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곳 구릉에서는 석영제 암편과

자갈 등이 확인되며 찌르개 1 . 점이 수습되었다

4. 손불 석창리 대발 유적

석창리 대발유적은 바닷가에 연접한 마을의 낮은 구릉상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는 석영

제 석재를 대각선으로 박리한 몸돌 1 . 점이 수습되었다

5. 손불 석창리 석계 유적

석창리 석계유적은 석계마을에 이르기 전 바닷가에 연접한 낮은 구릉상에 위치하는데, 이

곳에서 석영으로 만든 돌날몸돌 1 . 점을 수습하였다

6. 손불 석창리 해창 유적

석창리 해창유적은 해창마을의 낮은 구릉상에 위치하는데 이곳에서는 , 석영으로 만든 돌

날몸돌 1 1 . 점과 긁개 점이 수습되었다

7. 월야 예덕리 만가촌 유적

예덕리 만가촌 유적은 만가촌 고분의 시굴 트렌치 하단 벽면에서 가로날 도끼 1점이 확

인되었다.

제 절2 중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유적·유물

1. 함평 장년리 당하산 유적

장년리 당하산 유적은 신석기 시대 유적뿐 아니라 이전 시기인 중후기․ 구석기 시대와 이

후 시대인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 유적에서 중석기 시대 및 신석기 시대 문화층은 표토에서 약 10㎝ 정도 하강된 지

점에서 확인되었는데 확인된 , ( ) 2 ( ) 2 , 유구는 노지 화덕자리 기를 비롯한 부석유구 깐돌 기 원

형유구 2 , , , , , , , , 기 석기제작소 등이었고 유물로는 석착 돌도끼 굴지구 원형긁개 측면긁개 칼

끌 갈돌 갈판 토기편 , , , .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신석기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보고 있다.

25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1) ( ) 노지 화덕자리

1 : . 호 유적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돌들이 대부분 불을 먹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2 : 4 , , 호 화덕자리 주변에서 돌도끼 저 다량의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여러 점의 격지가

출토되어 2 . 호 주변에서 석기 제작이 일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인접한 곳에

서 다양한 무늬의 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사용 흔적이 있는 도끼도 나왔다.

2) ( ) 부석유구 깐돌

깐돌유구는 방형과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였고 유구 , 안에서 신석기 시대의 토기와

석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바닥에 특별한 시설이 없이 편평하게 돌을 배치하였다. 이 깐돌유구

는 북한의 청호리 강원도 , , 춘성군 내평리 등에서 발견된 유적과 비교되며 그 기능은 집터

토기 굽는 장소 조리장소 , . 등 다양하다

3) 원형유구

특별한 시설은 없고 몇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4) 석기제작소

이 유적의 여러 곳에서 석기를 제작한 흔적을 볼 수 있고 한, 지점에는 석재를 다른 곳

에서 떼어 옮겨와 모아 놓았으며 주변에서 , , 여러 종류의 망치와 격지 돌도끼편들이 출토되었

다.

제 절3 청동기 시대와 초기철기 시대 유적 유물

1. 고인돌

1) 고인돌의 성격과 형식 분류

고인돌은 흔히 지석묘 라고도 ( ) . 支石墓 불리는 것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묘제이다 영국

의 그린 대뉴얼 이 (Glyn Daniel) , 고인돌은 남부 프랑스 리베리아의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

하여 인도를 거쳐 일본의 규슈 지방에 ( ) 九州 전파되었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으나 이는 잘못

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인돌 기수 의 ( ) 90% , 基數 가 한반도에 분포해 있고 또 한반도에 분포된

기수의 90% . 가 우리 전남에 분포해 있다 따라서 한반도 그도 전남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 하겠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55

그러면 우리 함평지역의 고인돌 분포상은 어떠할까 대체로 . 22 우리 함평지역은 전남의

개 시 군․ 가운데 그 분포 기수가 상위에 속한다.

하천이 있으면 평야가 전개되게 되고 들이 드넓으면 사람이 모여 살기 마련이다. 이러한

조건에 뒤질게 없다는 듯 남쪽에는 , , 영산강의 중상류가 흐르고 서쪽에는 지류인 함평천 동

쪽에는 역시 지류인 고막원천이 흐르고 있어 유역에 넓고 넓은 들이 전개되어 있다.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고 높지는 않으나 북쪽에는 산이 첩첩히 있어 산 짐승이 많으

며 더욱이 서쪽은 황해의 함평만이 천혜의 은전를 베푸는 곳, 고대인들에게는 더없이 교통

이 편리하고 물자가 풍부한 곳이어서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우리 함평군에는 9 . 개 읍면 전역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이미 군

내 전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당시 , 1 고인돌 기를 축조하는데 평균

200~300명의 연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함평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살았던가를 추산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고인돌의 모습은 대체로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을까 그. 형식에 따라 고인

돌은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 등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분류된다.

(1) ( ) 북방식 北方式

북방식 고인돌은 지상에 넓은 판석을 세워 그 안에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덮게 돌을 얹

어 놓은 형식으로 주로 한강 이북에 분포한다 이러한 . 형식과 모양이 비슷한 우리 함평군의

고인돌은 대체로 함평읍 대덕리 고양촌을 비롯해 자풍리 노송 신광면 , , 삼덕리 덕천 월야면

용암리 연화 월악리 , . 연당 고인돌 등을 들 수 있다

(2) ( ) 남방식 南方式

남방식 고인돌은 북방식과 달리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지상에 덮게 돌을 얹은 형식을 남

방식이라 한다 이. ( , ) 형식의 고인돌은 다시 고임돌이 있는 고인돌 과 支石式 有支石 고임돌

이 없는 고인돌 등 ( , ) . 蓋石式 無蓋石式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 고임돌이 ) ( , ) 있는 고인돌 支石式 有支石

이 형식은 고임돌의 형태에 따라 또 다시 다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① 1 ( ) 3~4 ( ) 식 고임돌이 式 ∶ 개로 석실 과 石室 고임돌이 독립된 형식으로 다른 고인

돌 보다 정제되고 외관상 거대한 것을 말하는데 전형적인 남방식이라고 한다 이. 형식에서

고임돌은 주형 과 ( ) ( ) , ( ) 柱形 괴석형 이 塊石形 있는데 주형 고임돌에는 대부분 판석상 板石狀 의

덮게 돌을 얹었고 괴석형의 , 고임돌에는 원형이나 방형의 크나 큰 괴석을 덮게 돌로 사용하

였다.

주형 고인돌의 대표적 예는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와 대전리 고인돌이며, 괴석형 고인돌은

전남의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함평군 월야면 용월리 월봉

마을 함평이씨 선산에 군집되어 있는 고인돌을 들 수 있는데 축조 연대는 주형 보다 약간

25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뒤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고인돌은 우리 군에 많이 분포해 있다 규모가 . 큰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

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함평읍 자풍리 신풍 고인돌 장축 ∶ 6.30m, 3.68m, 0.93m 폭 두께

△ 월야면 용월리 용두 고인돌 장축 ∶ 7.40m, 4.60m, 1.90m( 폭 두께 군내에서 가장

큼)

△ 대동면 향교리 중교 고인돌 장축 ∶ 5.40m, 5.00m, 2.40m 폭 두께

② 2 ( ) 식 밖으로 式 ∶ 보기에는 고임돌이 없이 석실 일부가 노출된 것으로 보이나

이 형식은 덮게돌 아래에 7~8개 또는 그 이상의 고임돌을 놓고 그 중 일부는 석실을 구성

하거나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 형식의 대표적 예는 나주군 봉황면 만봉리 고인

돌을 들 수 있고 우리 , , 군에서는 해보면 산내리 송산 함평읍 기각리 권씨 소유 산기슭 고

인돌 군에서 볼 수 있다.

나 고임돌이 ) ( , ) 없는 고인돌 蓋石式 無支石式

고임돌이 없는 고인돌은 개석식 무지석식 , . 또는 변형고인돌 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형식

의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많은 기수가 분포하고 있다.

우리 군은 지석이 있는 고인돌 기수에 비해 절반가량 분포해 있다 이. 형식의 고인돌은

다시 다음에서 보는바와 같이 다섯 가지로 세분해 볼 수 있다.

① 1 ( ) ( . ) . 식 석실을 式 ∶ 할석 쪼갠 割石 돌 이나 냇 돌로 쌓고 있는 형식

② 2 ( ) ( ) . 식 석실을 式 ∶ 판석 으로 板石 축조하고 있는 형식 일부 학자들은 이 형식을

북방식으로 분류함.

③ 3 ( ) 2 . 식 중의 式 ∶ 덮게 돌이 있는 형식 석실의 뚜껑을 마련하고 덮게 돌을 얹은

형식.

④ 4 ( ) ( ) . 식 지하 式 ∶ 석실에 아무런 시설이 없는 토광 인 土壙 형식

⑤ 5 ( ) 식 고임돌이 式 ∶ 덮게 돌의 주위를 돌아가며 일정한 형태가 없는 석실을 가

진 형식 대동면 . 향교리 향교에서 덕산리 아차동에 이르는 고인돌군

에 이 형식이 많다.

2) ( ) 함평군 고인돌의 분포 에 分布 따른 분석

(1) 읍면별 분포

함평군 고인돌의 읍면별 분포 상황을 보면 다음의 < 1 > 표 과 같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57

< > 표 함평군 고인돌 읍면 분포 상황

* : - 2003 훼손 소멸 ․ 기수 기존조사 최고기수 년 동신대박물관 조사 현존기수

* 1999년 이후 현존기수는 실측 불가 기수까지 포함됨

읍면

군집

번호

고인돌 유적지 이름

1984

함 평

군 사

1984년

광 주

박물관

1991년

리현석

조 사

1993년

목포대

박물관

1999년

함 평

군 사

2003년

동신대

박물관

훼 손

소 멸

기 수

비 고

1 기각리 기산초등학교 5 훼손 1 1 1 1 4

2 기각리 권씨 소유 산기슭 7 7 2 미확인 7

3 내교리 내대화 8 훼손 미확인 8

4 함평리 잣고개( ) 城峙 5 훼손 미확인 5

5 장년리 함평서교 앞 5 훼손 미확인 5

6 진양리 화동 3 훼손 미확인 3

7 진양리 각골 2 2 2 2

8 진양리 양림 2

9 대덕리 고양촌( ) 가 5 6 6 9 9

3

10 대덕리 고양촌( ) 나 6

11 만흥리 초동 4 4 4 이씨선산 앞

12 만흥리 국산 1 1 1 1 마을 뒤 구릉

13 만흥리 만년 1

14 자풍리 신풍( ) 가 7 5 12 5 5

2

4

15 자풍리 신풍( ) 나 6

16 자풍리 노송( ) 가 5 11 34 10 16 6

14 17 자풍리 노송( ) 나 14

18 자풍리 비아 11 12 12 12

19 수호리 송정 5 4 4 3 2

20 수호리 예동 1

소 계 조사 군집수 (20) 43 29 83 44 56 64 52 현존 군집수 (15)

21 죽장리 851번지 1 미확인 미확인 1

22 죽장리 장동( ) 담골잿등 2 5 5 1 1 1 4

23 죽장리 수철 1 미확인 미확인 1

24 북성리 차경 7 미확인 7

25 북성리 사기 8 8 8

26 양재리 장재동 2 2 2

소 계 조사 군집수 (6) 4 5 12 11 11 11 13 현존 군집수 (3)

27 송사리 삼천동 2 미확인 5 3 3 3 2

28 송사리 사간 2

29 보여리 보전 1 미확인 1 1 1 1

30 삼덕리 덕천 2 9 9 미확인 9

31 원산리 덕동 5 6 6 미확인 6

32 가덕리 오두산 앞 1 미확인 1

33 계천리 사천( ) 사동 1 미확인 2 2 2

34 동정리 냉천 1

35 백운리 신기 1

36 함정리 무송 3

소 계 조사 군집수 (10) 12 15 21 6 6 13 18 현존 군집수 (7)

25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읍면

군집

번호

고인돌 유적지 이름

1984년

함 평

군 사

1984년

광 주

박물관

1991년

리현석

조 사

1993년

목포대

박물관

1999년

함 평

군 사

2003년

동신대

박물관

훼 손

소 멸

기 수

비 고

37 마산리 표산 1 4 1 3

38 복천리 두동 1 1 1

39 학교리 영화촌 7 7 7 7

40 금송리 신곡제( ) 新谷堤 10 6 6 6 미확인 10

41 금송리 금산 10 미확인 10

42 월호리 기동 1 미확인 6 1 1 1 5

43 월호리 배야 5 1 1 1 4

44 곡창리 신곡( ) 가 14 17 17 17

45 곡창리 신곡( ) 나 2 2 2 2

46 곡창리 신곡( ) 다 12 12 12 12

47 곡창리 원곡창( ) 가 10

48 곡창리 원곡창( ) 나 7 1 1 6

49 금송리 방우동( ) 가 2 2 2

50 금송리 방우동( ) 나 6 3 3

51 금송리 반곡 1

52 석정리 동림( ) 가 5

53 석정리 동림( ) 나 1

54 석정리 동림( ) 다 7

소 계 조사 군집수 (18) 21 6 61 48 54 72 41 현존 군집수 (16)

55 엄다리 3 미확인 3

56 엄다리 성산 1

57 영흥리 월산 7 2 7

58 영흥리 송현 1

59 삼정리 벽류정( ) 가 3

60 삼정리 벽류정( ) 나 1

61 삼정리 수정동 1

62 송로리 노상 3

소 계 조사 군집수 (8) 3 7 2 17 3 현존 군집수 (7)

63 용성리 금성동( ) 가 5

11

64 용성리 금성동( ) 나 2

65 용성리 괴정 9

66 용성리 정창 1

67 덕산리 고산동 1 1 3

68 덕산리 아차동( ) 가

21 20 20 16 16

13

69 덕산리 아차동( ) 나 16 정확한 기수 미확인

70 덕산리 아차동( ) 다 3

71 향교리 상교( ) 중교 6 15 20 15 미확인 20 명교와 중첩된듯함

72 향교리 명교 20

73 향교리 동교 8 7 1 7 1

74 강운리 상강( ) 가 1 2 2 2 2

1

75 강운리 상강( ) 나 1

76 강운리 산장앞( ) 7 학송정 4 4 미확인 7

77 월송리 월송초등학교 12 12 12 12 12 12

78 월송리 시랑동 20 6 14 미확인 20

89 월송리 월송제 3 9 3 8 1

80 월송리 동암고개( ) 가 6

81 월송리 동암고개( ) 나 4

82 금곡리 금곡 1

83 금곡리 나막( ) 가 30 27 28 20 20 20 10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59

읍면

군집

번호

고인돌 유적지 이름

1984년

함 평

군 사

1984년

광 주

박물관

1991년

리현석

조 사

1993년

목포대

박물관

1999년

함 평

군 사

2003년

동신대

박물관

훼 손

소 멸

기 수

비 고

84 금곡리 나막( ) 나 6 7 정확한 기수 미확인

85 금곡리 나막( ) 다 7 10 10 3 3 1 9

86 상옥리 옥동( ) 가 12 9 8 5 5 5 7

87 상옥리 옥동( ) 나 4

88 상옥리 매동( ) 가 5

89 상옥리 매동( ) 나 9

90 백호리 백련 1

91 백호리 보화 1

소 계 조사 군집수 (29) 122 100 130 85 77 171 75 현존 군집수 (26)

92 구산리 광영( ) 가 20 25 25 24 24 2

6

93 구산리 광영( ) 나 17

94 구산리 원구산( ) 가 10 10 2 8

95 구산리 원구산( ) 나 3 6 6 6 6 6

96 구산리 내동 2

97 덕림리 덕림교 앞 5 5 미확인 5

98 덕림리 죽림( ) 가 2 2 3 3

5

99 덕림리 죽림( ) 나 1

100 덕림리 백양동 2 1 1 1

101 원선리 원선다리 앞 8 8 미확인 8

102 원선리 9 11 미확인 11

103 원선리 유촌 20 29 29 30 6 23 7

104 수상리 성재동 4

105 수하리 백인동 6 5 5 5 1

106 수하리 마산 4

107 수하리 화전 1

108 나산리 방하 2 2 소멸 2

109 삼축리 나산초등학교 옆 2 미확인 1 미확인 2

110 삼축리 동축( ) 가 5 5

6

111 삼축리 동축( ) 나 1

112 삼축리 백야산 1

113 삼축리 상장기 1

114 삼축리 상축 5

115 월봉리 점골 13 13 13 7 6

116 월봉리 안영동 13 12 12 8 8 8 5

117 월봉리 생동 9 11 11 소멸 11

118 월봉리 월평 6 7 7 소멸 7

119 우치리 신촌 18 19 19 10 9

120 우치리 계동 1

121 이문리 사정 4 4 5

122 용두리 오수 13 2 3 3 3 10

123 용두리 용수 12 12 12 12 12 12

124 용두리 선박( ) 가 2 4

2

125 용두리 선박( ) 나 2

126 초포리 입석 5 8 8 8 5 3

127 초포리 와락 7 7 소멸 7

128 신평리 신촌( ) 가 7 7

2

129 신평리 신촌( ) 나 7

130 구산리 삼구동 6 6 6

131 송암리 송암 1

소 계 조사 군집수 (40) 88 138 190 161 157 158 109 현존 군집수 (32)

26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1999 < > < > 년 함평군사 에 『 』 수록된 표 함평군 고인돌 읍면 분포 상황의 통계 수치와 위의 표 통계 수치가 일부

맞지 않은 부분이 더러 있다 이는 . 당시 통계수치를 잘못 파악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기존에 조사 정리된 각종 보

고서를 다시 면밀히 검토하여 그 수효를 정리였음을 밝혀둔다.

함평군의 고인돌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는 1982년 내고장 『 전통가꾸기』책자를 발간하면

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 34 260 때 조사 내용을 보면 개 군집에서 여 기가 확인되었는데

당시 조사는 지극히 미비하였다.

이어 조사를 다시 재개하여 1984 8 54 444 년 월에는 함평군사 에 『 』 개 군집 기를 확인 조

사하여 수록하였으나 이때도 마을 사람들의 제보 부족과 조사진의 인력부족 및 조사방법

미숙 등으로 인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전문지식을 겸비한 인력이 투입되어 함평군의 고인돌을 조사한 것은 1983 11 년 월

이었다 이때 . 1 국립광주박물관과 백제문화개발연구원의 조사진에 의해 약 개월간에 걸쳐 현

장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1984 9 ( 결과는 이듬해인 년 월『함평문화유적지표조사』 광주박물

읍면

군집

번호

고인돌 유적지 이름

1984년

함 평

군 사

1984년

광 주

박물관

1991년

리현석

조 사

1993년

목포대

박물관

1999년

함 평

군 사

2003년

동신대

박물관

훼 손

소 멸

기 수

비 고

132 상곡리 운곡 20 19 23 22 22 22 1

133 산내리 노적 7 9 12 12 이전(1) 11 1999 , 년 발굴 송산으

134 산내리 한골 15 17 20 16 16 이전(7) 13 로 이전 복원됨

135 산내리 송산 8 노적․한골, 이전복원

136 해보리 월현( ) 지곡 20 9 9 2 2 미확인 20 저수지 축조 시 훼손

137 금계리 저수지 12 12 수몰

138 금계리 금산 2 2 2

139 금계리 구수동 7 5 5 5 미확인 7

140 상곡리 상모 4 0 미확인 4

141 대창리 성대 3

142 문장리 하귀 1

소 계 조사 군집수 (11) 85 59 71 40 59 36 68 현존 군집수 (5)

143 용월리 용두( ) 가 25 6 6 13 19 1 23

144 용월리 용두( ) 나 1

145 용월리 월봉 15 15 15 16 16 16

146 월악리 연당( ) 돌뫼 2 6 6 4 6 4 2

147 용정리 용산 3 5 5 5

148 용암리 신성 4 7 4 4 4 3

149 용암리 연화 5 5 5 5 5 5

150 월계리 석계 11 12 14 15 15 15

151 정산리 내정 2 2 3

152 예덕리 발산 3 미확인 3 3 3 3

153 계림리 주곡 5 미확인 5

154 외치리 외치 2 2 1 1

155 양정리 진천( ) 眞泉 옆 5 미확인 5

156 양정리 석화산 2

소 계 조사 군집수 (14) 66 48 61 67 82 60 39 현존 군집수 (12)

총 계 조사 군집수 (156) 444 400 636 462 504 602 418 현존 군집수 (123)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61

관학술총서 제 집 라는 5 ) . 보고서로 발간되었다 이 보고서에 수록된 당시 함평군의 고인돌 현

황을 보면 43 400 . 개 군집 기였다

이어 1990 12 ( ) 년 월말까지 리현석 작고 에 의해 군내 고인돌 유적을 현지 답사하여 조사하

게 되었는데 그, 1991 2 ( 3 ) 결과는 년 월『전남문화재』 제 집 에「함평군의 고인돌․고분연구」

라는 논문으로 게재되어 발표되었다 이. 73 논문에 의하면 당시 조사된 함평군의 고인돌은

개 군집에서 636 . 기가 확인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 이듬해인 1992 , 년에는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는 1993 5 ( 30 ) 59 년 월 함평군의 『 문화유적 목포대박물관학술총서 』 제 책 이라는 보고서에 개

군집에서 조사 확인된 462 . 기를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조사진이 함평지역에

대한 자세한 지리를 파악하지 못해 미처 확인하지 못한 고인돌 유적이 많았다.

이에 함평군사편찬위원회에서 1995 6 , 년 월말까지 조사 정리된 유적을 확인하고 미 조사

된 유적을 추가 조사하여 1999 2 ( 1 ) , 년 월 함평군사 제 권 에 『 』 정리 수록하였는데 이 때의

조사 현황을 보면 75 504 . 개 군집에서 기가 현존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함평군의 고인돌에 대한 종합적인 최근의 조사는 2003년 동신대박물관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그. 9 ( ) , 결과는 같은 해 월 문화유적분포지도 전남 『 』 함평군 라는 책자로 발간되었고

이 책에 정리된 고인돌 현황을 보면 123 602 개 군집에서 총 기가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 정

리되어 있다 따라서 . 1982 (260 ) 지금까지 조사 확인된 함평군의 고인돌은 년 최초 조사 여기

가 이루어진 이후 현재까지 약 30 340 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사가 거듭되면서 약

여 기가 추가 확인되었고 더불어 ,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많은 수의 고인돌이 훼손 또는

파괴, . 소멸되었다

종합적으로 앞의 < >표 총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함평군의 고인돌은 현존 및 훼손․소멸 기

수를 모두 포함 총 1,020 , 41% 418 기가 조사 확인되었고 이중 에 해당하는 기가 훼손․파괴․

소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 행정구역별로 그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현존 훼손․소멸 기

수를 포함하여 나산면 267 , 246 , 116 , 113 , 104 기 대동면 기 함평읍 기 학교면 기 해보면 기,

월야면 99 , 31 , 24 , 20 . < 기 신광면 기 손불면 기 엄다면 기 순으로 나타났다 앞의 표 참조 >

이로 미루어 볼 때 청동기시대 함평지역은 나산면과 대동면지역에 좀더 강력한 집단의

무리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여 지고 이어 , , , 함평읍과 학교면 해보면 월야면 등지에도 이와

비슷한 세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반면에 손불면과 신광면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분포수가 현격히 적게 나타났는데 이는

이 지역이 산악지역으로 당시 맹수들의 피해가 심해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

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 20기 밖에 분포되지 않은 엄다면 지역의 경우는 함평천이 영산강

과 합류하는 하류로서 홍수의 피해가 심해 사람들이 살기를 꺼려했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

된다.

어쨌든 고인돌의 훼손 또는 파괴 소멸 , 등의 원인은 대체로 농경지 정리 및 도로 개설

등 주로 건설 현장에서 피해를 많이 입었고 특히 , 1993~1994년 사이에 피해가 매우 컸다

고 한다 이러한 . 현상은 함평군뿐만 아니라 전남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은 그 수효가

26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매우 많아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을 떠나 거의가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받고 있는 실

정이다 정부의 . 배려에 의해 고인돌 주위에 잔디를 심고 조경을 하여 보존대책을 세우지 않

는 한 갈수록 그 피해상은 늘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다행이도 . 최근 들어 여러 지자체에

서 고인돌이 대규모로 무리지어 있는 곳이나 또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것에 한해 문화재로

등록을 하고 이를 관광 및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하

겠으나 아직도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에 대한 관리대책은 매우 열악한 현실이어

서 안타까울 뿐이다 어쩔 . 수 없이 꼭 치워야할 여건이라면 관계기관에 신고를 하여 필히

발굴조사를 통해 기록으로 남긴 뒤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2) ( ) 수계 에 水系 의한 분포

다음의 < > , 그림 함평군의 고인돌 분포도를 보면 함평천과 고막원천 모두 냇가를 따라 양

옆으로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함평천과 고막원천을 가른 것은 천주봉에서 철성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으로 백제 때 함평

쪽은 굴내현 고막원천 ( ), ( ) . 屈乃縣 쪽은 다지현 多只縣 이었다

백제가 두 현을 두었던 것이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들 두 현의 세력권이 서로 다

른 소국 이었을 ( ) . 小國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 이 관계가 고분시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양 지역에 군집을 이루고 있는 대형 고분들이다.

< > 그림 함평군의 고인돌 분포도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63

함평군의 고인돌을 수계에 따라 분류해 보면 함평천 , 409 ( 40.10%), 수계에 기 분포비율

고막원천 수계에 592 (58.04%), 17 (1.67%), 2 (0.20%) 기 함평만 수계 기 황룡천 수계 기 로

고막원천이 약 200 . < > 여기가 많다 다음 표 참조

이는 청동기시대에 고막원천 유역이 함평천 유역 보다 번성했음을 보여 주는 물증이 아

닐 수 없다 그리고 . 양 수계 모두 상 하류 ․ 보다는 중류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중류 지역이 홍수의 피해도 적고 들이 넓어 살기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함평천 서쪽은 서해와 접하는 함평만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 함평만에 접하는 곳에는

고인돌이 손불면의 사기 장재 차경 , , 3 17 . 등 곳에 기가 있을 뿐이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당시 고인돌 문화를 이루며 함평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은 바다에서 수

렵하는 생활 보다는 농사를 지으며 때로는 민물고기를 낚고 야산에서 짐승을 사냥하는 생

활을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 > 표 수계에 따른 고인돌 분포

* ( ) + (2008. 12.31 ) 분포 기수 基數 ∶현존기수 훼손기수 현재

냇 이 름 분포기수 분 포 지 와 분 포 기 수 ( ) 基數

함평천 상류 소지류

동정천( ) 東井川

19 담골(5), 851 (1), (1), (5), (1), (1), (2), (2), (1) 번지 수철 삼천동 보전 가덕 사동 사간 냉천

함평천 상류 소지류

신광천( ) 新光川

19 덕천(9), (6), (3), (1) 덕동 무송 신기

함평천 중류 서( ) 西 40 기산 (5), (8), (5), (5), (3), (9), (2), (2), (1) 내대 잣고개 함평서교 화동 고양촌 각골 양림 예동

함평천 중류 동( ) 東 113 권씨선산(7), (13), (3), (32), (20), (20), 금성 고산 아차동 상․중교 명교

동교(8), (9), (1) 괴정 정창

함평천 하류 소지류

학교천( ) 鶴橋川

64 표산(4), (2), (7), (12), (20), (9), (10) 상강 학송 월송교 시랑동 월송제 동암

함평천 하류 소지류

엄다천( ) 嚴多川 상류

69 초동(4), (1), (1), (12), (34), (12), (5) 국산 만년 신풍 노송 비아 송정

함평천 하류 소지류

신곡천( ) 新谷川 상류

65 신곡 바윗골 바윗골 (17), (2), (12), (17), (7), (10) 고개 원곡창 영화촌 신곡제

함평천 하류 소지류

무안천( ) 務安川 중하류

20 엄다리(3), (7), (1), (4), (1), (3), (1) 월산 송현 벽류정 수정동 노상 성산

소 계 409

고막원천 상류 소지류

용암천,삼계천 상류

50 연당(6), (5), (7), (5), (15), (3), (3), (5), (1) 용산 신성 연화 석계 내정자 발산 계림 하귀

고막원천 상류 소지류

해보천( ) 海保川 상류

91 운곡(23), (12), (20), (20), (2), (7), (4), (3) 노적 한골 월현 금산 구수동 상모 성대

고막원천 중류 소지류

월봉천( ) 月奉川

94 나산초교(2), (13), (13), (11), (7), (19), (8), (7), (7), 점골 안영 생동 월평 신촌 입석 와락 동축

백야(1), (1), (5) 상장기 삼축

고막원천 중류 소지류

이문천,식지천

92 사정(5), (13), (12), (9), (25), (16), (4), (5), (2), 오수 용수 신촌 용두 월봉 선박 진천 석화산

계동(1)

고막원천 중류 소지류

평릉천 구( ) 원산천

111 광영(25), (16), (2), (5), (6), (2), (8), (6), 원구산 내동 덕림교 죽림 백양동 원선교 삼구

원선리 원선교와 ( , 11), (30) 유촌 사이 유촌

고막원천 중하류 99 두동 나막 (1), (47), (1), (14), (1), (1), (16), (6), (2), 가․나․다 금곡 매동 백련 보화 옥동 백인 방하

마산(4), (1), (4), (1) 화전 성재동 송암

고막원천 하류 55 금산 금계리 (10), (12), (6), (2), (6), (5), (1), (13) 저수지 기동 방우 가 방우 나 배야 반곡 동림

소 계 592

함평만( ) 咸平灣 수계 17 사기(8), (2), (7) 장재 차경

황룡천( ) 黃龍川 수계 2 외치(2)

소 계 19

합 계 1,020

26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3) ( ) ( ) 고인돌 군집지 와 群集地 주거지 住居地 관계

많은 사람들이 고대인들은 사자 도 ( ) ( ) 死者 생영 이 生靈 있어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생각에서 무덤을 주거지 곁에 두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리현석 작고 은 ( ) 조사한 함평군의 고인돌 군집지 여건을 분석해 본 결과 그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즉 함평군의 고인돌 중 인근을 묶어 현존 기수와 훼손 기수를 합하여 40기가 넘는 군집

을 가려보니 8 539 53% 곳이고 이들 군집지에 분포된 기수가 기로 함평군 전체 분포기수의

를 차지했다 다음 . < > 표 참조

이들 군집지를 골짜기에 있는 군집지는 “골 자를 ” 붙이고 평야지에 있는 군집지는

“ ” “ ” 골 자를 넣지 않고 구분해 보니 골 의 군집지가 5 59% 곳으로 군집지 분포 기수의 를

차지하는 318 . 기였다

골자를 붙인 곳 중 감악골 월송골 철성골은 , , 주위에 약간의 들이 있어 흡족하지는 않지

만 그런대로 주거지가 곁에 있을 수도 있으나 논골과 산안골은 현재도 함평군에서 오지 중

의 오지로 손꼽히는 곳인데 논골에 92 , 63 기 산안골에 기가 분포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

다.

그런데다 논골에는 10~20t 21~30t 10 그리고 가량으로 추산되는 고인돌이 각각 기씩이

며 산안에는 , 10~20t 14 , 21~30t 2 , 31~50t 1 추산 기 추산 기 추산 기 등이 있어 연인원

동원에 합당하는 사람이 살았을 것 같지도 않고 또 이 고인돌을 축조 할 수 있는 재력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주위에 거주할 여건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제시된 기록이 있어 주목되어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즉 1984 ( ) 년 함평군의 문화유적을 지표 조사한 서성훈 작고 의 보고서34)는 참고된다.

“한골 지석묘군 17 , . 기 송산에서 동진하는 개울물을 따라 협곡을 올라가면 또 한 무리의 지석묘가 나타난다

노적 지석묘로부터는 150m 서쪽에 위치하는데 어떤 연유에서 이 좁은 계곡에 많은 지석묘군이 무리 짓고 있는

가는 갑자기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계곡 주위에는 개석을 채취하기 용이한 채석지가 여러 곳에 보이고 있어 이

런 조건하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이 주장은 채석이 가능한 지역 내에 길지 를 ( ) 吉地 잡아 고인돌을 축조하였다는 말인데 이

렇게 생각한다면 경작면적이 없는 논골과 산안골에 고인돌이 군집된 이유가 성립 되는 것

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수 십리 수, 백리 밖에서 사는 사람이 묘지를 정하지는 않았을 것

으로 보이며 따라서 , 3km 2~3km 논골은 밖의 나산평야에 한골은 역시 밖의 상곡평야에

근거지를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인돌 . 축조는 주거지와 가까운 거리 관계보다는 거석

( ) 巨石 을 옮겨야하는 과중한 부담 때문에 채석이 가능한 지역의 길지와 관계가 컸으리라는

말이 된다.

34) 국립광주박물관 함평군 , , 1984. 80 . 『 문화유적 지표조사』 쪽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65

또한 산안골 3km ( ) . ( ) 밖은 모평 이 牟平 자리하고 있다 모평은 백제 때 다지현 多只縣 에

속하던 곳으로 조선조 초까지 현 의 ( ) ( ) . 縣 치소 였다 따라서 治所 산안골 고인돌묘의 주인공과

모평에 살았던 청동기인들과의 관계는 컸으리라 짐작된다.

< > 표 고인돌 군집지 여건 분석표

(4) 수습 유물

함평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 가운데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도한 사례는 최근에 들어서 몇

군데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 , 해보면 송산리 송산을 비롯하여 함평읍 진양리 각골 대동면 향

교리 학교면 , . 곡창리 신곡 고인돌 등이 바로 그러한 유적들이다

먼저 해보면 송산리 송산 고인돌은 1999 10 년 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유적으

로 해보면 상곡 구2 114, 87 , 12 119 한골 밭 번지 논 번지 일대와 송산리 밭 번지 일대가

영산강 농지개량조합에서 실시하는 농지개발택지사업의 일환인 저수지 축조 공사로 유적이

물에 잠기게 되자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 2 26 , 지역은 광주박물관 조사 때에 개군 기로 목

포대학교 박물관의 조사 때에 1 16 , 개군 기가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으나 이미 보고 된 운

곡 고인돌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인돌이 파괴 이동되어 , 2 . 기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인돌

군집지

명 칭

대상 지역명

분포

기수

수계( ) 水系 지리적 여건

농토 등

생활 여건

주변 여건

채석가능 지역여건

지역명

고인돌과

의 거리

감악골

군집지

함평읍 자풍리 58 함평천 소지류

엄다천 상류

감악산 계곡,

해발 0~90m

약간의

들이

있다.

1km 밖에

넓은 들이

있음

감악산

근( )100m 近

원( )1km 遠

월송골

군집지

대동면 강운리

향교리

57 함평천 소지류

학교천 상류

철성산이 3면을

에워싼 해발

40~70m

서쪽에

약간의

2km내에

넓지않은

들이 있음

월송제

근( )100m 近

원( )800m 遠

철성골

군집지

대동면 금곡리 48 고막원천 중류

철성산이 에워

싼 해발

40~50m 계곡

협곡

1 km

동쪽에

옥동평야

철성산

근( )300m 近

원( )600m 遠

논 골

군집지

나산면 원선리

구산리 일부

92 함평천 소지류

평릉천 상류

산골 오지 협곡

3km 밖에

나산평야

원선

앞 산

근( )500m 近

원( )2km 遠

산안골

군집지

해보면 산내리

상곡리

63 고막원천 중류

산내천 상류

산골 오지 협곡

3km 밖에

상곡평야

한골

옆 산

근( )300m 近

원( )1.5km 遠

아차동

군집지

대동면 덕산리

향교리

83 함평천 중류 저평지

남, , 서 북

넓은 들

대동,

함평평야

전개

향교약

마 등

근( )50m 近

원( )1.5km 遠

월 봉

군집지

나산면 월봉리

초포리 우치리

79 고막원천 중류

천주봉 남쪽

저평지

나산평야

남쪽의

넓은 들과

경계함

월봉제

옆 산

근( )500m 近

원( )1.5km 遠

용 두

군집지

나산면 용두리

이문리

월야면 용월리

59 고막원천 중류

오수산 밑

저평지

서, , 남 북

들과

경계

나산,

해보평야

오수

마을

뒷산

근( )500m 近

원( )1.5km 遠

계 539

26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발굴 조사한 2 6 , 1 기의 고인돌 외에 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는데 호 고인돌만 하부에 무덤 방

이 있었다 상석의 . 5 40 6~10 1 무게는 톤 이하부터 톤 이하까지 다양하며 주로 톤이며 호는

32 . 톤이다 출토유물은 한 점도 없었는데 이는 영산강 유역 지석묘의 일반적인 양상과 같았

다 이. 228-3 . 고인돌은 해보면 산내리 번지로 이전 복원하였다

함평읍 진양리 각골 고인돌은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는

데 덮개돌이 덥힌 1 ( ) 1 . 기와 하부의 널방 묘실 이 부분적으로 남은 기였다 이중 덮개돌이 덥

힌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교란되어 바닥 부위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고, 출토유물은 없었

다 이. . 고인돌들은 백곡마을 묘제공원에 옮겨 복원하였다

학교면 곡창리 신곡 고인돌은 ( )H H 주 레저에서 ․ 시행하는 골프장 건설공사지역에 포함되

어 훼손의 위험이 있는 신곡 고인돌 나군의 고인돌 1 2003 8 기를 년 월 전남문화재연구원에

서 발굴 조사하였다 지표조사에서 . 2 1 1 보고된 고인돌 기 가운데 기만 남아 있었으며 다른

기는 등산로 개설 중에 매몰되었다고 하였다 고인돌은 . 상석과 지석 일부가 지상에 노출되

어 있었는데 상석의 평면과 단면형태는 장타원형이고 장축방향은 , - . 북동 남서이다 규모는

장축 570 , 330 , 120 , 32 . 5 ㎝ 단축 ㎝ 두께 ㎝이고 무게는 톤 정도이다 상석 하부에 개의 지

석이 노출되었으나 묘실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 지석의 배치 상태에서 중앙에 방

형의 지석이 놓여 있는 점이 특징적이며 조사가 완료된 다음 이전 복원하였다.

이 밖에도 함평에 산재한 고인돌 주위에서 또는 파손된 고인돌 유적에서 각종 유물이 수

습되기도 하였다 즉. 1 나산면 구산리 광영 고인돌군이 있는 밭에서 마제석검 자루35), 초포

리 입석 고인돌군이 있는 밭에서 반달형 돌칼 1 , 1984 점 그리고 국립광주박물관 조사진이

년 지표조사를 할 때 초포리 와락 고인돌군 훼손지에서 1단병식 마제석검과 무문토기편36)

을 수습하였다.

한편 근년에 이르러 몇 군데서는 고인돌을 민간신앙으로 신성시하여 잘 보존한 예37)가

있고 함평읍 , 1 , 1 , 1 , 만흥리 국산 기 수호리 송정 기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 기 학교면 마산

리 표산 1 , 3 , 2 ( ) . 기 월야면 용암리 신성 기 연화 기 등에는 성혈 이 性穴 있다

(5) 고인돌 군집지 보존 현황

○ 함평읍 기각리 기산초등학교 고인돌군

원래는 5 1 . 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기산초등학교 교사 앞에 기가 남아 있다 상석의

형태는 방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북동 남서이다 상석의 - . 190cm, 크기는 장축 단축

180cm, 90cm . 두께 이다

35) 전체길이 36cm, 4cm, 8.5cm, 6.4cm, 1cm, 폭 손잡이 길이 손잡이 폭 두께 오르도식 돌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며

제작 상한 연대는 BC 3~4 ( ). 세기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36) 복원한 결과 모래알이 섞인 황갈색 점토질 태토로 구운 평저형 항아리.

37) 함평읍 자풍리 노송 길 옆 고인돌 촛불을 ∶ 켜고 소원 성취를 빌었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67

○ 함평읍 기각리 권씨 소유 산기슭 고인돌군

대동면사무소에서 군도 를 ( ) 郡道 따라 북쪽인 아차동

쪽으로 150m 1 6 가량 가면 오른편 밭에 열로 기가 배

열하고 1 1989 기는 길 왼편에 있었는데 년 도로를 확

포장하면서 5 2 기는 훼손하여 없어지고 기만 남아 있다

고 하였으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년 . 1983 광주박물

관 조사진이 실측한 바는 아래와 같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함평읍 내교리 내대화 고인돌군

1975 8 1982 년 김학휘의 고고학 지명표에 기가 있다고 수록되어 있으나 년 전통가꾸기편

찬위원회에서 조사한 바 1 . 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함평읍 함평리 잣고개 고인돌군

1975 5 1982 년 김학휘의 고고학 지명표에 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년 전통가꾸기편

찬위원회에서 조사한 바 모두 인멸되었다.

○ 함평읍 장년리 서교 앞 고인돌군

1975 5 1982 년 김학휘의 고고학 지명표에 기가 있다고 하였으나 년 전통가꾸기편찬위원회

에서 조사한 바 모두 인멸되었다.

○ 함평읍 진양리 화동 고인돌군

1975 3 1982 년 김학휘의 고고학 지명표에 기가 있다고 하였으나 년 전통가꾸기편찬위원회

에서 조사한 바 모두 인멸되었다.

○ 함평읍 진양리 각골 고인돌군

국도 24 100m 호선에서 각골 마을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하느리 쪽을 향해 쯤 가면 “정

훼손된 권씨소유 산록고인돌 모습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55 170 114 무 북북서-남남동 지금은 없음

2 298 230 150 유 동 - 서 〃

3 330 270 207 무 〃 현존( ) 現存

4 600 270 217 유 북동 - 남서 지금은 없음

5 276 155 80 〃 남 - 북 〃

6 230 220 168 〃 〃 〃

7 350 190 142 〃 북서 - 남동 현존

26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부인 밀양박씨묘 가”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그 묘 뒤에 2 . 5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원래 기

가 있었다고 하는데 3 . 기는 개간으로 그 흔적도 없다 현재는 서해안고속도로 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발굴이 이루어져 백곡마을 묘제공원에 옮겨 복원하였다.

처음 조사 목포대학교 ∶1986. 9. 3 ( ) 박물관 조사진 발굴이전 현황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유

장축 방향 개석 상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70 165 50 유 서북 - 동남 장방형

2 278 185 60 무 〃 타원형 30°정도 기울음

○ 함평읍 진양리 양림 고인돌군

양림마을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구릉의 중앙부에 1 . 2 기가 있다 원래 기였

으나 1 . 기의 상석은 마을 우산각 앞으로 옮겨 놓았다 상석의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장축방

향은 북서 남동으로 - 1 . 하부에 지석 개가 확인된다

○ 함평읍 대덕리 고양촌 고인돌군

가군 고양촌 ∶ 마을 뒤 새마을 창고 옆에 3기가 있는데 밭으로 개

간되면서 훼손이 심하며 개석이 땅에 묻혀 실측이 어렵다.

나군 : 1 200m 군에서 동북쪽으로 가량 떨어진 마을이 끝나는 지

점의 김양현 밭에 있으며 모두 6 2 . 4 기인데 기는 실측이 불가능하다

기는 판석 이 ( ) . ( ) 板石 개석을 바치고 있다 이 고인돌군은 석괴 石塊 로

된 고임돌을 쓰지 않고 지하에 판석으로 석곽을 짜고 개석을 얹은

것으로 표토의 유실로 석곽이 들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는 긴 벽에 쓰여 졌던 양벽석의 긴 판석들이 개석의 무게를

견디고 있지만 하부 구조는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 단벽의 마구리로 쓰였던 벽석들

이 이미 유실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600m 2 고인돌군의 남동쪽 지점에 기의 고분이 있

고 함평천 건너 동쪽에는 아차동 고인돌군이 마주하고 있다.

처음 조사∶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내부

구조

장축 방향 장축 방향 길이( ) ㎝ 폭( ) ㎝ 두께( ) ㎝

1 실 측 불 가

2 280 198 50 판석 서남 - 동북 장 방 형

3 320 210 50 〃 서북 - 동남 〃

4 실 측 불 가

5 280 150 50 판석 서남 - 동북 장 방 형

6 260 30 ? ? ? 장타원형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69

○ 함평읍 만흥리 초동 함평이씨 선산 앞 고인돌군

국도 24 600m 5 호선에서 초동으로 가는 길을 따라 쯤 가면 함평이씨 세조 이광봉의 묘

역이 오른쪽에 있고 고인돌 4 . 기가 길 왼쪽에 있다 개석이 모두 땅에 찰싹 붙어 있어 고임

돌의 유무는 알 수 없다.

처음 조사 년 ∶1990 나홍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형태 장축 방향 길이( ) ㎝ 폭( ) ㎝ 두께( ) ㎝

1 350 175 65 장방형 동 - 서

2 210 70 45 세모꼴 〃

3 195 140 40 〃 〃

4 150 147 20 타원형 동북 - 남서

○ 함평읍 만흥리 국산 고인돌

국산마을 뒷산 일명 , . 380 첫밭땅이라 부르는 놀이터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규모는 길이

㎝, 230 , 85 - 3 ( 폭 ㎝ 두께 ㎝며 장축 방향은 북동 남서이고 고임돌은 개가 있으며 성혈 性

穴) . 이 있고 개석의 형태는 마름모꼴이다

○ 함평읍 만흥리 만년 고인돌군

만년마을 동북쪽 200m 1 . 거리에 위치한 밭 가장자리에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

이며 하부에 지석 1 . 기가 보인다

○ 함평읍 자풍리 신풍 고인돌군

가군 : 장교리에서 자풍리로 들어오는 삼거리의 남

쪽 구릉상에 위치한다 일명 . 거북바위로도 불리며 현

재 밭으로 개간되어 일부가 매몰되거나 상석이 반파

되어 있다 년 . 1993 5 조사보고에 기로 되어 있으나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2 . 기만 확인된다 확인 가능한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동-서이

다 크기는 . 216 , 190 , 80 .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27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가군 고인돌의 규모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276 258 105 유 150° 장 방 형

2 328 198 118 무 90° 〃

3 실 측 불 가

4 630 368 93 유 40° 긴삼각형

5 462 112 46 무 75° 장 방 형

나군 : 6 . 신풍마을 서쪽 구릉 말단부에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북쪽에 위치

한 구릉 정상부에는 신풍고인돌 가군이 있다 기의 . 5 고인돌은 밭 가장자리에 모아져

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m 1 . . 거리에 다른 기가 있다 상석형태는 모두 타원형이다

나군 고인돌 규모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80 160 ? 확불 동 - 서 장타원형 지금은 없음

2 360 200 50 〃 〃 〃 〃

3 실 측 불 가 〃

4 290 150 80 확불 동 - 서 사 각 형 〃

5 230 170 30 〃 〃 타 원 형 〃

6 290 150 30 〃 〃 〃 〃

7 320 100 60 〃 〃 장타원형 〃

○ 함평읍 자풍리 노송 고인돌군

가군 : 6 . 만흥리 삼거리에서 돗재 쪽으로 가는 도로 왼쪽 고성이씨 묘역에 기가 있다

1993 , 7 6 . 년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전체 기로 되어 있으나 기만 확인된다 파괴 정도가 심하며

그중 1기에는 치성을 드리고 있다 가장 . 420 , 220 , 큰 상석의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150 . ㎝이다

가군 고인돌의 규모 처음 조사∶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나군 : 200m 노송고인돌 가군에서 돗재 쪽으로 가는 도로 지점 남쪽 밭과 산속에 모두

14 . - 2 . 기가 있다 군집방향은 북동 남서이며 열로 배열되어 있다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장

방형에 가깝고 장축의 방향은 남- . 북이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16 190 80 유 동 - 서 타 원 형

2 320 220 95 〃 〃 장 방 형

3 160 130 45 〃 〃 부정방형 지금은 없음

4 420 220 150 확불 〃 타 원 형

5 230 120 50 유 〃 부정타원

6 240 190 35 〃 〃 타 원 형 지금은 없음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71

나군 고인돌 규모 처음조사 년 ∶1991 리현석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40 120 40 유 남 - 북 마름모꼴

2 440 200 90 〃 남서-북동 장방형 정교한 판석 2매

3 550 350 30 〃 〃 타원형 고임돌에서 1m 밀려남

4 350 245 65 〃 〃 삼각형

5 250 200 50 〃 〃 〃

6 실 측 불 가 지금은 없음

7 실 측 불 가 〃

8 172 135 35 무 남동-북서 삼각형

9 430 365 200 확불 동 - 서 부정타원 ▽ 정자리 20곳

10 600 320 180 〃 남 - 북 사다리꼴

11 300 160 125 유 남서-북동 타원형

12 300 120 50 확불 〃 장타원형

13 430 235 115 무 〃 사다리꼴 판석 2매로 개석 지탱

14 330 220 70 유 동 - 서 타원형 〃

15 355 300 110 무 남 - 북 〃 지금은 없음

16 156 106 30 확불 북동-남서 장방형 〃

17 153 150 40 유 남 - 북 삼각형 〃

18 180 120 100 무 확인불가 사다리꼴 〃

19 실 측 불 가 〃

20 350 320 100 확불 남서-북동 확인불가 〃

21 290 175 40 〃 남 - 북 〃 〃

○ 함평읍 자풍리 비아 고인돌군

비아마을 남쪽 자풍제 곁에 ( ) 2 11 自豐堤 동서 방향으로 열을 이룬 기가 있으며 12호 고인

돌은 저수지 건너편인 남쪽 150m . 지점에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저수지를 만들 때 수기를 파괴하였다

고 한다 이. 1km ( ) 고인돌군에서 남서쪽 에 성재 가 城峙 있고 여기서

부터 능선을 타고 서쪽 보평산성과 이어지는 성의 잔적이 있다.

처음 조사∶1986.7.18 목포대학교 박물관

번 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220 180 70 유 동 - 서 원 형

2 200 150 70 〃 〃 사다리꼴

3 190 150 80 〃 〃 타 원 형

4 200 120 40 무 〃 삼 각 형

5 300 180 100 유 〃 장 방 형

6 140 100 40 〃 〃

7 150 90 40 무 남 - 북

8 150 100 60 유 동 - 서 삼 각 형

9 300 220 90 〃 〃 장타원형

10 230 150 50 〃 〃 반 원 형

11 실 측 불 가

12 150 120 50 유 동 - 서 방 형

27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함평읍 수호리 송정 고인돌군

송정마을 500m . 1986 못미처 마을길 왼쪽 과수원 입구에 있다 년 조사할 당시에는 훼손

되어 실측이 불가능한 것 1 5 1995 기를 포함하여 기가 있었으나 년 확인조사에서는 훼손된

1 4 4 기가 형적이 없어 기가 보존되고 있으나 모두가 인위적인 손상을 입었고 호는 성혈이

있다 현재는 . 3 . 기만 확인된다

처음 조사 년 ∶1986 3월 리현석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90 80 60 유 남동-북서 장방형

2 200 170 ? 확불 동 - 서 〃 개석이 지면과 밀착됨

3 180 120 40 〃 남동-북서 〃 〃

4 300 180 ? 〃 동 - 서 방 형 〃

○ 함평읍 수호리 예동 고인돌

예동 마을 중앙에 위치한 구릉 위에 1 . 기가 있다 주변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고인

돌의 상석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우며 장축 방향은 동 서로 - 3 . 개의 지석이 보인다

○ 손불면 죽장리 851번지 고인돌

1984 1 . 년 군사를 펴낼 때 기가 조사되었으나 현재는 파손되어 흔적도 없다

○ 손불면 죽장리 장동( ) 담골잿등 고인돌군

장동마을의 잿등에서 전 손불동초등학교로 갈리는 삼거리에 위치한다 년 . 1983 광주박물

관 조사진이 지표조사를 할 때는 5 . 1991 기가 있었다 그러나 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모두 파

괴하여 지금은 1 . 기만 남아 있다

처음 조사∶18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손불면 죽장리 수철 고인돌

1984 1 1991 년 함평군사를 펴낼 때 기가 조사되었으나 년 조사 할 때 이미 파괴되어 흔

적도 없었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07 174 84 무 65。 장방형 지금은 없음

2 370 280 130 유 135。 〃 〃

3 실 측 불 가 〃

4 276 190 60 무 177。 장방형 현존함

5 140 110 290 〃 〃 지금은 없음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73

○ 손불면 북성리 차경 고인돌

원래는 7 . 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 고인돌군

사기 마을의 이동준 소유의 밭에 8 . 기가 있다 고인돌 옆에는 이윤익과 그의 부인 묘가

있고 서쪽으로는 당산나무가 있으며 군집 방향은 북동 남서로 - 2 . 열을 이루고 있다

처음 조사∶1886.7.17.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500 200 90 확불 북서-남동 장방형 개석 반파

2 330 150 40 〃 남 - 북 〃

3 실 측 불 가

4 실 측 불 가

5 275 180 45 유 북동-남서 장방형 판석 보임

6 250 230 120 확불 〃 방 형

7 270 160 40 유 〃 장방형

8 250 230 25 확불 〃 장방형

○ 손불면 양재리 장재동 고인돌

장재동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00m 떨어진 영광군 군남면 옥실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민

묘 옆에 2 . . 기가 있다 고인돌 주위에 대규모 도요지군이 분포하고 있다

처음 조사 목포대학교 ∶1993 박물관 조사진

○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 고인돌

송계마을에서 삼천동으로 가는 고개 마루 예비군 훈련장내에 있다 원래 . 10 이곳에는 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나 예비군 훈련장과 산길을 넓히면서 훼손하여 현재는 3기

가 남아 있다.

처음 조사∶1986. 9. 20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35 150 55 유 북동-남서 타원형 개석 반파

2 220 95 50 무 〃 장방형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30 250 80 유 동 - 서 장방형 성혈 있음. 하부 노출

2 240 140 55 〃 〃 타원형 〃 . 개석 이동

3 240 170 50 유 〃 장방형 〃 .

27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신광면 송사리 사간 고인돌

사간마을 북쪽에 있는 민묘와 도로의 경계지점에 2 .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부정형이며

하부에 지석이 받쳐져 있다.

○ 신광면 보여리 보전 고인돌

장전 마을과 보전 마을 영광군으로 , 1 . 2 나누어지는 삼거리에 기가 있다 원래 기가 있었

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하나 1984 1 . 년 조사할 당시에도 기는 그 형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인돌 바로 앞에 높이 310cm, 160cm, 45cm 폭 두께 의 거대한 선돌이 서 있어 선돌이

무덤 표시의 역할도 했다는 설에 대해 수긍이 가게 한다 규모는 . 320cm, 200cm, 길이 폭

두께 45cm - , . 이고 장축방향은 남 북이며 개석형태는 장방형이다

○ 신광면 삼덕리 덕천 고인돌군

1983 6 9 . 년 최초 조사당시 기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원래 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

나 1988 6 . 년 농경지정리를 하면서 남아 있던 기도 땅에 파묻어 지금은 형적이 없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25 135 23 유 120° 장타원형 지금은 없음

2 210 180 60 무 125° 장 방 형 〃

3 310 240 110 〃 30° 타 원 형 〃

4 162 120 ? 확불 25° 장 방 형 〃

5 204 63 70 무 100° 마름모꼴 〃

6 206 118 ? 확불 90° 장 방 형 〃

○ 신광면 원산리 덕동 고인돌군

학동마을 앞에서 덕동으로 가는 사이길 오른편 하천에 있던 고인돌군으로 1983년 광주박

물관 조사진이 6 . 기를 조사하였다 하나의 고인돌 위에 “김해김씨효열비”가 세워져 비좌

가 되었으며 고임돌도 정연한 가장 큰 고인돌에는 “김해김씨세천( ) 金海金氏世阡 ”이란 비

가 세워졌었다 또. 4 . 호는 밭두렁에 기울어 묻혀있어 두께를 알 수 없었다 이 고인돌군은

이대로 수난이 끝나지 않고 1988 ( 년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중장비로 들어내어 신해선 新海

線) . 도로에서 학동으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에 탑식으로 쌓아 놓았다 내부구조는 물론 수습

된 유물도 없다 현재는 . . 확인할 수 없다

덕동의 고인돌 규모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90 100 86 무 북서-남동 장방형 지금은 없음

2 171 145 74 〃 남 - 북 사각형 〃

3 243 153 85 유 북동-남서 장방형 〃

4 180 100 ? 확불 ? ? 〃

5 실 측 불 가 〃

6 233 143 90 유 남 - 북 장방형 〃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75

○ 신광면 가덕리 오두산 앞 고인돌

1984 1 1995 년 함평군사를 펴낼 때 기가 조사되었으나 년 확인한바 흔적도 없이 인멸되었

다.

○ 신광면 계천리 사천( ) 사동 고인돌

함평읍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국도 23호선을 따라 가다 보면 사동과 가리 마을을 경계

짓는 70m . 2 의 구릉이 놓여 있다 고인돌은 이 구릉의 정상부에 기가 위치하며 일대를 밭으

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개석이 기울어져 있다 남북으로 . 늘어져 있는 고인돌 주변에 높이가

각각 3m, 1.5m 2 . . 인 선돌 기가 있다 옛 가리역으로 들어서는 입구다

처음 조사 년 ∶1993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 신광면 동정리 냉천 고인돌

동정리 냉천마을의 서쪽 구릉 말단부에 1 .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

축방향은 동 서이며 - . 하부에 잡석이 채워져 있다

○ 신광면 백운리 신기 고인돌

신기마을 남쪽 300m 1 . 지점에 위치한 구릉 말단부에 기가 있다 고인돌은 현재 고사한

노거수로 인해 상석이 훼손되어 있으며 하부구조 또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주변에 하부

구조로 판단되는 할석재 판석이 널려져 있다.

○ 신광면 함정리 무송 고인돌군

국도 23 400m 3 . 3 호선에서 무송마을로 들어가는 지점에 기의 고인돌이 있다 기의 고인

돌 중 북쪽의 고인돌은 도로와 농수로 개설공사로 인해 상석이 이동된 것으로 상석의 형태

는 타원형이며 하부가 묻혀있다.

○ 학교면 마산리 표산 고인돌군

표산에는 두 군데 고인돌이 있었다 한. 1 곳은 마을 동각 곁인데 반파된 기가 있으며 성

혈이 있다 또. 200m 한 곳은 동각에서 동쪽으로 농로를 따라 쯤 가면 언덕이 나오는데 농

로 오른편 언덕에 3 . 10 기가 있었는데 도로에 묻혀 있어 실측이 불가하다 이곳에는 원래 여

기 이상이 있었는데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그 자리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마을 . 뒷뫼에는 돌

방 독무덤군이 , . . 있다 현재는 마을 동각 곁이 것만 확인된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230 150 100 유 북동-남서 장 방 형

2 200 190 60 무 동 - 서 〃

27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처음 조사 년 ∶1991 리현석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30 110 85 확불 북동-남서 장방형 동각 곁

2 실 측 불 가

3 실 측 불 가

4 실 측 불 가

○ 학교면 복천리 두동 고인돌

1991 . 년 첫 조사를 했는데 두동마을 어귀의 텃밭에 위치하며 성혈이 여러 군데나 있다

고막천의 하류인 고막리와 복천리에서는 아직 이 고인돌만 발견 조사되었으며 고임돌이 받

혀있는 추정 무게 50t . 370cm, 250cm, 240cm 이상의 대형이다 규모는 길이 폭 두께 이

고 장축 방향은 동 서이며 개석 - , . 형태는 장방형이다

○ 학교면 학교리 영화촌 고인돌군

영화촌 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농로를 따라 200m쯤 가면 중앙 배수로가 나오고 배수로

건너 alt . 밋한 언덕에 민묘와 어울려 있다 대개의 고인돌이 개석이 땅에 밀착되어 있어 고

인돌의 유무를 확인하기 어렵다 함평군의 . 고인돌군 중 가장 개석이 작은 것으로 무리를 이

룬 고인돌 유적이다.

처음 조사 년 ∶1991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실 측 불 가

2 160 120 40 확불 남동-북서 방 형

3 210 140 20 〃 남서-북동 마름모꼴

4 340 240 30 〃 남동-북서 타 원 형

5 실 측 불 가

6 240 164 50 유 남동-북서 타 원 형

7 175 135 30 확불 〃 마름모꼴

○ 학교면 금송리 신곡제( ) 新谷堤 고인돌군

학교면 소재지에서 월호리로 가는 군도를 따라 가다가 죽정리 선암마을로 들어서는 삼거

리에서 동쪽으로 100m . 쯤 가면 오른쪽 길가 야산 비탈에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고인돌군은 1983년 광주박물관 조사진이 방우동 “ 고인돌군 으로 ” 표기하였으나 방우동

과는 1km 거리로 너무 멀고 또 방우동 앞에도 고인돌이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50m 곁에 있는 신곡제의 이름을 따 “ ” 신곡제 앞 고인돌군 이라고 새로 이름을 붙였다.

1995 6 30 , 1 년 월 일 확인 조사를 한 바 호는 민묘를 쓰면서 개석을 제자리에서 밀쳐 깨트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77

려 놓았고 5~6 1993 . 호는 년 도로를 확 포장하면서 ․ 역시 밀쳐 깨트려 놓았다 하부구조를

조사한 바도 없고 유물도 수습한 것이 없다 현재는 . . 모두 훼손된 상태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20 90 30 유 북동-남서 일부파손 현재 파손. 실측불가

2 310 220 40 〃 〃 장타원형

3 293 240 50 무 〃 마름모꼴

4 315 215 50 유 동 - 서 타 원 형

5 186 130 50 〃 〃 방 형 현재 파손. 실측불가

6 310 160 30 판석 〃 장 방 형 〃

○ 학교면 금송리 금산 고인돌군

금산 마을 동각 곁 텃밭에 있던 고인돌군인데 1984년 함평군사를 편찬하면서 조사할 때

10 . 1991 기가 있었다 그러나 년에 재조사를 할 때는 이미 모두 파괴되어 잔편까지를 말끔

히 치운 후였다 규모에 . . 대한 기록도 없다

○ 학교면 월호리 기동 고인돌

기동 마을 뒤 50m . 1986 8 15 지점인 나주임씨 문중산에 있다 년 월 일 목포대학교 박물

관 조사진이 첫 조사를 하였다 원래 . 6 1 기가 있었는데 묘역을 정리하면서 파괴하였고 기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1 . 기도 하부가 매몰되어 두께와 고임돌의 유무를 살필 수가 없다

규모는 길이 380cm, 100cm - . 폭 이고 장축 방향은 동 서이며 개석 형태는 장방형이다

○ 학교면 월호리 배야 고인돌

배야마을에서 망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위치하며 처음 조사할 당시에 5기가 있었

는데 그중 2 . 기만이 실측이 가능하였다 현재는 마을 사람들이“생애바우( ) 상여바위 ”라고

부르는 강운철 소유 대밭 안에 있는 2 1 . 호 고인돌 기만 남았다

처음 조사∶1986. 7. 6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40 80 실측불가 확불 동 - 서 장 방 형 지금은 없음

2 324 216 90 무 〃 〃 현존함

○ 학교면 곡창리 신곡 고인돌군 가군

신곡마을 세방저수지 제방 아래와 그 남쪽 가늠골이라 불리는 곳에 있다.

현재 3, 4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인돌은 그동안의 경작과정에서 파괴되거나 한쪽에 쌓

27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여 있다.

특히 9, 14 1990 호 고인돌은 년대 초에 이미 파괴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모도 . 17기의 고인돌이 타원형의 형태

로 배치되어 있다.

처음 조사 년 ∶1990 , 리현석 나홍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20 260 60 확불 동 - 서 부정원형

2 310 280 40 〃 〃 타 원 형

3 270 150 65 유 〃 방 형 일부 깨트린 흔적

4 230 200 35 확불 남 - 북 타 원 형

5 360 200 40 〃 〃 〃

6 405 250 60 〃 북서-남동 〃

7 650 485 90 유 남 - 북 〃

8 350 290 60 확불 〃 〃

9 270 260 40 〃 동 - 서 〃

10 380 250 70 유 남 - 북 장 방 형

11 490 340 55 〃 〃 〃

12 270 170 40 〃 〃 장타원형

13 170 130 35 확불 〃 〃

14 실 측 불 가

○ 학교면 곡창리 신곡 고인돌군 나군

신곡마을에서 월호제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150m 정도 가다보면 우측 산기

슭과 밭에 2 . 기의 고인돌이 있다 속칭 물바위골로 불리는 골짜기로 현재는 골프장 공사로

인해 주변이 10m . 정도 성토되어 있다

처음 조사∶1990. 12. 20 . . 리현석 나홍채 김희태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570 330 130 유 남 - 북 장 방 형

2 170 130 30 확불 서북-동남 방 형

○ 학교면 곡창리 신곡 고인돌군 다군

신곡마을에서 월호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정상에 12 . 1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중 기는

약 300m . - 2 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의 군집방향은 동 서이며 열로 배치도어 있

다 하부는 . . 대부분 도괴된 채 석관형 석실이 노출되어 있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79

처음 조사∶1990. 12. 20 . . 리현석 나홍채 김희태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300 190 60 유 동남-서북 장 방 형

2 440 370 90 〃 남 - 북 〃

3 300 130 40 〃 동 - 서 〃

4 250 180 50 〃 동남-서북 방 형

5 160 130 35 확불 동 - 서 〃

6 205 180 30 무 남 - 북 〃

7 400 330 100 유 동 - 서 타 원 형

8 200 130 40 무 〃 〃

9 220 150 35 〃 동남-서북 장 방 형

10 실 측 불 가

11 240 110 40 확불 동남-서북 장타원형

12 220 110 30 무 동 - 서 장 방 형

○ 학교면 곡창리 원곡창 고인돌군 가군

와우산 서쪽편에 형성된 골짜기를 따라 고인돌 10 2 . 여기가 열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가

장 큰 고인돌 상석의 장축방향은 동 서이며 - 233cm, 187cm, 30cm 크기는 길이 폭 두께

이다.

○ 학교면 곡창리 원곡창 고인돌군 나군

원곡창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50m 1 . 떨어진 박문현 씨 댁 뒤편에 기가 있다

이곳의 서쪽에는 원곡창저수지가 있고 주변에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상석의 . 형태는

방형이며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원래는 . 7 1986 7 5 기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년 월 일 목포대

학교박물관 조사진이 조사에 나섰을 때는 이미 6기가 농지를 확장하면서 파괴하여 자취가

없어졌다.

○ 학교면 금송리 방우동 고인돌군 가군

방우동 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 2 . 지점의 민묘와 밭 주위에 기가 있다 이곳은 낮은 구

릉으로 남동쪽으로는 구수저수지가 바라다 보인다.

처음 조사 년 ∶1993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150 130 50 유 북동-남서 타 원 형

2 200 190 60 〃 동 - 서 〃

○ 학교면 금송리 방우동 고인돌군 나군

학교리에서 월호리로 가는 도로 우측 산기슭에 있다 원래는 . 6기였으나 민묘 조성과 도

28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로공사로 인해 파괴되고 현재는 3 . - 기만 남아 있다 장축방향은 동 서로 산줄기의 방향과 일

치하며 2 . 열로 배치되어 있다

○ 학교면 금송리 반곡 고인돌

반곡저수지로부터 약 20m 1 . 떨어진 밭과 논 가장자리에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

형이며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 학교면 석정리 동림 고분군 가군

동림저수지 북쪽에 인접한 밭 가장자리 민묘 주변에 5 . 기가 있다 이곳 주변은 논과 밭으

로 경작되고 있고 고인돌은 동 서- 방향의 타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하부는 토사의 퇴적

으로 매몰되어 있다.

○ 학교면 석정리 동림 고분군 나군

동림 고인돌군 가군에서 농로를 따라 200m 1 정도 지점에 있는 민묘역 가장자리에 기가

있다 이곳은 . 배작골이라고 불리는 계곡의 중앙에 해당하며 이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

다 상석의 . . 형태는 타원형이다

○ 학교면 석정리 동림 고분군 다군

동림 고인돌군 나군에서 약 300m 7 . 지점에 구릉 정상부에 기가 있다 유적이 위치한 곳

은 석정리와 금송리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주변에는 김해김씨 선산이 있다. - 북서 남동

방향의 타원형으로 군집되어 있으며 민묘로 인해 상석 일부가 매몰되어 있다.

○ 엄다면 엄다리 고인돌군

1975 3 1995 년 최몽룡의 고고학 지명표에 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년 조사를 실시한

바 파괴 인멸되었다.

○ 엄다면 엄다리 성산 고인돌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에서 IC 400m 엄다면 별뫼마을로 가는 도로 지점의 동쪽 구릉 기슭

에 1 . . 기가 있다 고인돌의 서쪽은 엄다 농산물 저온창고가 있으며 남쪽은 송사천이 흐른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하부에 판석재의 지석이 받쳐져 있다.

○ 엄다면 영흥리 월산 고인돌군

월산마을 서쪽편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 ” 칠성바우 라고도 불린다 모두 . 7 - 기가 남

북 장축으로 2 3 4 . 열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기만 완전하고 나머지 기는 파괴되었다

처음 조사∶1989. 3 리현석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길이( ) ㎝ 폭( ) ㎝ 두께( ) ㎝

1 380 290 90 유 남 - 북 타 원 형

2 300 190 80 〃 〃 방 형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81

○ 엄다면 영흥리 송현 고인돌

송현마을에서 영천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부 남쪽 농로변에 1 .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

는 타원형으로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 엄다면 삼정리 벽류정 고인돌군 가군

벽류정 마을 동쪽 구릉 정상부에 3 . 기가 있다 고인돌 주변에는 경주정씨 묘가 있고 상석

의 형태는 타원형과 장방형이며 남 북- 1 . . 열로 배열되어 있다 상석 하부에서 지석이 확인된다

○ 엄다면 삼정리 벽류정 고인돌군 나군

벽류정 마을 입구의 다리에서 북쪽으로 30m 1 . 거리에 있는 농로 변에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상석의 남쪽부분 아래에는 배수로가 있다 지석 . 1 . 개가 확인된다

○ 엄다면 삼정리 수정동 고인돌

삼정리 산지촌마을에서 무안군 성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부 밭 가장자리에 1기가 있

다 고인돌 . . 주변의 낮은 구릉 일대는 밭과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

형으로 하부가 훼손되었으며 지석 1 . 개가 보인다

○ 엄다면 송로리 노상 고인돌군

송로리 노상마을에서 남서쪽으로 500m 3 . 떨어진 구릉 정상부에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

곳은 무안군과 군계를 이루는 곳으로 이 주위는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고인돌군은 남

- . 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밭작물 경작으로 인해 하부가 훼손되었다

○ 대동면 용성리 금성동 고인돌군 가군

금성마을 북쪽 산과 논 단애면에 11 . - 1 기가 있다 고인돌은 논과 밭 민가 뒤편에 남 북

열로 배열되어 있으며 경작과정에서 일부의 상석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 대동면 용성리 금성동 고인돌군 나군

정자동마을 남쪽 300m 2 . 2 - 지점 밭 가장자리에 기가 있다 기의 분포 방향은 남 북으로

상석 형태는 부정형이며 2 . 기 모두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 대동면 용성리 괴정 고인돌군

용성리 괴정마을 이완열 씨 댁 용성리 ( 724 ) 9 . - 번지 뒤 대밭에 기가 있다 남동 북서 방향

으로 2 . 열 군집되어 있다 이중 가장 큰 고인돌의 상석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북동 남서이다 크기는 - . 420 , 180 , 60 .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 대동면 용성리 정창 고인돌

정창마을에서 신정저수지 방향으로 가는 길 북쪽 50m 1 . 지점 밭에 기가 있다 기존에는

4 1 . - 기로 보고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기만 확인된다 상석 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동

서이다.

28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대동면 덕산리 고산동 고인돌군

마을 정자나무에서 동쪽으로 약 20m 1 , 떨어진 밭둑에 기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20m 1 , 1 정도 떨어진 지점 밭 가장자리에 또 기가 있으며 이명헌 씨 댁에 나머지 기가 있

다 이중 . 이명헌 씨 댁의 고인돌은 최근에 이명헌씨 소유의 밭에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

다.

○ 대동면 덕산리 아차동 고인돌군 가군

아차마을에서 외덕마을로 가는 도로변에 13 . 기가 있다 이곳은 고산봉에서 뻗어 내린 구

릉의 경사면으로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군집 . - 2 . 형태는 남동 북서 열이다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상석 방향은 남 북이다 크기는 - . 440 , 330 , 장축 ㎝ 단축 ㎝

두께 140 . ㎝이다

○ 대동면 덕산리 아차동 고인돌군 나군

아차마을 입구 밭에 있다 아차고인돌 . 200m 가군과 약 정도 떨어져 있고 위치한 지형

또한 같다 실측 . - 가능한 상석은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의 방향은 남동 북서이며 크기는 장

축 250 , 110 , 110 . ㎝ 단축 ㎝ 두께 ㎝이다

○ 대동면 덕산리 아차동 고인돌군 다군

아차고인돌 나군에서 서쪽으로 약 150m 3 . 거리에 있는 논둑에 기가 있다 이곳은 동쪽에

위치하는 고산동 방향의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작은 선상지를 이루는 곳으로 이 고

인돌이 위치한 곳은 남쪽 선단부에 해당한다 남 북 . - 1 1 방향 열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중 기

는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83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02 113 98 무 남 - 북

2 229 187 100 〃 〃

3 162 140 80 〃 서북서-동남동

4 206 135 85 〃 북동-남서

5 210 160 100 〃 동 - 서

6 245 230 120 〃 〃

7 355 314 65 유 서북서-동남동

8 445 340 180 〃 북서-남동

9 540 405 180 〃 북동-남서

10 290 180 100 〃 남 - 북

11 278 230 90 〃 북서-남동

12 345 178 66 〃 남 - 북

13 310 230 90 〃 북북서-남남동

14 180 130 40 무 〃

15 158 105 95 〃 북서-남동

16 405 250 140 유 동 - 서

17 355 270 105 〃 북북서-남남동 지금은 없음

18 200 105 144 〃 〃 〃

19 278 150 60 〃 〃 〃

20 210 130 110 무 동 - 서 〃

○ 대동면 향교리 상교 중교 ․ 고인돌군

함평향교를 중심으로 한 상교와 중교 마을의 개인 집안에 분포한다. 고인돌은 개인 집의

장독대로 쓰기도 하고 이웃집간의 담 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당 . 가운데 있는 고인돌은

개석의 높이까지 흙을 돋아 마당의 수평을 잡은 곳도 있다 향교 . 1 뒤에 있는 기는 추정 무

게 145 2 . 톤으로 군내에서 위에 해당하는 무게이다 이 고인돌군은 명교 고인돌군과 중첩되

어 조사된 듯하다.

28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처음 조사∶1986. 11. 2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610 450 220 유 동 - 서 장방형 추정무게 145t. 2 군내 위

2 380 240 120 〃 북동-남서

3 260 210 100 〃 동 - 서 타원형

4 실 측 불 가

5 230 145 50 확불 남 - 북

6 280 200 ? 〃 북동-남서

7 실 측 불 가

8 실 측 불 가

9 210 225 ? 확불 확인불가

10 470 250 180 유 북동-남서

11 305 230 100 확불 확인불가

12 530 270 110 유 동 - 서 타원형

13 실 측 불 가

14 450 420 260 확불 북동-남서 타원형 추정무게 118t. 3 군내 위

15 270 230 190 〃 〃

○ 대동면 향교리 명교 고인돌군

명교마을 뒷산을 중심으로 산 말단부에 20 . 2 , 기가 위치하고 있다 향교 내 기 박준기 씨

댁 1 , 3 , 5 , 3 , 6 기 박준구 씨 댁 기 김순용 씨 댁 기 서선권 씨 댁 기 이덕일 사당 내에 기인

데 대부분 마을 가옥 사이에 있어 훼손 정도가 심하다 마을 . 남서쪽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고인돌군의 군집 방향은 북동 남서이다 이중 - . 함평향교 명륜당 좌측에 있는

고인돌 상석의 크기는 장축 380 , 240 , 100 . ㎝ 단축 ㎝ 두께 ㎝이다

○ 대동면 향교리 동교 고인돌군

24 7 . 번 국도에서 나산면과 법흥사로 갈라지는 삼거리 남쪽에 기가 있다 이곳 지형은 비

교적 경사가 완만한 평지성 구릉이며 남동쪽으로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군집 방향

은 북동 남서이며 - 2 . 열로 배열되어 있다 가장 큰 고인돌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북동 남서이다 년 - . 1983 광주박물관의『함평군문화유적지표조사』에는 “상교

지석묘군 목포대학교의 함평군문화유적 ” 「 조사카드 에는 」 “중교지석묘군”으로 명칭이

되어 있으나 고인돌 , 소재지가 동교마을 지역이므로 “ ” 동교 고인돌군 으로 바로 잡았다.

1984 8 7 . 년 조사 때는 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85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강운리 상강 고인돌군 가군

상강마을 정류소 건너편 밭에 1 . 기가 있다 이곳은 일명 바우베기라 불리며 농경지가 넓

게 펼쳐져 있다 상석의 . - . 550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 방향은 북동 남서 이다 크기는 장축

㎝, 500 , 150 . 단축 ㎝ 두께 ㎝이다

처음 조사∶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강운리 상강 고인돌군 나군

상강마을 입구 밭에 있다 상강고인돌 . 가군보다는 약간 높은 구릉상에 위치하며 전방에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상석의 . - . 형태는 타원형이며 장축 방향은 동 서 이다 크기는

장축 270 , 130 , 60 . ㎝ 단축 ㎝ 두께 ㎝이다

○ 대동면 강운리 학송정 고인돌군

국도 24 . 1984 호선에서 학송정 마을로 들어서는 왼쪽의 밭에 있었다 년 함평군사 발간시

는 7 4 . 기가 있었고 광주박물관 조사진이 조사를 할 때는 기가 있었다

그러나 1989 . 년 농경지 정리를 할 때 모두 파괴하여 지금은 형적도 없다 광주박물관 조

사진은 현재는 “ 적은 수의 고인돌이 이곳에 있으나 주변 환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간 여러

기의 고인돌이 인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 하였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65 260 190 유 북북서-남남동 방 형 지금은 없음

2 367 250 110 〃 동 - 서 장방형 〃

3 380 290 110 무 북북동-남남서 타원형 〃

4 370 320 190 유 동 - 서 방 형 〃

5 310 300 75 무 〃 방 형 〃

6 220 155 95 〃 북북동-남남서 타원형 〃

7 210 145 80 〃 남 - 북 장방형 〃

8 250 190 100 〃 〃 장방형 현존함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90 150 42 무 남 - 북 장방형

2 480 480 130 유 북서-남동 방 형 보존상태 극히 양호

28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처음 조사∶1983. 11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강운리 송산 고인돌군

송산마을에서 국도 24 200m 호선을 따라 쯤 동쪽으로 가면 대동면과 나산면의 경계 지점

에 이르는데 고인돌은 도로에서 북쪽으로 약 10m 3 . 1984 지점에 기가 있었다 년 군사편찬

당시 조사 때 3 1984 . 기가 있었으나 년 말경 경지정리를 하면서 파손 인멸하였다

○ 대동면 월송리 월송초교 고인돌군

지금은 폐교된 월송초등학교 동암분교 운동장 서편에 12 . - 기가 있다 고인돌군은 동 서로

무질서하게 배열되어 있으나 주변을 정리하면서 상석 대부분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실측

가능한 2 1 - , 2 - . 기의 상석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 방향은 호가 동 서 호가 남 북이다

1 290 , 224 , 85 2 280 , 호 고인돌 상석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이며 호는 장축 ㎝ 단

축 264 , 85 . ㎝ 두께 ㎝이다

○ 대동면 월송리 시랑동 고인돌군

1983 20 . 1983 년 군사편찬을 위한 조사 때는 기가 있었다 년 광주박물관이 조사를 할 때는

실측이 불가한 1 6 1992 기를 포함하여 기가 있었는데 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모두 땅에 묻어

버려 지금은 형적도 없다 광주박물관 . . 조사진이 조사한 고인돌의 규모는 아래와 같다

처음 조사∶1983. 11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월송리 월송제 고인돌군

법흥사 동쪽의 구릉 정상부에 8 . 기가 있다 이곳은 월송리에서 상옥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부이다 고인돌의 . - . 8 3 분포 방향은 북동 남서이며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기 중 기

는 농로개설로 인해 구릉에서 언덕 아래로 이동된 것이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55 270 270 유 남동-북서 타원형 지금은 없음

2 245 210 130 〃 〃 방 형 〃

3 225 150 90 〃 북동-남서 타원형 〃

4 145 120 45 무 동 - 서 장방형 〃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참 고 길이( ) ㎝ 촉 ( ) ㎝ 두께( ) ㎝

1 260 150 35 무 동 - 서 지금은 없음

2 227 138 45 〃 〃 〃

3 213 198 56 〃 〃 〃

4 224 165 75 〃 〃 〃

5 440 340 90 〃 〃 〃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87

○ 대동면 월송리 동암고개 고인돌군 가군

동암 마을에서 금곡리 나막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 도로변에 6 . 4 기가 있다 이중 기

는 도로 확장공사 때 이동되었다 호 . 1 258 , 254 , 고인돌 상석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88 . (1984 ) ㎝이다 함평군의 『 문화유적 지표조사 년 』 광주박물관 에는“남악 A군 으로 ” 정리

되어 있다 호 . 5 1 . 곁에 돌방고분 기가 있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월송리 동암고개 고인돌군 나군

동암마을에서 금곡리 나막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200m 4 . 지점 밭 가장자리에 기가 있다

이 고인돌의 분포방향은 남 북이며 - . 상석의 형태는 부정형이다

○ 대동면 금곡리 금곡 고인돌

금적동 마을 입구 보호수 아래에 1 . 기가 있다 이곳의 남쪽으로는 나산천이 흐르고 있으며

이 주변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상석의 . . 형태는 방형으로 하부가 매몰되어 있다

○ 대동면 금곡리 나막 고인돌군 가군

나막마을 앞 도로가에 20 - 1 . 6 기가 동 서 열로 배열되어 있다 민묘와 혼재되어 있으며 기

정도에서는 지석이 확인된다 원래는 . 30 , 기가 있었으나 도로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다고 하며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동 서이며 - 480 , 크기는 장축 ㎝ 단축

260 , 110 . 1983 ㎝ 두께 ㎝이다 이 고인돌군은 년 광주박물관 조사진이 조사를 할 때는 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65 114 25 무 남 - 북 지금은 없음

2 257 175 168 유 〃 〃

3 230 135 40 무 〃 〃

4 240 195 60 〃 〃 현존함

5 258 254 88 유 〃 〃

28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측 불가능한 4 27 , 1991 1 28 기를 포함하여 기가 있었고 년 마을 뒤에 있는 기를 추가하여 기

였다 이. 1988 고인돌군은 군내에서 군집기수가 제일 많은 고인돌 유적이며 년 농경지 정리

사업 때 모두 훼손될 위기에 처했으나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에서 건의하여 설계를 변경 보

존하게 되었다 호는 . 23 100m 24 300 m 거리인 금곡분교 옆 밭에 있으며 호는 여 떨어진 마

을 뒤에 있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금곡리 나막 고인돌군 나군

나막마을 동편 끝 함평나씨세적비와 함께 있으며 나막 고인돌 가군과는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동 서 . - 1 . 열로 배열되어 있으며 일부 상석은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북서- . 300 , 280 남동이다 크기는 장축 ㎝ 단축

㎝, 50 1 . 두께 ㎝이며 지석 개가 확인된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60 120 40 무 동 - 서 지금은 없음

2 230 185 75 〃 〃 〃

3 258 173 110 유 〃 〃

4 210 150 80 무 〃

5 380 295 116 유 〃

6 330 190 78 〃 〃

7 330 160 129 〃 〃

8 410 240 115 무 〃

9 220 160 70 〃 〃

10 290 154 110 유 〃

11 330 238 110 〃 〃

12 480 260 110 〃 〃

13 490 230 115 〃 〃

14 286 200 50 〃 〃

15 255 200 100 〃 남 - 북

16 250 146 70 무 동 - 서

17 220 130 70 〃 〃

18 240 180 70 〃 〃

19 200 140 80 〃 〃

20 250 210 90 〃 〃

21 290 160 85 〃 〃

22 150 110 30 〃 〃 지금은 없음

23 299 252 75 유 〃

24 420 250 150 〃 남 - 북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89

○ 대동면 금곡리 나막 고인돌군 다군

1999년 함평군사 에 『 』 ‘금곡분교 앞 고인돌군 으로 ’ 소개된 이 고인돌군은 현재 폐교

된 금곡분교 앞에 1 . 1988 10 기가 있다 전언에 의하면 년까지 금곡분교 앞 유병삼의 밭에

기가 있었으나 1988 1 . 년 농경지정리를 하면서 논가에 기만 남아있게 되었다 상석의 크기는

장축 380 , 228 , 150 . ㎝ 단축 ㎝ 두께 ㎝이다

1983년 광주박물관 조사진의 보고서에 “2 - 열로 배치된 이 고인돌들은 동 서에 축을 두

고 있으며 배치상태나 개석의 축은 모두 동서로 전개되고 있는 계곡의 방향을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개석은 개답과 경작 과정에서 흙무덤을 이루고 있거나 일부 파괴를 입고 있어서

실측이 불가능하다 상태가 . 1 비교적 좋은 기는 개석 아래에 적석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

는 후대에 경작으로 인한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 대동면 상옥리 옥동 고인돌군 가군

옥동 마을의 맨 북쪽인 윤병관의 집 뒤안과 밭에 거의 1 . 12 열을 이루어 배치한다 원래

기가 있었다고 하나 1983 8 . 1995 년 광주박물관 조사진이 조사를 할 때는 기가 있었다 년

재확인 결과 3 5 . 기가 또 파손 인멸되어 지금은 기가 남아 있다

처음 조사∶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대동면 상옥리 옥동 고인돌군 나군

옥동 고인돌군 가군에서 매동 마을로 가는 도

로 동쪽 논과 농로 변에 4 . 기가 있다 고인돌은

농로를 사이에 두고 북서쪽과 남서쪽에 각각 2

기씩 있는데 남쪽편 고인돌은 농로 개설로 상석

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상석의 . 형태는 부정

형으로 북쪽에 위치한 1 6m 기는 크기가 가 넘는

대형이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403 310 90 유 남 - 북 장방형

2 312 169 65 무 동 - 서 〃

3 329 215 75 〃 〃 〃

4 269 210 99 유 〃 타원형

5 546 288 140 〃 〃 장방형

6 287 176 60 무 남 - 북 지금은 없음

7 346 230 65 〃 〃 〃

8 216 145 70 〃 북동-남서 〃

29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대동면 상옥리 매동 고인돌군 가군

옥동에서 매동마을로 가는 도로 우측에 4 , 150m 1 기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떨어진 밭에

기가 있다 가장 . - . 큰 고인돌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북동 남서이다 크

기는 장축 690 , 420 , 180 . ㎝ 단축 ㎝ 두께 ㎝이며 상석 곳곳에 채석 흔적이 있다

○ 대동면 상옥리 매동 고인돌군 나군

매동 고인돌군 가군에서 북쪽으로 약 300m 9 정도 떨어진 정홍채 씨 소유의 밭에 기가

있다 고인돌은 . - 3 50m 5 4 남 북 방향으로 열 군집되어 있으며 약 간격을 두고 기와 기가

떨어져 있다 호 . 1 - . 고인돌 상석 형태는 방형에 가까우며 장축방향은 남동 북서이다 크기는

장축 400 , 340 , 90 . ㎝ 단축 ㎝ 두께 ㎝이다

○ 대동면 백호리 백련 고인돌

백련동마을 입구 소나무로 이루어진 방풍림 사이에 1 .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으

로 하부가 매몰되었다.

○ 대동면 백호리 보화 고인돌

보화마을 입구 도로변에 1 . . 기가 있다 고인돌 주위에는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원래

는 여러 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마을도로 개설공사와 농지정리로 인해 매몰되거나 파괴되

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 - . 고인돌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남동 북서이다

크기는 장축 260 , 178 , 90 .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구산리 광영 고인돌군 가군

광영마을 입구 밭 가장자리에 2 . 7 기가 있다 원래 기였으

나 개답공사와 수로공사로 인해 모두 파괴되었고 상석만 한

곳에 쌓여져 있다 상석의 . 2 형태는 기 모두 타원형에 가까

우며 방향은 북동- . 270 , 170 남서이다 크기는 장축 ㎝ 단축

㎝, 60, 90 . 두께 ㎝이다

○ 나산면 구산리 광영 고인돌군 나군

광영마을 동쪽 진주정씨 제각 번지 앞밭에 (29 ) 17 - 2 . 기가 동 서 열로 군집되어 있다 고인

돌의 군집 형태는 구릉 말단부의 평지상에서 나산천으로 흐르는 지류의 방향과 일치한다.

고인돌 대부분은 지석이 드러나 있으며 뒤에는 광영 고분군이 위치한다 가장 . 큰 상석의 형

태는 장방형에 가까우며 방향은 동 서 크기는 - , 460 , 190 , 70 .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91

처음 조사∶1983. 11 광주박물관 조사진

○ 나산면 구산리 원구산 고인돌군 가군

원구산마을 북동편 입구에 6 . 5 , 기가 있다 문인현 씨 밭과 열녀비 주변에 기가 있고 최상

철 씨 집안에 1 . - 기가 있다 군집 방향은 남 북이며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남 북이며 - 300 , 193 , 63 .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구산리 원구산 고인돌군 나군

원구산에서 내동마을로 넘어가는 마을 북서편 소로에 위치한 노인창 씨 댁에 2기가 있

다 원래는 . 10 2 기로 보고되었으나 모두 개답공사와 경지정리로 소멸되고 현재는 기만 확인

다 확인 . - 315 가능한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남 북이며 크기는 장축

㎝, 130 , 60 . 단축 ㎝ 두께 ㎝이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426 186 108 유 동 - 서 장방형

2 165 84 40 무 〃

3 130 86 35 〃 남 - 북 지금은 없음

4 230 190 45 유 동 - 서

5 208 130 38 무 〃

6 200 148 54 〃 〃

7 250 138 90 유 〃

8 120 100 25 무 〃

9 200 150 25 유 〃

10 230 125 70 〃 〃

11 185 160 30 무 〃

12 310 152 40 유 〃

13 190 158 40 〃 〃

14 310 142 80 〃 〃

15 245 195 62 〃 〃

16 460 185 70 〃 〃

17 275 170 45 〃 〃

18 405 240 64 무 〃

19 245 160 50 유 북서-남동 장방형 2군집

20 300 200 60 확불 북동-남서 장방형 〃

29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90 195 62 무 65° 마름모꼴

2 190 155 58 〃 95° 부정장방형 지금은 실측불가

3 202 140 60 유 5° 장타원형 〃

4 171 146 60 〃 80° 방 형 〃

5 263 191 64 〃 20° 마름모꼴 〃

6 232 146 93 〃 170° 장 방 형 〃

○ 나산면 구산리 내동 고인돌군

내동마을 뒤 구릉의 민묘와 밭에 각각 1 . 기씩 있다 민묘 뒤에 있는 고인돌의 상석 형태

는 삼각형에 가깝고 장축방향은 동 서이며 - 194 , 167 , 62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이

다.

○ 나산면 덕림리 덕림교 앞 고인돌군

현 덕림교에서 서쪽으로 200m ( ) 5 지점의 냇가에 지금은 배수로 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1993 . 년 경지정리 때 폭파 인멸하였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나산면 덕림리 죽림 고인돌군 가군

마을 당산나무 좌우 밭에 모두 5 . 기가 있다 가장 큰 상석의 모양은 타원형에 가까우며

크기는 장축 250 , 160 , 60 .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덕림리 죽림 고인돌군 나군

죽림선돌에서 서쪽으로 40m 1 . - 정도 떨어진 곳에 기가 있다 상석의 방향은 동 서 방향이

고 크기는 장축 170 , 120 , 80 . ㎝ 단축 ㎝ 두께 ㎝이다

처음조사∶1983. 11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80 150 40 무 북동-남서 장방형 당산나무 곁에 있음

2 280 215 28 〃 〃 타원형

3 215 98 65 〃 〃 장방형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40 250 112 무 북동-남서 지금은 없음

2 172 140 25 〃 동 - 서 〃

3 180 92 56 〃 〃 〃

4 265 160 110 유 〃 〃

5 224 117 100 무 〃 〃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93

○ 나산면 덕림리 백양동 고인돌

백양마을 입구의 국도 24 6 호선 도로 곁에 원래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그런데 . 1984 4 년 국도를 확장하면서 기를 파손 인멸하였

고 24 2 1990 12 1 호선 끝집 밭에 기가 남았었는데 년 월에 기를

파손 인멸하여 지금은 1 . 230 , 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길이 ㎝ 폭

210 , 50 , - ㎝ 두께 ㎝이며 지석은 없고 장축방향은 북서 남동이

다 상석 . . 모양은 원형에 가깝다

○ 나산면 원선리 원선교 앞 고인돌군

원구산에서 북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원선교가 나온다 다리 . 8 - 앞에 기의 고인돌이 남 북

1 1993 열상에 축을 두고 하천과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었는데 년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모

두 제자리에 묻어버려 지금은 형적이 없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 나산면 원선리 고인돌군

1983 200m 11 . 년 조사 당시 원선 다리에서 북쪽으로 지점에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당시

2 . 1993 기는 경작으로 인해 심한 손상을 입어 실측이 불가능 했었다 그러나 년 농경지 정리

를 하면서 제자리에 모두다 묻어버려 지금은 형적이 없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177 119 50 무 140° 장 방 형 지금은 없음

2 205 156 50 유 145° 부정타원 〃

3 176 130 38 무 34° 장타원형 〃

4 128 74 44 〃 145° 장 방 형 〃

5 230 174 78 〃 55° 〃 〃

6 289 180 90 〃 120° 삼 각 형 〃

7 271 214 81 유 135° 장타원형 〃

8 164 155 45 무 85° 타 원 형 〃

9 200 150 35 유 145° 장 방 형 〃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15 144 69 무 165° 장 방 형 지금은 없음

2 132 116 확인불가 확불 140° 〃 〃

3 190 103 〃 〃 140° 〃 〃

4 185 156 47 무 165° 타 원 형 〃

5 246 155 50 〃 145° 부정타원 〃

6 272 155 49 〃 145° 장 방 형 〃

7 202 165 49 〃 145° 부정타원 〃

8 313 182 75 유 85° 긴삼각형 〃

29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나산면 원선리 유촌 고인돌군

1983 30 23 년 조사시 유촌마을 앞 논에 기의 고인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나 현재는 기

만 확인된다 호 . 29 고인돌 앞에는 상석과 같이 직육면체로 다듬은 판석이 놓여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조사자였던 . 서성훈은 “지석묘

에 제례와 같은 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라고 .” 하였다. 군내의

고인돌 중 이러한 예는 이 고인돌에서만 나타난다 년 . 1993 농경지 정리를 하면서 여러 기

가 땅에 묻혀버렸다 마을의 . 60m ( ) 배산인 표고 의 앵소산 남록에 鶯巢山 위치한 연유로 마

을 주민들은 이 고인돌군을 ‘꾀꼬리똥 이라 ’ 부르고 있으며 마을은 일명 ‘선독골’이라

고도 불린다.

30 . 호 고인돌은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추가 조사한 것이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유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334 253 112 유 135° 부정타원 지금은 없음

2 260 163 54 무 100° 장 방 형 〃

3 203 145 50 〃 50° 삼 각 형 〃

4 240 150 110 유 155° 장타원형 〃

5 220 114 50 무 105° 장 방 형 〃

6 199 170 55 〃 160° 산 각 형 〃

7 301 200 78 유 178° 장타원형 〃

8 358 145 57 무 170° 긴 장방형 〃

9 200 162 59 〃 160° 원 형 〃

10 380 240 68 〃 170° 장 방 형 〃

11 267 215 50 〃 150° 부정원형 〃

12 165 140 50 〃 160° 장 방 형 〃

13 240 205 55 〃 34° 마름모꼴 〃

14 355 225 90 유 65° 장타원형 현존함

15 290 207 100 무 145° 〃 〃

16 220 195 50 〃 60° 〃 〃

17 230 115 85 〃 60° 장 방 형 지금은 없음

18 실 측 불 가 〃

19 실 측 불 가 〃

20 170 92 확인불가 확불 160° 〃

21 175 138 55 무 160° 부정삼각 〃

22 225 72 50 〃 165° 〃

23 실 측 불 가 〃

24 215 175 확인불가 확불 90° 원 형 〃

25 실 측 불 가 〃

26 160 94 확인불가 확불 90° 〃

27 180 116 80 무 115° 부정원형 현존함

28 268 245 120 유 90° 마름모꼴 〃

29 270 220 110 〃 20° 장 방 형 〃

30 340 280 120 〃 45° 타 원 형 지금은 없음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95

○ 나산면 수상리 성재동 고인돌군

성재동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m 4 . 떨어진 곳에 모두 기가 있다 이곳은 남동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려오는 구릉의 말단부로 그 주변은 밭과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3기는

구릉 위 민묘와 혼재되어 있으며 또 다른 1기는 구릉 하단 마을 진입로 논 가장자리에 있

다 군집 . - . 형태는 남동 북서 방향이며 상석의 형태는 대부분 타원형에 가깝다 가장 큰 상

석의 장축 방향은 남동 북서이며 - 250 , 240 , 146 . 크기는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수하리 백인동 고인돌군

나주시와 경계인 수하교를 지나 도로변 이순용 씨의 밭에 5기의 고인돌이 불규칙하게 군

집되어 있다 그리고 . 400m 1 (6 여기서 북동쪽으로 거리인 김영중 씨의 목장 목초지에 기

호 가) 1999 . 있다고 년 함평군사에는 정리하였으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처음 조사 년 ∶1984 리현석

○ 나산면 수하리 마산 고인돌군

마산마을 동쪽 100m 4 . - 지점의 논과 밭둑에 기가 있다 이 고인돌군은 동 서 방향으로

분포되어 있고 대부분 논과 밭의 가장자리에 묻혀 있으나 일부 지석이 확인되기도 한다. 실

측 가능한 1 - , 기의 상석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장축 방향은 남동 북서이며 크기는 장축

170 , 120 , 90 .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수하리 화전 고인돌

나산 문평간 ~ 825 1 . 번 지방도에서 마산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 북서쪽 구릉에 기가 있다

‘ ’ 무내미고개 로도 불리며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는 나산천이 흐른다 이. 고인돌의 상석

일부는 훼손되었으며 하부는 매몰되어 있다.

○ 나산면 나산리 방하 고인돌군

방하마을에서 남서쪽 400m 4 1991 1 의 목장 입구에 원래 기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년 월

4 2 , 2 1 1 일 현지 조사한 결과 기는 폭파하여 흔적도 없고 나머지 기도 기는 전파 상태며 기

는 파괴되어 한쪽만 남아 있었다 이. 150cm, 90cm, 40cm 한쪽의 규모는 길이 폭 두께 이

었다.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유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50 160 70 무 북동-남서 장방형

2 240 170 60 유 남 - 북 〃

3 250 240 90 〃 〃 〃

4 실 측 불 가 지금은 흔적이 없음

5 230 110 60 유 북동-남서 장방형

6 220 130 100 〃 북서-남동 〃

29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나산면 삼축리 나산초등학교 옆 고인돌

1994 11 50m 년 월 리현석에 의해 처음 조사된 이 고인돌은 나산초등학교 교문 서쪽 의

도로변 밭에 도로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 토사가 고인돌 하부에 쌓여 고임돌의 유무는 확인

할 수 없었고 규모는 , 230 , 150 길이 ㎝ 폭 ㎝였으며 두께는 측정이 불가능했고 장축 방향

은 남북이었으며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이었다 현재는 . . 확인할 수 없다

○ 나산면 삼축리 동축 고인돌군 가군

동축마을 함평생활유물전시관 앞 화단에 6 . 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곳은 박현순 씨 소유의

밭으로 화훼단지 내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가장 . 큰 상석의 크기는 장축

221 , 138 , 45 .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삼축리 동축 고인돌군 나군

영사정 앞에 있는 것으로 원래 5 1 . 기였으나 모두 유실되고 기만 남아 있다 상석의 형태

는 원형에 가까우며 크기는 장축 250 , 160 , 60 .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삼축리 백야산 고인돌

국도 24 1 . 호선에 접한 백야산 밑자락에 기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장축

방향은 남 북이며 크기는 - , 410 , 230 , 130 . 장축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삼축리 상장기 고인돌

나산고등학교 교문 우측 밭에 1 . - 230 기가 있다 상석의 방향은 남 북이며 크기는 장축

㎝, 150 , 40 . 단축 ㎝ 두께 ㎝이다

○ 나산면 삼축리 삼축 고인돌군

국도 24 5 . 호선 마을 진입로 맞은편 구릉상에 기가 있다 초포리와 나산리를 구분하는 이

구릉은 표고 40m 정도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농경지가 넓게 펼

쳐져 있다 도로 . . 맞은편에는 상축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실측 가능한 상석의 크기는 장축

180 , 100 - . ㎝ 단축 ㎝이며 장축 방향은 남동 북서이다

○ 나산면 월봉리 점골 고인돌군

월봉교에서 점골마을로 가는 소로 왼편 이천서 씨 묘소 옆에 7기가 무질서하게 군집되어

있다 원래는 . 13 7 . 기로 보고되어 있으나 기만 확인된다 가장 큰 상석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장축방향은 북동- . 남서이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297

처음 조사∶1989. 2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 고인돌군

안영마을 정자나무 곁에 위치한다 원래 . 12기가 있었는데 현

재 8 . 5 . 기가 남아 있다 호에서는 판석이 확인된다

처음 조사 년 ∶1983 광주박물관 조사진

번호

개 석 크 기 개석

유무

장축 방향 개석 형태 참 고 길이( ) ㎝ 폭( ) ㎝ 두께( ) ㎝

1 208 147 95 무 남 - 북 장방형

2 317 234 110 유 〃 〃

3 319 222 87 무 〃 〃

4 198 84 65 〃 동 - 서 〃 지금은 없음

5 365 330 90 유 남동-북서 방 형

6 287 182 85 〃 남 - 북 장방형

7 263 152 75 무 남동-북서 〃

8 234 145 93 〃 동 - 서 〃 지금은 없음

9 224 137 98 〃 〃 〃

10 243 200 80 〃 〃 방 형

11 157 142 33 〃 남 - 북 부정원형 지금은 없음

12 195 130 31 〃 〃 장방형 〃

○ 나산면 월봉리 생동 고인돌군

안영 고인돌군에서 북으로 600m 지점인 생동마을

의 농로 변에 11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었

다 그러나 . 2기는 논두렁에 묻혀 실측이 불가능하였

고 또, 고인돌 하부까지 경작에 의한 토사가 몰려 고

임돌의 유무도 확인 할 수 없었다 현재는 . 모두 다

소멸되어 확인할 수 없다.



2. 무덤 및 주거지 등

1) ( ) 나산 초포리 사촌 돌널무덤 석관묘

(1) 발굴 경위

1987 2 20 년 월 일 사촌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안길을 넓히는 작업을 하다가 해질 무렵 녹

이 슨 칼이 나오자 일흔 넘은 할머니가 엿이나 사먹자며 쑥쑥 뽑아 한 곳에 모았다. 마침

석양이어서 유물이 수습됨과 함께 작업이 끝났고 이튿날은 날씨가 아주 추워 작업을 할 수

가 없었다.

전에 이장을 하였고 유물이 나온 땅의 주인인 이건일이 어제 나온 녹슨 것이 무엇인가

알아나 보자며 면사무소로 가지고 가 신고를 했다 면에서는 . , 군 공보실로 공보실에서는 도

에 신고를 했으나 유물에 대한 성격을 잘못 알고 군에서 적당히 처리하라는 답이었다.

토요일인 이날 일과가 , 거의 끝날 무렵 리현석 씨가 군 공보실에 들려 이 말을 듣고 즉

시 손동룡 공보실장과 함께 면사무소로 가서 확인한바 청동기 유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수

습한 유물이 16 . 점이나 되어 유물의 숫자와 종류에 놀랐다

현장으로 가 파헤쳐진 현장을 더 이상 손을 못 대게하고 국립광주박물관에 이 사실을 전

화로 알리자 서성훈 학예관 작고 등이 ( ) 4시에 현장에 도착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임을 확인

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연락 합동조사반을 구성하여 추위를 무릅쓰고 22일 오후부터 발굴

을 시작 27 1988 2 . 일에 끝냈으며 년 월말에 발굴 보고서가 나왔다 발굴 보고서의 내용을

발췌하여 몇 가지 기술한다.

(2) 발굴과정

유구 는 ( ) 1m 遺構 마을 사람들의 채토작업으로 인해 이미 정도가 파헤쳐진 상태였으므로

상당히 파괴되었으나 묘광 의 ( ) ( ) 墓壙 아래쪽에 구축된 매장주체부 는 埋葬主體部 일부 남아 있

을 것으로 추정되어 먼저 주변을 정리하여 굴광선 을 ( ) 掘壙線 확인하고 석관벽으로 추정되는

돌들을 놔둔 채 묘광안의 뜬 돌과 부식토를 걷어 내고 조사해 내려갔다.

묘광 북쪽 주변에서는 아주 작은 흑색토기편 이 ( ) . 黑色土器片 몇 점 수습되었다 묘광 주위

의 생토 는 ( ) 生土 황적색을 띄는 부식화강암반 이었으며 묘광 안에 퇴적된 흙은 약간 붉은색

을 띤 갈색부식토로 드문드문 점성 을 ( ) . 粘性 가진 흙이 섞여 있었다

관의 벽석으로 생각되는 돌을 찾아 윤곽을 낸 뒤 계속해서 내부를 조사해 나갔다. 묘광

의 남서벽에서 ․ 약 85cm 쯤 떨어진 곳에 내부 퇴적토와 함께 할석들을 들어내자 한국식 동

검 한 ( ) . 韓國式銅劍 점이 칼끝을 묘광 위쪽으로 향한 채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동검의 경부

( ) 20cm 莖部 가 바닥 보다 약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 동검이 관내에 부장되지

않고 관 위쪽에 부장되어 있던 것이 흘러 들어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계속된 조사에서 동북쪽 마구리 단벽 으로부터 ( ) 90cm 短壁 약 떨어지고 동남쪽 벽에 인접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13

한 바닥 가운데 쪽에서 직경 15cm 정도의 둥근 흑색 부식토 윤곽이 동검 칼집 같은 길이

36㎝ 정도 되는 흑색 부식토 윤곽과 겹쳐 나타났는데 둥근 윤곽은 벽쪽에서 관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나 있었다.

윤곽으로 보아 동경 과 ( ) , ( 銅鏡 동검임이 확실하였고 이 흑색 부식토들은 거울의 나무갑 木

匣) . 과 목재 칼집이 부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동검의 윤곽이 동경의 윤곽 보다 위쪽에 얹혀져 있었으나 먼저 동경의 일부를 벗겨내 동

경임을 확인하고 계속 주위를 조사하자 동검 윤곽 봉부 옆에서 ( ) ( 鋒部 동제 칼자루장식 銅製

劍把頭飾) 1 이 점 출토되었으며 남서쪽 일직선상으로 약간 떨어져 동경과 동검이 겹쳐진 새

로운 윤곽이 동일한 상태로 나타났으며 앞의 동제 칼자루장식은 바로 이 동검 윤곽과 연결

되는 부속 칼자루장식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발견된 동경 윤곽은 직경 10cm 내외로 작았으며 역시 동검 윤곽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이. 동검 윤곽은 칼끝 부분이 좁고 경부쪽이 넓은 요즘 칼집과 같은 일반적인 형태

였으나 칼끝 부분에서 절반 정도까지의 윤곽이 묘광안쪽으로 밀려서 겹쳐진 모습으로 발견

되어 2 . 매로 나누어진 것을 붙여서 만든 칼집이 썩으면서 분리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동검 윤곽의 길이는 약 36cm . ( ) 였다 다시 첫 번째 동검 윤곽의 경부쪽 북동쪽 에서 약

12cm ( ) . 쯤 떨어져 이 동검의 칼자루장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철광석제 鐵鑛石製 였다

이 칼자루장식의 북동쪽 마구리 벽에 인접해 또 다른 동경 윤곽이 나타났는데 이 윤곽은

직경 17.5cm . , 정도였다 이들 동검 동경은 거의 남동 벽 가의 바닥에 일직선상으로 놓여

있었는데 북동쪽 벽에서부터 대형동경 철광석제 , ( 칼자루장식이 딸린 동검 및 중형 동경 칼

몸체 밑에 겹침 동제 ), ( ) . 칼자루장식이 딸린 동검 및 소형 동경 칼 몸체 밑에 겹침 순이다

중형 동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색 부식토 윤곽과 함께 굳혀서 수습하였기 때문에 후에

보전 처리실에서 알게 되었지만 대형 동경만이 거울면을 위로 하고 있었다 이. 대형 동경이

유구 할석 제거 후의 단면

31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출토된 북동쪽 묘광 바닥 주위에는 고운 적갈색 흙이 일부 깔려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빗

물에 침전된 고운 흙이 스며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서 마구리 단벽에서 약 26~30cm ( 떨어진 바닥에서 천하석제 굽은 옥 귀걸이 天河石製

飾玉) 15cm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이 두 귀걸이 사이가 약 내외로 양 귀 사이의 간격이며

구멍이 뚫린 부분이 모두 남서쪽으로 같은 방향이라 귀걸이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석벽과 굴광선 사이를 ( ) 掘壙線 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쪽 모서리 석벽 맨 윗돌과 굴광선 사

이에서 방울 부분이 밑으로 박혀지고 봉상부 가 ( ) ( ) 鋒上部 위로 향한 가지방울 조각 雙頭鈴片

이 발견되었고 이어 이 가지방울 조각의 서쪽으로 15cm 떨어진 곳에서 동일한 가지방울

조각이 1 . 점 출토되었다 이 묘광의 서쪽 모서리는 도로의 배수구에 의해 일부가 깎여 나갔

는데 이때 박혀있던 가지방울이 파손되었고 한 쌍 중 한점은 유실되었던 모양이다. 묘광바

닥에서 40cm . 높이다

묘광바닥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고 곱고 부드러운 황색 흙이 1~3.5cm 두께로 깔려 있

었고 드문드문 거뭇거뭇한 부식토가 섞여 있었는데 이 부식토는 관 바닥에 깔려 있었던 널

판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닥면은 . . 고르지 않고 약간 굴곡이 있다

벽석은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곳이 다섯 단으로 정연히 쌓이지는 않았고 맨 밑바닥 돌들

중 일부 석관 ( ) . 긴 벽의 중간부 는 안으로 밀려 들어와 있었다

이어 굴광선을 확인하기 위하여 벽석을 위에서부터 뜯어 나갔는데 벽석과 굴광선 사이에

는 일부 찐득찐득한 질흙이 발라져 있는 듯한 흔적이 보였다.

묘광의 남쪽 모서리에서 남동벽을 ․ 따라 27cm 3 정도 떨어진 곳의 바닥으로부터 단에 쌓

여진 돌과 생토벽 사이에서 뉴 가 ( ) ( ) 1 鈕 두 개 붙은 자루달린방울 이 柄附銅鈴 점 발견되었

다.

이 자루달린방울은 매장 후 파손을 입지 않도록 한쪽 면이 약간 들어간 돌과 묘광 사이

주민 수습 한국식 동검 동제칼자루장식 동검 철광석제칼자루장식 동검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15

의 공간에 놓여 있었다 피장자의 . 굽은 옥 귀걸이와 거의 나란한 위치에 자루가 남서쪽을

향하도록 눕혀져 있었다.

남동벽의 ․ 벽석을 계속 들어내는 도중 다시 남동벽․ 중간 석벽과 굴광선 사이에서 방울이

박혀 있었던 흔적이 푸른 녹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위치는 남쪽 모서리에서 남동 벽을 따라

약 1.2m 35cm 3 . 되는 곳이며 바닥에서 약 되는 단 째 돌의 옆이다 이것은 아마 마을 사람

들이 수습한 조합식 가지방울 이 ( ) 組合式雙頭鈴 묻혔던 곳이었는데 주민들이 뽑아낸 후 자국

만 남았던 모양이다.

이후 다른 벽석을 모두 들어냈으나 다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동검 동경 . , 등의 유물은

현장에서 직접 약품으로 굳혀 주민 수습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 처리실로 옮겨 처

리하였다.

(3) 묘장개황

가) ( ) 형제 形制

토광은 부식 암반을 파들어 간 것으로 장축 은 ( ) - . 長軸 북동 남서 방향을 이루고 있다 지

면으로부터 차츰 아래쪽으로 면적을 좁히면서 팠으며 현 지표면에서는 장축이 260cm, 단

축이 90cm ( ) . 로 부정형 장방형 을 不定形長方形 이루고 있다

석관 형태의 주체부는 현 지하 55cm 깊이를 바닥으로 하여 구축하였는데 내부의 규모는

길이 190cm, 55cm . 폭 정도이다

그다지 면이 고르지 않은 할석들을 한 겹 내지 두 겹으로 쌓아 올렸는데 할석의 크기가

서로 일정치 않기 때문에 정연한 느낌은 없다.

현재 쌓여진 돌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 5 55cm . 단으로 바닥에서 높이다

유구 할석 ( ) 제거 후

31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쌓여진 할석들 중 맨 밑바닥 돌들의 일부는 안쪽으로 밀려들어와 있었는데 이것은 그 위

에 쌓인 돌들이 안으로 밀리지 않게 한 것이 아니면 나무관을 묘광 바닥에 설치하고 묘광

과 나무관 사이를 할석으로 메꾸어 나무관이 썩은 후 할석이 안으로 밀렸을 가능성도 있다.

침향 은 ( ) 枕向 천하석제 굽은옥 귀걸이 출토 위치로 보아 남동침이 되며 토광은 평면상으

로 머리쪽이 넓고 발쪽이 좁은 형상을 보인다.

주민들이 묘광에 100여개 이상의 많은 돌이 채워져 있었다고 하므로 묘광 위에 적석이 되

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묘광 바닥에는 나무판자 흔적이라고 추정되는 흑갈색의 부식토가 깔려 있다.

이상의 구조에서 사촌의 유구가 어떠한 묘제에 속할 것인가는 다음 두 가지 추정이 가능

하다.

첫째 기왕에 , 조사되었던 할석으로 구축된 돌널무덤 중 상부에 적석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적석 돌널무덤( ), 積石石棺墓

둘째 돌널무덤이 , ( ) 아니고 널무덤 이며 木棺墓 토광과 나무관 사이를 할석으로 메꾸고 상

부에는 목개 를 ( ) , 木蓋 하고 그 위에 적석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적석 목관묘 이 묘제와

가장 가갑게 관련 지을 수 있는 유적들로는 대전 괴정동 아산 ( ), ( ), 槐亭洞 남성리 南城里 예

산 동서리 서흥 ( ), ( ), ( ) . 東西里 천곡리 화순 泉谷里 대곡리 를 大谷里 들 수 있다 풍화 암반을

파들어간 묘광 묘광을 ( ), , 墓壙 아래쪽으로 차츰 좁혀들어가면서 판점 묘광 상부를 적석하여

메운 점 관, , 뚜겅으로 생각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점 주로 할석이 사용된 점 등이 대체로

공통되며 침향은 조금씩 다르나 남침 동침에 , . 가까운 편이다

바닥에 돌을 깔거나 목판을 깐 것 할석이 , 쌓여진게 정연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의

세부적인 차이는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지역적인 조건이나 환경의 차이로 생각된다.

이들 유적과는 출토 유물로 보아서 같은 성격의 것임에 틀림 없다.

나 껴묻기 ) 유물의 출토 위치

발굴된 부장품은 출토 위치로 보아

첫째 묘광의 , 내부 바닥에서 출토된 것

둘째 할석과 , 묘광의 벽 사이에서 출토된 것

셋째 내부 , . 퇴적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묘광 내부 바닥 출토품으로는 굽은옥귀걸이 1 2 , 3 쌍과 칼자루장식동검 자루 잔무늬거울

점이 있다 이. . 중 굽은옥은 출토 위치로 보아 귀걸이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다 귀걸이의 출

토로 침향 이 ( ) 枕向 확인되었기 때문에 동남 석벽에 붙어서 일열로 발견된 동검과 잔무늬거

울은 피장자의 우측 허리와 발쪽에 놓여진 것을 알 수 있다.

동검은 놓여진 방향으로 보아 두 점 모두 착장 하였던 ( ) . 着裝 것은 아니다 이들 동검과 잔

무늬거울은 출토 상태가 정연한 점으로 보아 처음부터 이러한 상태로 묻었던 것이 틀림 없

다 소형 . 잔무늬거울과 중형 잔무늬거울은 한쪽이 약간 들려 비스듬이 놓여져 있어 관내벽

에 기대어 놓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17

여하튼 관내에는 동검 잔무늬거울 굽은 , , 옥의 세 가지 세트만 껴묻기하였음을 알 수 있

다 이들 . 유물의 위치로 보아 나무관이 있었다면 나무관의 두께가 매우 얇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할석과 . 묘광 사이의 틈에서는 자루달린방울과 가지방울이 출토되었으며 이 밖에 유물

은 보이지 않았어도 둥근방울 흔적을 보인 것이 한 군데 있었다.

이들 방울류의 출토 위치는 가지방울과 자루달린방울의 경우 피장자의 머리 부분 좌우이

기 때문에 팔굼치를 구부린 채 양손을 올리면 손으로 쥘 수 있는 위치라 생전에 방울을 들

고 흔드는 모습대로 묻은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 묻기 방법은 처음 보는 것으로

아직까지 그 예가 없다 여기서 . ( ) 할석으로 쌓은 유구 가 遺構 석관의 관벽이 될 수 있는가하

는 의문이 다시 생긴다 만약 . 석관의 석벽이라면 관을 조립하면서 부장품을 묻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신이 . . 관에 들어 가기도 전에 부장품을 묻는 특이한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할석들이 나무관과 묘광 사이를 메꾼 돌이라면 관외 부장의 한 방법으로서 나무

관을 안치한 뒤 나무관 주위에 부장품을 묻으면서 부장품이 상하지 않게 돌을 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 ( ) ( 동령 들이 銅鈴 묻힌 상태로만 본다면 이 무덤은 적석목관묘 積石木

棺墓) . 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겠다

내부 퇴적토에서는 한국식 동검 한 자루만 발견되었는데 칼끝 부위가 위쪽으로 경사진

채 뜬돌들과 함께 바닥 보다 높은 위치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돌과 함께 흘러

들어간 것임에 틀림없다 관의 . 뚜껑 위에 놓여진 것이 후에 무너져 내릴 때 아랫쪽으로 떨

어진 모양이다 이러한 . 관외 껴묻기는 최근에 그 예가 조금씩 늘고 있어 조사시 주의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주민들이 수습한 유물은 모두 관외에 껴묻기를 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는데 주

민들에 의하면 이곳에서 돌덩이를 제치면서 청동기를 뽑아 냈다고 하므로 할석과 묘광 사

이에서 꺼낸 것도 있지만 대 다수는 묘광 위에 덮었던 뚜겅과 적석된 봉토( ) 封土 사이에 묻

었던 것이 흘러 떨어졌거나 할석으로 된 벽석들 위에 묻은 것이 아닐까한다.

여하튼 껴묻기 출토품으로 보아 관내 관외 껴묻기가 함께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 매장에

관한 의례 절차가 간단하지 않고 상당히 복잡했던 것을 알 수 있다.

(4) ( ) 껴묻기 유물 부장품

사촌의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28 ( ) ( ) 점으로 동제 와 銅製 석제 의 石製 칼자루장

식 2 1 26 . 점을 각각 동검과 합해 점으로 치면 점이 된다

이 중 16점은 마을 사람들이 도로 작업을 하다 수습했고 광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진에 의해 발굴한 것이 10 , 점이며 이를 종류별로 나누면

• 무기류( ) 武器類

한국식 동검 점 ( . ) 4 (2 . 1. 3) 韓國式銅劍 細形銅劍 점은 칼자루장식 주민수습 발굴

중국식 동검 점 ( . ) 1 ( 中國式銅劍 桃氏劍 주민수습 1)

꺽창( ) 3 ( 3) 銅戈 점 〃

투겁창( ) 2 ( 2) 銅矛 점 〃

31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 의기류( ) 儀器類

잔무늬거울 점 ( ) 3 ( 3) 多鈕細文鏡 발굴

장대투겁 점 ( ) 2 ( 2) 竿頭鈴 주민수습

조합식가지방울( ) 1 ( 1) 組合式雙頭鈴 점 주민수습

가지방울 점 ( ) 1 ( 1) 雙頭鈴 발굴

자루달린방울( ) 柄附銅鈴 1 ( 1) 점 발굴

• 공구류( ) 工具類

동도끼 점 ( ) 1 ( 1) 銅斧 발굴

동시( - ) 銅시․동사 銅鉈 1 ( 1) 점 주민수습 銀 施

동끌( ) 2 ( 2) 銅鑿 점 〃

• 장신구( ) 裝身具

굽은옥 점 ( ) 2 ( 2) 天河石製飾玉 발굴

• 기타

숫돌 점 ( ) 2 ( 2) 砥石 주민수습

계 26 ( 16. 10) 점 주민수습 발굴

이들 출토 유물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가) ( ) 무기류 武器類

․ 한국식 동검( ) 細形銅劍

출토된 한국식 동검은 모두 4 . 점이다

① 주민 수습품

부식이 심하여 칼날 부위와 칼끝 부위에 떨어져 나간 곳이 많다.

전체적으로 연초록색이 돌며 날 부분은 검은색의 녹이 덮여 있다.

등대에 세운 능각 이 ( ) ( ) ( ) 1 稜角 결입부 에 抉入部 미치지 못한 윤무병 尹武炳 교수의 분류 식

( ) . 式 에 속한다

칼끝 부위가 부식에 의해 떨어져 나갔으나 등대가 뻗은 상태로 보아 매우 짧았던 것으로

보이며 등대의 둘째 마디가 뚜렷하게 서 있지 않아 마디는 보이지 않고 갈린 부분만 잘룩

한 채 칼끝 부위 등날과 연결되었다.

첫째 마디도 부식되어 보이지 않으나 갈린 각도로 보아 직선으로 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

로 생각한다.

경부 는 ( ) . 莖部 짧은 편이며 단면은 살구씨 모양이다

길이 25.8cm, 2.1cm 경부 길이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19

② 동제칼자루장식동검( ) : 銅製劍把頭飾附銅劍 발굴품

칼집에 들어 있었던 모양으로 동검 주위로 부식토의 칼집 윤곽이 나 있었다.

동검은 비교적 길이가 길고 검신 의 ( ) . 劍身 폭도 넓어 묵직한 감을 준다

칼끝 부위쪽은 연록색의 녹이 덮여 있고 결입부 이하는 칠흑색의 녹이 덮혀 있다.

부식이 심해 칼날 부위가 많이 떨어져 나갔다.

칼끝 부위는 짧고 능각은 결입부 이하에 미치지 않는 윤무병 교수 분류 1 . 식에 속한다

날의 폭이 비교적 넓고 둘째 마디가 뚜렷하며 단면타원형 의 ( ) 斷面楕圓形 경부에는 가는

실로 감았던 흔적이 있다.

이 동검의 손잡이 부위는 목제였던 모양으로 부식되어 보이지 않았으나 칼자루장식은 동

검 경부 아래쪽 12cm . 쯤 되는 곳에서 발견하였다

이 칼자루장식은 입주상 의 ( ) 立柱狀 장식이 상부에 붙어있는 +자형의 것으로 전면에 검은

녹이 덮여 있는데 드문드문 초록색이 보인다.

부식 상태가 심해 많은 부분이 결손되었다.

동 검

32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하부는 호콩껍질을 길이로 자른 반쪽 모양에다 네모 모양의 돌기를 잘룩한 양측면에 붙

여 +자형을 이루게 하였고 상부는 곧게 세워진 직육면체 의 ( ) ( ) 直六面體 네 모서리를 횡 橫

으로 깊게 파고 상하방에서 압축시켜 4 2 벽면을 밖으로 튀어 나오게한 형태로 상반부는 단

으로 꺾고 하반부는 잘룩한 채로 두었다.

입주상의 맨 윗부분은 부식이 심해 확실치는 않으나 형태가 원형일 것으로 추정되며 한

가운데에 직경 0.4cm, 0.2cm ( ) . 깊이 정도의 작은 반구형 홈이 半球形 나 있다

호콩형의 상부 내면은 비었으나 후기 칼자루장식처럼 두께가 얇지는 않고 한가운데 소형

돌기 가 ( ) . 小型突起 붙어 있고 입주상의 상부는 속이 차 있다

이와 유사한 칼자루장식은 충남 대전 출토품이 있다.

동검 길이 32.7cm, 3.9cm. 칼자루장식 높이

③ 철광석제칼자루장식 동검( ) : 鐵鑛石製劍把頭飾銅劍 발굴품

목제의 칼집이라고 생각되는 부식토내에 들어 있었다.

부식이 심해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거의 전면에 연초록색의 녹이 슬어 있으며 하부에만 진초록색의 녹이 덮여 있다.

칼끝 부위는 짧고 날 부위는 비교적 넓으며 등대에 나 있는 능각은 칼몸 하부까지 이르

고 있는 전형적인 윤무병 교수 분류 2 . 식 동검이다

등대의 둘째 마디는 약간의 폭을 가지며 뚜렷하나 첫 째 마디는 그렇지 않다.

경부는 짧으며 단면 은 ( ) . 斷面 살구씨형이다

경부 측면에 지어붙기틀을 합한 흔적이 보인다.

칼자루장식은 경부 아래쪽 12cm . 되는 곳에서 출토되었다

철광석제로 자성 을 ( ) . 磁性 가지고 있다 전면은 흑회색의 쇠색을 보이며 호콩 껍질의 상부

바닥을 제외하고는 전면이 잘 갈아져 반짝반짝한 광택을 내고 있다.

광석제이기 때문에 중실 의 ( ) . 中實 것이나 형태는 앞의 칼자루장식과 같다

다만 입주상의 장식이 폭도 넓고 두꺼운 점이 차이를 보인다.

입주상의 맨 위쪽은 원판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원구형의 중심부에는 직경 0.5cm, 깊이

0.2cm . 의 둥근 홈이 파져 있다

동검 길이 31.3cm, 0.5cm. 칼자루장식 높이

④ 발굴품

부식이 심해 결입부쪽과 칼끝 부위에 결손이 많다.

흑색의 녹이 전면에 슬어 있으며 칼끝 부위가 결실되어 확실치 않으나 등대가 뻗은 상태

로 보아 칼끝 부위가 짧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등대에 세운 능각이 결입부 이하에 미치지 않은 전형적인 윤무병 교수 분류 1 . 식이다

등대 둘째 마디가 일직선으로 뚜렷하며 동 위치의 칼날 부위에도 마디가 보인다.

날의 폭은 2~3mm 0.5mm . 로 넓은 편이며 칼끝 부위 가까운쪽 폭이 되는 곳도 있다

결입부는 비교적 깊게 파여 있고 경부는 짧은 편이며 단면은 살구씨 모양이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21

1 . 식 동검이지만 등대의 갈린 형태로 보아 후기 형식에 가깝다

현 길이 28.5cm, 2.2cm. 경부 길이

․ 중국식 동검 주민 ( ) : 桃氏劍 수습품

두 편 으로 ( ) 片 파손되었고 상당 부분이 결실되었으나 형태

는 어느 정도 알아 볼 수있다.

전반적으로 기포 가 ( ) . 氣泡 많고 거칠은 동질이다

색도 다른 청동기들과는 달리 연초록색의 녹이 전면에 나

있어 일견하여 다른 청동기들과 성분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결실된 부분은 칼몸체의 칼끝 부위와 중간 부분, 자

루의 끝 부분인 삿갓장식( ) . 首 이다

칼몸체의 중앙 부분에는 돌선 과 ( ) 突線 같은 느낌의 희미한

호 가 ( . ) ( ) 鎬 稜角 나 있어 칼몸체의 단면이 편릉형 扁菱形 에 가

깝지만 호에서 칼날 부위에 이르는 단면선은 안으로 약간

들어가 휘어진 형태다.

칼 콧등은 꺾인 각도가 심하지 않은 ∧형이다.

자루의 봉상부 는 ( ) 捧狀部 단면이 원형이 아니고 두께가 얇

은 볼록렌즈형이며 자루 부위 중간에는 약 1.7cm 간격을

두고 타원상 의 ( ) ( ) 2 . 楕圓狀 소형 테두리 小型 개가 나 있다

자루 부위의 끝은 결실되었으나 이러한 동검에는 대체로

삿갓장식형 장식이 달리기 때문에 장식이 달렸던 것이 떨어

져 나갔을 것으로 믿어진다.

도씨검의 경우 자루 부위의 길이는 대체로 칼콧등 부위에

서 두 돌기부 사이까지 길이의 2배가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하여 복원하면 다른 동검의 손잡이 길이 ( 8cm) 대체로 에 비

해 2cm . 정도나 짧아져 손잡이로서의 실용성이 없다

동검의 두께가 얇고 조질인 점과 함께 이 동검이 껴묻기

용 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중국식 동검은 평양 석암리 재령 , , ( ) 고산리 전 傳

익산 완주 , 상림리 등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매원

자료 에도 ( ) . 梅原資料 몇점이 보인다

또한 아직 소개되지 않은 개인 소장품이나 충남 출토로

믿어지는 2 . 점이 있다

이들 기왕에 출토된 동검 중에서 외형상으로 본 동질(銅

質) , , 이나 형태로 가장 가까운 것은 상림리 고산리 전 충남

출토품을 들 수 있다,

이들 중국식 동검은 중국이나 평양지역에서 보이는 중국

중국식 동검

32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제 중국식동검과는 달리 표면에 연록색의 녹이 덮여 있고 동질도 기포가 많이 보이는 등

거친 것이 없고 자루 부위의 단면이 볼록렌즈형으로 얇아 차이를 보인다.

추정 길이 약 35cm, 6.8cm, 4.5cm 추정 손잡이 부위길이 약 추정 칼몸 최대 폭

․ 꺽창( ) 銅戈

3 . 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주민 수습품이다

① 주민 수습품

등대에 능각을 세우지 않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두께가 두텁고 무거운 느낌을 주며 전면에 검은색의 녹이 슬어 있고 표피가

떨어져 나간 곳에는 드문드문 초록색의 녹이 덮였으며 창끝 부위의 길이는 약 6cm 정도로

그다지 길지 않다.

창끝 부위 및 좌우의 날 인부 부위에는 ( - ) ( ) . 刃部 횡 으로 橫 연마한 흔적이 보인다

날 안쪽의 양혈구 가 ( ) 兩血溝 마주쳐 합쳐진 창끝 부위가 시작되는 부분의 두께가 바로 그

아래쪽의 등대 두께 보다 2cm . 이상 두껍다

이러한 형식의 것은 영암 출토 꺽창 용범 에서 ( ) . 銅戈鎔范 볼 수 있다

혈구 하단에 나 있는 천공 은 ( ) . 穿孔 네모꼴이다

관부 는 ( ) ( ) . 關部 비교적 넓은 편이고 안 도 內 폭에 비해 길이가 길다

안의 양 측면에 나 있는 합범흔 은 ( ) . 合范痕 갈아 없앴다

최몽룡 교수 분류 2 , A2 , 2 . 식 이청규 교수 분류 식 전영래 교수 분류 식이다

전체 길이 27.6cm, 5.8cm, 7.8cm, 3.6cm, 칼끝 부위 길이 관부 폭 안 폭 안 길이

3.4~4.0cm, 0.7cm 안 두께

② 주민 수습품

꺽창 ①과는 달리 등대에 능각 을 ( ) , 稜角 세운 형식이다

창끝 부위가 결실되어 전체 길이는 확인 할 수 없으나 ①보다는 길이가 짧을 것으로 본다.

전면적으로 검은색의 녹이 슬어 있으며 드문드문 초록색의 녹이 보인다.

등대의 능각은 관부에 이르는 곳까지 잘 갈려 있고 전체적으로 두텁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

혈구 에 ( ) ( ) 血溝 나 있는 구멍은 작은 편이며 원형에 가깝고 관부와 안 이 內 이루는 각도는

꺽창 ①과 비슷하다.

등대와 안의 두께가 두꺼운 편이며 안의 길이는 꺽창 ① 보다 짧다.

안의 상부 관부쪽에는 주조시에 덧붙여 생긴 것이 볼록하게 튀어 나와 있으며 측면 일부

에는 합범흔이 보이고 등대 일부에는 횡으로 간 흔적이 있다.

최몽룡 교수 분류 1 , A1 , 1 . 식 이청규 교수 분류 식 전영래 교수 분류 식이다

현재 길이 20.5cm, 7.4cm, 3.6cm, 3.0~3.7cm, 관부 폭 안 폭 안 길이 안 두께

0.7cm

③ 주민 수습품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23

꺽창 ②와 같이 등대에 능각을 세운 형식이다.

전면에 검은색의 녹이 덮여 있으나 등대쪽에 일

부 파여진 부분을 보면 청동 본래의 색이 보인다.

구리거울류 보다는 주석 이 ( ) 朱錫 많이 섞인 것으로

본다.

창 끝 부위 일부가 결실되었으며 길이 약 5cm 정도

이다.

창날은 부식으로 인해 모두 탈락되었고 창 몸체의

관부쪽 호선 은 ( ) ( ) . 鎬線 곡도 가 曲度 큰 편이다

능각이 등대의 아래 끝까지 제대로 갈리지 않고

하단 2.4cm 가량은 양쪽에서 같은게 마주치지 않아

희미하게 되어 있다.

혈구에 있는 천공 은 ( ) ( ) 穿孔 장방형 長方形 에 가깝

고 관부는 비교적 넓은 편이며 안은 폭에 비해 길이

가 짧은 편이다.

안과 관부가 이루는 각도가 다른 것에 비해 작으

며 안의 좌우 측면에는 일부 합범흔이 보인다.

안의 관부 사이에도 주조시 놋쇠물이 스며 나와 굳은 것이 일부 붙어 있다.

길이 26cm, 5.0cm, 8.2cm, 3.4cm, 창끝 부위 길이 관부 폭 안 폭 안 길이

3.0~3.3cm, 0.55cm 안 두께

․ 투겁창( . ) 銅鉾 矛 銅 眸

투겁창은 2 . 점이 출토되었고 모두 주민 수습품이다

① 주민 수습품

귀가 없고 구멍이 있는 형식 의 ( ) . 無耳有穿式 것이다

전체적으로 칠흑색의 녹이 덮여 있고 비교적 긴 원통형의 착부 가 ( ) 鑿部 그대로 연장되어

창몸체의 등대를 이루었다.

등대에 나 있는 능각은 관부까지 이르고 있으나 좌우 삭마면 의 ( ) 削磨面 길이가 동일하지

않다.

창날은 관부 이하까지 날이 잘 서 있고 공부 공 의 ( ) 0.8cm ( 部 하단에는 폭 정도의 돌대 突

帶) 1 ( ) 가 조 돌고 條 있으며 공부 일측면의 돌대 바로 위쪽으로는 못을 박기 위한 직경

0.5cm . 정도의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있다

공부 양 측면에는 합범흔이 나 있고 공부 안으로 나 있는 소켙은 공부에서 16.8cm 되는

곳까지 나 있다.

윤무병 교수 분류 제 류에 1 속하는 것이며 이러한 투겁창은 ①길이는 약간 ②짧지만 ③이

화동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꺽창( ) 동과․신고품

32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전체 길이 27.9cm, 8.2cm, 5cm 공부 길이 관부 추정 폭 약

② 주민 수습품

공부가 매우 짧은 특이한 형식의 투겁창이다.

전체적으로 칠흑색의 녹이 덮여 있고 부분 부분 초록색

녹이 보인다.

창날 부분이 결실된 곳이 많아 확실치 않지만 관부의

위치도 아래쪽으로 치우쳐 있어 바로 보고 투겁창 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다.

모부 는 ( ) 3cm 矛部 미만으로 짧은 편이며 등대에 나있

는 양측의 삭마면은 일정치 않고 등대 중앙에서 마주치지

않아 호선 을 ( ) . 鎬線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등대의 삭마도 3차례 정도 나누어 행하였던 모양으로

삭마면의 중간부가 일정하게 연결되지 않고 있다.

공부 길이는 2cm가 조금 넘는데 돌대의 폭을 제하면

1cm . 밖에 되지 않는다

공부 하단에는 폭 1cm 가량의 돌대가 돌고 있으며 이 돌

대 바로 위쪽의 한 측면에는 직경 0.8cm 정도의 못 구멍이

뚫려 있다.

공부 안으로 나 있는 소켙은 공구에서 13.7cm 되는

곳까지 나 있고 공부의 단면은 타원형이다.

윤무병 교수 분류 제 류에 1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투겁창 형식의 것은 아직 출토

된 바가 없다.

전체 길이 26.1cm, 2.3cm, 4.6cm 공부 길이 관부 추정 폭

나) ( ) 의기류 儀器類

․ 잔무늬거울( ) 細文鏡

모두 3 . 점이 나왔고 발굴품이다

① 발굴품

피장자의 우측 발밑쪽에서 발굴하였다.

일부 녹청색의 녹이 나 있으나 전체적으로 흑색의 녹이 슬어 있다.

거울면은 약간 오목하게 들어 갔으며 경연 의 ( ) . 鏡緣 단면은 반원형이다

거울 뒷면 중심에서 약간 윗쪽으로 2 ( - ) . 개의 거울손잡이 뉴 가 鈕 나란히 붙어 있다

거울손잡이의 형태는 반환형 이나 ( ) 半環形 납작한 편이며 손잡이 밑에 뚫린 구멍도 둥글지

투겁창( ) 동모․신고품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25

않고 납작하다.

거울손잡이의 중간부는 잘룩하며 구멍의 좌우쪽에는 구멍을 내기 위해 끼웠던 봉( ) 棒 에

의한 흔적이 보인다.

거울 뒷면에 나 있는 문양 구성은 복잡하나 기본적으로 외구( ), , 外區 중간구 내구의 삼구

로 구분되는 삼구식 의 ( ) . 三區式 거울이다

각구의 문양 설명은 우야융부 의 ( ) 宇野隆夫 “단위문양분류 를 ( ) 單位文樣分類 ” 따르기로 한다.

외구는 ①삼각형문과 ②장방형문을 교호 로 ( ) 交互 배치하였는데 삼각형문 중 꼭지점이 안쪽

에서 경연 쪽으로 ( ) . 鏡緣 뻗은 것은 밑변의 폭이 좁고 그 반대로 뻗은 것은 밑변의 폭이 넓다

삼각형의 내부를 사변 에 ( ) A1 . 斜邊 평행하는 평행선으로 채운 단위 문양 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방형문은 상하로 구분하여 각각 동일한 문양 B1 . 을 배치하였다

이 밖에 접해 있는 3 ( ) B4 개의 구획대 에 區劃帶 짧은 평행선을 엇갈린 단위 문양 가 대칭

으로 4 . 곳에 나 있다

중간구는 7 ( ) ( ) C6, C3, C3, C1, C1, 개의 윤대 로 輪帶 구성되었는데 단위문양 單位文樣

C4, C5 . 순으로 배치되었다

내구 는 ( ) D3 內區 상하로 양구획 한 뒤 위쪽은 다시 상하로 나누어 각각 단위문양 으로 채

웠으며 아랫쪽은 다시 횡으로 4 D3 구획하여 각각 단위문양 으로 채웠는데 일부에는 외구 문

양에서 주로 보이는 A1 . 문양이 그려졌다

전체적인 문양 구성이 전 논산 ( ) . 傳 출토 국보 거울과 아주 유사하다

직경 17.8cm, 0.3cm, 0.65cm, ( ) 1.5cm 두께 손잡이 높이 주연 周緣 폭

② 발굴품

이 거울은 철광석제 칼자루장식 동검 밑에 겹쳐서 출토된 것으로 나무로 만든 거울 갑에

들어 있었던 모양으로 검은 부식토가 거울 주위로 둥근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흑색의 녹이 전면에 덮여 있고 부식 상태가 거울 3 . 매 중 가장 덜한 편이다

거울면은 약간 안으로 들어가 오목한 편이며 경연 의 ( ) . 鏡緣 단면은 반원형이다

거울 뒷면에는 중심에서 약간 위쪽으로 반환상 의 ( ) . 半環狀 거울손잡이가 쌍으로 달려 있다

거울손잡이는 띠고리의 형태를 가졌으며 높이가 낮아 납작한 느낌을 준다.

손잡이의 중간부는 잘룩하며 구멍의 크기도 작다.

구멍의 좌우측에는 구멍을 내기 위해 끼웠던 봉의 흔적이 남았다.

뒷면의 문양이 외구 중간구 내구의 , , 3 ( ) 구로 나뉘어 배치된 삼구식 三區式 것이나 내구가

직경 1.2cm 정도로 아주 작고 그 안의 문양도 적당히 그려져 있어 내구를 내구 자체로서

특별하게 의식해서 만든 것으로는 인정하기가 힘들다.

중간구의 윤대 를 ( ) ( ) 輪帶 여러개 돌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중심부에 남은 소원 小圓 을 그

대로 중간구의 문양과 비슷하게 처리한 것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3 2 구식이지만 구식에 가까

운 것이다.

외구에는 삼각거치문 을 ( ) 三角鋸齒文 엇갈려 맞물리게 하여 배치하였는데 각 삼각형의 내

부는 삼각형의 꼭지점이 경연을 향한 것에는 밑변에 평행한 집선문( ) , 集線文 으로 꼭지점이

32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내구쪽을 향한 것에는 사변 에 ( ) . 斜邊 평행한 집선문으로 채웠다

단위문양 A3 . 이다

내구는 12 (13 ) 12 개의 윤대 개의 동심원 로 이루어 졌으며 이 개의 윤대는 한쪽이 중심쪽으

로 뻗은 16 10 10 개의 긴 선문과 개의 짧은 선문에 의해 나뉘어 졌는데 바깥쪽으로부터 개

의 짧은 선문은 첫번째와 둘째번 윤대까지만 나 있고 이 선문 중 하나는 다시 세번째 원권

대 까지 ( ) . 圓卷帶 뻗고 있다

이 선문과 동심원이 만나는 점은 모두 대각선을 그어 잇고 이로 , 인해 만들어진 삼각형

( ) 한 변이 호선으로 이루어짐 의 내부에는 각각 밑변에 평행한 집선문과 사변에 평행한 집선

문을 채웠다.

단위문양 C3 . 이다

내구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작고 문양도 짧은 집선을 엇갈려 중간구의 단위문양

D3와 비슷한 효과를 노렸으나 자세히 살펴 보면 일정치 않고 가운데 빈 곳을 메꾸어 적당

히 마무리 하려고 한 느낌을 받는다.

전체적인 문양 구성이 경주 입실리 횡성 , . 강림리 출토 거울과 가깝다

지름 15.6cm, 0.35cm, 0.5cm, 1.5cm 두께 손잡이 높이 주연 폭

③ 발굴품

3 . 매의 거울 중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이다

피장자의 오른쪽 허리 옆에서 발견된 동제 칼자루장식 동검의 칼몸체 바로 밑에서 출토

된 것이다.

나무로 만든 거울갑에 들어 있었던 모양으로 주위의 흙이 검은 부식토로 덮여 있었다.

흑색의 녹이 전면에 슬어 있고 거울면이 심하게 안으로 들어가 오목 거울처럼 되어 있고

경연의 단면은 납작하게 된 반구형 에 ( ) . 半球形 가깝다

뒷면에는 중심에서 약간 위쪽으로 치우쳐 두 개의 거울손잡이가 나란히 붙어 있고 중심

부에서 아래쪽으로 한 개의 거울손잡이가 붙어 있다.

소위 삼뉴식 의 ( ) . 三鈕式 것이다

손잡이는 모두 종단면 이 ( ) ( ) 縱斷面 반환형 을 半環形 이루고 중간부가 잘룩한 것으로 아랫쪽

의 손잡이가 윗쪽의 두 손잡이 보다 작다.

거울 뒷면의 문양은 3 . 구로 나뉘어 채워졌다

외구에는 삼각거치문 을 ( ) 三角鋸齒文 맞물려 돌렸는데 꼭지점이 중심을 향한 삼각형의 내

부에는 아무런 문양도 채우지 않았다.

단위 문양 A5 . 이다

중간구는 폭이 좁은 3 ( ) 개의 윤대 로 輪帶 이루어졌는데 아래쪽 손잡이와 겹쳐진 부분을 제

외하고는 21 ( ) 개의 짧은 선문으로 나뉘어졌으며 각 구획된 곳에는 상하 좌우 교호 交互 로 짧

은 선을 채웠다.

단위문양 C4 . 이다

내구는 중심을 교차점으로 해서 +자로 4 구획한 뒤 각 구획된 곳을 ㄱ자형의 단사선문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27

대 를 ( ) . ( 短斜線文帶 교호로 엇갈려 그렸고 마지막 남은 삼각형에는 단사선을 채웠다 우야 宇

野)의 “단위문양분류”에는 없다.

손잡이가 셋 달린 잔무늬거울은 함흥 이화동 금야 , 2 , 용산리 제 지점 일본 산구 미율병

( ) 山口梶栗병 등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내구가 이와 같은 +자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용산리 제 지점 2 . 출토품 밖에 없다

손잡이가 셋 달린 잔무늬거울은 모두 지름 9cm 전후의 작은 거울이며 외구 문양은 단위

문양 A5 . 9.7cm, 0.15cm, 0.35cm, 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름 두께 손잡이 높이

주연 폭 1.2cm

잔무늬 거울

․ 장대투검( ) 竿頭鈴

장대투겁은 1 . 쌍이 출토되었고 모두 주민 수습품이다

① 주민 수습품

“동간두( ), ( ), ( ) 銅竿頭 동제영부병두 銅製鈴附柄頭 이형유악령 異形有鍔鈴 ” 등으로 불리어

온 것이다.

기 출토된 일반적인 장대투겁과 같은 형태의 것이다.

신부 와 ( ) ( ) 身部 자루 부위 사이에 갓의 테두리 형상을 한 테두리가 돌려진 중공 中空 의 포

탄형구( ) . 砲彈形具 이다

내부에는 꼭지부위에서 5.1cm ( ) . 가량 아래쪽에 횡 으로 橫 칸막이가 설치되었다

칸막이의 두께는 0.3cm . 정도로 두꺼운 편이고 한쪽에는 부정형의 구멍이 두개 나 있다

이 구멍들 하나는 칸막이를 사이로 둘로 나눈 내형 들을 ( ) 內型 고정하기 위해 연결되었던

봉 이 ( ) ( ) . 棒 박혔던 자국이며 다른 하나는 주손 鑄損 자국으로 생각된다

영부 속에는 ( ) 1.2cm . 鈴部 지름 의 구리구슬 한 개가 들어 있다

① ② ③

328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신부에는 네 개의 긴 살구씨형 절개구 가 ( ) 切開口 나 있고 각 절개구 사이와 대칭이 되는

두 개의 절개구 아래쪽으로 각각 동일한 문양대 를 ( ) . 文樣帶 횡으로 배치하였다

이들 문양대의 형태는 긴 이등변삼각형 이며 ( ) 長二等邊三角形 구성은 일렬로 된 음각평행

단사선문 의 ( ) 2 ( ) 陰刻平行短斜線文 좌우에 각각 열로 된 음각방형 점선문 陰刻方形點線文 을

조합하여 이루어졌다.

나머지 두 개의 절개구 밑에 문양이 배치되지 않은 것은 이 부위가 2매의 용범이 합치는

곳이라 애초부터 무늬를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두리부에는 대칭으로 부정형 구멍이 각각 1 3 개씩 뚫려 있고 군데에 땜질 자국이 보인

다.

땜질 부위는 합범흔이 나 있는 부근으로 이쪽이 항상 주조시에 손상을 입기 쉬운 부분이

라 구멍이 잘 생기는 모양이다.

땜질의 형태는 모두 장타원형이고 표면은 잘 갈아 매끄럽게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튀어

나온 자국은 모두 그대로 놔두었다.

땜질 부위의 녹 색깔은 주위와 약간 다르다.

자루 부위에는 연속된 음각의 장이등변삼각형에 가까운 사다리꼴 문양을 상하로 마주보

게 하여 횡으로 돌린 문양대가 나 있다.

문양이 정치( ) . 精緻 하지는 않다

높이 14.5cm, 4.5cm, 5.1cm, 1.2cm, 자루부위 지름 칸막이 높이 구리구슬 직경 땜질

흔 길이 2.4cm, 2cm, 1.2cm

② 주민 수습품

형태 문양 녹의 , , . 색조 등이 ①과 동일하다

영부의 일부가 결실되었고 구리구슬 도 ( ) . 銅丸 유실되었으며 땜질 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크기 두께 , 등 세부적인 차이로 보아 장대투겁 ①과 함께 동일한 용범에 의해 제작된 것

은 아니다.

높이 14.3cm, 4.5cm, 5.0cm < > 자루부위 지름 칸막이 높이 선사시대 화보 참조

․ 조합식가지방울( ) 組合式雙頭鈴

기 출토되었던 조합식 자지방울 보다는 소형이다.

일단 에 ( ) 1cm ( ) 2 X 一端 영부가 부착된 직경 가량의 동봉 개를 銅棒 각각 구부린 뒤 자형으

로 교차해서 조합한 것이다.

영부는 만두형이며 4 . 개의 절개구가 나있다

봉상부 는 ( ) ( ) . 棒狀部 단면원형 으로 斷面圓形 굵기가 다른 조합식 가지방울에 비해 가늘다

봉상부는 중실 의 ( ) 中實 것이나 두 군데에 조그만 홈이 파져 있고 그 곳에 석회와 같은 회

색의 물질이 채워져 있다.

이것이 주손 입은 ( ) 鑄損 부분을 보수하려고 하였던 흔적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가 없다.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29

봉상부의 휘어든 만곡도 는 ( ) ( ) . 彎曲度 전 상주 傳 출토 조합식가지방울과 비슷하다

삽입 구멍이 나 있는 일단은 일부가 파손되어 확실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고착용(固着

用) .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고착하지 않고 사용한 모양이다.

문양은 영부 봉상부 , . 모두 보이지 않는다

길이 15cm, 11cm, 3.3cm 폭 영부 폭

(4) ( ) 가지방울 雙頭鈴

가지방울은 묘곽의 서쪽 귀퉁이 벽석과 묘광 사이에서 출토되었

다.

파손되어 절반 밖에 남지 않은 것과 방울 부분만 남은 것이

15cm 간격을 두고 따로 따로 발견되었으나 같은 하나의 가지방울

이 부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아령 과 ( ) ( ) 啞鈴 같이 생긴 것으로 가운데 봉상부 는 棒狀部 중앙이

불룩하고 방울 부위와 연결되는 양단은 가늘다.

방울은 만두형으로 4 ( ) 개의 긴 절개구 가 切開口 나 있고 속에는

지름 0.7cm ( ) 1 . 의 구리구슬 개가 銅丸 들어 있다

구리구슬은 합범 에 ( ) 合范 의해 제작된 것으로 중심부에 합범 자

국이 보인다.

봉상부의 속은 영부와 연결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속이 비어

있다.

중앙에는 장방형의 구멍이 관통되어 있다.

가지방울은 쌍으로 발견되는 것이 통례이므로 한 점은 유구가 발

견 될 당시 없어졌을 것으로 믿는다.

현재 길이 7.7cm, 15.9cm 복원 길이

․ 자루달린방울( ) 柄附銅鈴

가지방울 출토 위치의 맞은 편 쪽

벽석과 토광( ) 土壙 사이에서 발굴하였

다.

방울 부위는 장대투겁을 제외한 일

반 구리방울에서 보이는 방울 부위 보

다 훨씬 크고 구형( ) . 球形 이다

방울 부위의 정부 와 ( ) ( 頂部 일측면 一

側面)에는 각기 ㄷ자형의 작은 손잡이

가 한 개씩 달려 있다.

조합식 가지방울

자루달린

방울( ) 병부동령

및 목심

가지방울( ) 쌍두령

330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방울 속에는 영부 와 ( ) ( ) 鈴部 동일한 형태의 작은 구형의 구리방울 이 銅鈴 들어 있는

모자 방울식의 ( ) . 母子 특이한 것이다

방울 부위의 절개구는 4 4 . 개이며 안의 작은 방울에도 절개구가 개나 있다

작은 방울 속에는 지름 0.6cm 1 . 정도의 구리구슬이 개 들어 있다

자루 부위는 곧고 하단에 이를 수록 폭이 넓어진다.

자루 부위 하단에는 작은 네모형의 못 구멍이 대칭으로 하나씩 뚫려 있고 자루 부위 속

에는 끝이 qY . 족하게 깎여진 나무가 꽂혀 있다

자루 부위의 단면은 8 4 ( ) 각형에 가까우며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조의 단사선문 短斜線文 으

로 구성되었다.

길이 17cm, 4.2cm, 1.5cm 폭 작은방울 폭

다) ( ) 공구류 工具類

․ 동도끼( ) : 銅斧 주민 수습품

소위 유견동부 에 ( ) . 有肩銅斧 속하는 형식의 것으로 전면에 칠흑색의 녹이 덮여 있다

동도끼라고는 하지만 편도 의 ( ) . 片刀 것이 대부분이라 손자귀와 같은 공구의 일종이다

공구 쪽에서 도끼 몸부를 향하여 호선을 그리며 잘

룩하게 휘어져 들어 가다 다시 넓어지면서 견부(肩

部) ( 와 만나고 견부에서 도끼 날 까지는 약간 내향 內

向) . 하면서 곧게 내려 왔다

공구의 외면 주위로는 4 ( ) . 조 의 條 돌선을 돌렸다

날 부위는 결실된 곳이 많으나 편도임을 알 수 있다.

공부 양쪽 측면에는 일부 합범흔이 보인다.

공부 안쪽으로 나있는 소켙은 사다리꼴로 좁아지면서

공구에서 약 5cm . 깊이까지 파여있다

표면이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돌선의 표현도 뚜렷하

지 못하다.

이러한 형식의 동도끼는 영암, , ( ) , 화순 전 傳 공주 대

구 순안 , 각지에서 발견된 바 있는데 사촌 것과 가장 유사하고 규격이 비슷한 것은 전 공

주 출토품이다.

전체 길이 9.7cm, 4.0cm, ( ) 6.0cm, 날부위 추정 폭 신부장 身部長 공구

폭 2.5. 0.7cm

․ 동사 주민 ( ) : 銅鉈 수습품

날이 나 있는 선단 이 ( ) . 先端 삼각상을 이룬 전형적인 동사다

전면이 칠흑색의 녹으로 덮여 있다.

외만 된 ( ) 外彎 표면 중앙에 돌대처럼 가늘게 튀어 나온 능선이 있고 신

부 의 ( ) . 身部 아래 쪽으로 폭이 조금씩 좁아진다

통도끼( ) 유견동부 및 목심

동 과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31

날 부위는 좌우 양쪽이 잘 갈려 있으며 신부의 양 측면에는

날이 없다.

신부의 단면은 초생달형으로 이면 쪽이 ( ) . 裏面 들려있다

원래 길이가 길었던 것이 부러져 하부를 갈아 재 사용한 모양으

로 길이가 다른 동시들에 비해 매우 짧다.

이러한 동시는 화순 대곡리를 포함해 모두 11개 유적에서 출토

된 바 있다.

현재 길이 7.6cm, 2.5cm 폭

(3) ( ) 동끌 銅鑿

2 . 점이 출토되었고 모두 주민 수습품이다

① 주민 수습품

전면에 칠흑색의 녹이 슬어 있다.

공구 공 의 ( ) ( ) 口 일부가 결실되었고 신부 의 身部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것이나 양 측면

의 합범흔이 튀어 나와 있어 육각형처럼 보인다.

공구의 외면에는 돌대가 돌려 있고 내부의 구멍은 단면이 정사각형이며 아래쪽으로 갈

수록 좁아졌다.

신부의 폭은 별로 좁아지지 않은 채 날 부위와 연결되나 상하의 두께는 얇아지면서 날

부위와 연결되고 있다.

소켙은 공구에서 5.8cm . 되는 곳까지 나 있다

숭실대 소장 용범 에서 ( ) . 鎔范 보이는 동끌과 동일한 형식의 것이다

전체 길이 10.0cm, 1.5cm 공구 추정 폭

② 주민 수습품

인부 쪽이 ( ) . 刃部 절손된 것이다

전면에 칠흑색의 녹이 덮여 있다.

동끌 ①과는 달리 신부의 단면이 육각형을 이룬 것으로 이 육각형의 상하면은 약간 오목

하게 들어간 형태다.

공구의 외면에는 폭 0.7cm 정도의 돌대를 한 줄 돌렸으며 내부 구멍은 아래 쪽으로 좁

아지며 나 있는데 현재는 날 부위 쪽이 결손되어 구멍이 상하로 맞 뚫려 있다.

공구 윗면에는 합범흔을 갈아지운 흔적이 남아 있고 한 쪽 편에는 오목하게 주손( ) 鑄損 자

국이 남아 있다.

이러한 단면 육각형을 가진 동끌로는 아산 성남리 출토품이 있다.

현재 길이 5.3cm, 1.6cm 공구 폭

동 사

33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라) ( ) 장신구 裝身具

․ 굽은 옥귀걸이( ) 天河石製飾玉 ∶발굴품

묘광의 남서쪽 바닥 피장자의 , 15cm 귀 부분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간격을 두고 한

쌍을 발굴하였기 때문에 귀걸이로 믿어진다.

연초록색 바탕에 흰 반정 이 ( ) . 班晶 박힌 천하석제의 것이다

타원형의 환 을 ( ) 0.6cm ( 環 반절한 형태며 한 쪽에 지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어 수하 垂

下) . 할 수 있도록 되었다

구멍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뚫었다.

전면이 매끄럽게 잘 연마되어 윤이 난다.

길이 3.8cm, 1.35cm 두께

(2) : 굽은옥귀걸이 발굴품

굽은 옥귀걸이 ① 과 같은 것이나 두께가 ① 보다 얇고 흰 반

정 이 ( ) . 班晶 덜 섞인 질의 것이다

구멍은 나란히 붙여서 2개가 뚫렸는데 앞뒤 쪽에서 맞뚫은 것

이다.

이러한 형태의 귀걸이는 대전 괴정동 부여 , , 연화리 예산 동

서리 아산 , . 남성리 등의 돌널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길이 3.85cm, 1.2cm 두께

마) 기타

기타 유물로는 숫돌( ) 2 . 砥石 점이 있다

․ 숫돌 주민 ( ) : 砥石 수습품

단면 직사각형의 소형 숫돌이다.

중간부가 부러졌으나 완형이다.

전면이 잘 연마되어 있고 상면을 주로 사용하였던 모양으로 표면

이 약간 오목하다.

입자가 치밀한 니질암제( ) . 泥質岩製 이다

길이 7.9cm, 1.0cm 두께

․ 숫돌 : 주민 수습품

횡단면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숫돌로 숫돌 ①과 같은 니질암의 것이

다.

전면이 연마되어 있으나 주로 사용된 면은 상하면으로 표면의 중

간부가 약간 우묵하게 들어 갔다.

천하석제식 옥

지석

제2장 _ 함평의 선사시대 유적 유물 333

길이 20.6cm, 2.5cm 두께

(5) 무덤 축조연대

초포리 사촌 유적은 한국식동검문화기의 대표적인 적석돌널무덤( ) . 積石石棺墓 계통의 유적이다

유구 는 ( ) ( ) 遺構 매장 주체부가 나무관으로서 묘광 과 墓壙 관 사이를 할석으로 메꾼 뒤 묘

광의 상면에 적석을 한 것 이거나 ( ) ( . 積石木棺墓 매장 주체부가 할석을 쌓아 만든 돌널 석관

바닥과 뚜겅은 나무로 된 로서 ) ( ) 묘광의 상면에 적석을 한 것 등 積石石棺墓 두 가지 가능성

이 있으나 그동안 조사되었던 괴정동 동서리 남성리 , , 대곡리 유적 등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것이다.

껴묻기를 함에 있어 관내 껴묻기 이외 할석으로 쌓은 벽석 속에 껴묻기를 한 방법은 처

음 확인된 것이지만 앞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던 유적들에서도 같은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이

러한 전통은 소위 와질토기 를 ( ) ( ) 瓦質土器 내는 원삼국시대 초기 原三國時代 널무덤 유적까지

계속되었다고 믿어진다.

초포리 유적과는 연대차를 보이는 것이지만 조양동 호분과 ( ) 5 朝陽洞 같은 예를 보면 관내

부장품 외에 관벽 묘광 , , , 사이 관위 또는 주위 묘광주위 등에 관외 부장품을 묻었던 것이

상부 나무뚜겅이 썩어내려 앉으면서 흙 적석 , 등과 함께 매몰되어 묘광내에서 발견되는 것

이다.

초포리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들은 무기류 공구류 의기류로서 , , 모두가 한국식동검문화

기의 대표적인 유물들이다.

다뉴잔무늬거울 동령 들은 ( ), ( ) 多鈕細文鏡 銅鈴 그 제작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것으

로 고도의 기술이 없이는 만들기 힘든 것이다.

이 시기에는 단순한 석제용범 에 ( ) ( ), 石製鎔范 의한 주조기법 이외에도 실납법 失臘法 주물

사법 등 ( ) ( ) 鑄物砂法 다양한 주조기법이 알려져 있었으며 주조시 주손 을 鑄損 땜질하는 보수

방법도 알려져 있었다.38)

한국식동검문화기는 크게 3 . 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기는 1 ( )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기로 요녕식동검 문화의 遼寧式銅劍 파급으로 인해 한국

식동검, ( ), ( ), ( 거친무늬거울 粗文鏡 청동의기류 중 방패형동기 防牌形銅器 검파형동기 劍把形銅

器), 나팔형동기 등이 출현하며 그 성립 과정에서 요녕식동검문화 요소를 특히 형태를 거의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등 요녕식동검문화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

기에는 북방문화 요소도 일부 받아들여저 복합되고 있다.

제 기는 2 한국식동검문화의 발전기로 요녕식동검문화 영향에서 탈피하여 북방문화 요소가

유입되면서 새로운 동령류 의 ( ) 銅鈴類 청동의기가 등장하고 주조기술의 발전을 비롯한 급격

한 변화로 인해 구리거울의 문양이 정문화 가 ( ) 精文化 이루어지고 동도끼와 같은 것도 한국

화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중국 중원문화의 영향도 받기 시작해 초기 형식의 투겁창, , 꺽창 동시 등이

38) 이건무 “ ” 청동기 유물의 땜질 기법 삼불 김원룡교수 ( ) . . .1987. 三佛 정년퇴임기념논총 고고학편 일지사

334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출현하게 되나 이들 청동기


11) 해보 용산리 대성 유적

대성유적은 창서유적과 함께 2000~2001 ( ) 년 재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

다 대성유적이 . 60m 위치한 곳은 용산리 대성마을 남쪽에 형성되어 있는 해발 정도의 높

이의 구릉으로 이 구릉은 동쪽의 월야천을 향하여 뻗어가고 있다 유적이 . 자리한 곳은 하천

과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주변의 지세가 한눈에 관망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사된 유

적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 2 11 , . 기와 삼국시대 주거지 기 구상유구 등이다 청동기 시대 주

거지는 평면형태가 말각방형으로 대팻날과 석촉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 주거지는 평면형태

가 모두 방형계이며 내부시설로 주공 화덕 벽구가 , , . , 확인되었다 수습유물로는 직구호 광

구호 이중구연호 장란형토기를 , , . 비롯한 각종 토기편들이 있다


3. ( ) 선돌 立石

1) ( ) 민족 신앙의 정신적 신체 神體

선돌은 국어사전 이나 국사사전 등에 『 』 『 』 의하면 선사시대 , 중 신석기시대 유물로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이나 약간 다듬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하나 또는 여러 개를 국경이나 분묘 등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거석 기념물의 하나인데 영어로는 멘히르 라 (menhir) 하며 종교적인 의

미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어쨌든 선돌은 “입석 선독 선바우 벅수 라고도 , , , ” 불리며 고인돌과 더불어 선사시대부터

시원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 널리 이어져온 거석문화 의 ( ) . 巨石文化 유산이다 특

히 선돌은 생성 변화 발전 복합 소멸이라는 , , , , ( ) 인간사 의 人間事 염원을 해결해 주는 정신적

신체 로 ( ) 神體 마음속에 간직되어온 관계로 개인 또는 마을 사람 전체가 소중히 여기는 민속신앙

의 소산물로 이어져 오고 있는데 그 기능과 역할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온 것으

번호

크 기 (cm) 시 설 출 토 유 물 참 고 장축 단축 깊이 벽구 노지

1 330 295 20 유 민묘로 파괴

2 520 340 20 다량의 토기편

3 360 350 35 호형토기. . . 자루달린토기 바리형토기 장란형토기

4 340 민묘로 파괴

5 가락바퀴. . . 항아리 장란형토기 바리형토기 대부분 유실

6 530 390 22 유 장란형토기. 바리형토기

7 320 296 26 항아리

8 660 34 대형항아리. ( ). . . 직구호 直口壺 사발 바리 가락바퀴 대부분 유실

342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먼저 선돌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고인돌과 같은 분묘 를 ( ) 墳墓 표시였을 것이라

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예가 주변에 너무 많아 그 말을 배제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함평군에도 신광면 보여리 보전마을 고인돌 앞에 세워진 거대한 선돌을 비롯해 나

산면 용두리 등 몇 군데 고인돌 무리 곁에 선돌이 서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능은 점차 사라져 가고 후대에는 민간신앙의 신체로서 변화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이경엽은 전남 지방에서의 선돌 위치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두 가지로 대별

하고 있다.45)

지역별로는 월야면(22 ), (15 ), (14 ), (11 ), (10 ), 기 손불면 기 나산면 기 학교면 기 신광면 기 함평읍․

해보면 각( 8 ), ( 7 ) . 8 기 엄다대동면 각 ․ 기 순으로 그 분포상이 나타났다 이를 보면 다른 개 읍면

에 비해 월야면에 선돌이 월등히 많이 분포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데 그 까닭에 대해서는 앞

으로 좀더 조사 연구해 보아야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1) ( ) 함평읍 자풍리 노송 老松 동자석

자풍리 노송마을에 있는 동자석은 엄밀히 구분해 2003년『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기

타 석조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그러나 . 여기에서는 이 유적이 선돌의 역할을 하고 있기

에 선돌 부류에 포함시켰다.

이들 동자석은 노송마을 동편 정자와 서편 정자 당산나무 옆에 60m 간격을 두고 동서를

향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모양은 . 합장을 한 소형 동자상으로 얼굴 형태는 심하게 마모되

346 ┃ 제2편┃ 선사시대의 함평

었으나 귀만은 뚜렷하다.

이중 동편 정자 곁의 큰 느티나무 옆

당산하나씨 동자석을 당산할매라 부르며

또 한기는 당산할배라 부른다. 전에는

정월 보름이면 당제를 지냈다.

이 동자석은 원래 간방산 동북쪽에

있던 고려시대의 사찰이던 극락사(極樂

寺) 입구에 있었는데 극락사가 폐사된

후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 마을

의 재앙을 막아주는 민속 신앙물로 숭앙

하고 있다.

크기 동편 ∶① 정자 곁 동자석 현재 높이 86 , 24 , 22 . ㎝ 얼굴 폭 ㎝ 얼굴 길이 ㎝

②서편 정자 곁 동자석 현재 높이 92 , 21 , 24 .


(9) ( ) 손불면 동암리 벽초 碧草 선돌

벽초 마을은 1600년경 광주정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벽초 선돌은 마을앞 도로 맞은편 논 가운데에 있는 마을 정

자와 노거수 물( 2 ) . 버드나무 그루 밑에 있다

마을나무이기도 한 이 노거수 버드나무 는 ( ) 500 수령이 약 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 14m, 5.4m . 둘레 정도이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 밑에 있는 선돌을 가리켜 선독할매라 부

르고 있고 매년 , 정월 보름이면 당산제를 지낸 다음 볏짚으로

만든 줄을 감는다.

이 선돌의 크기는 높이 100 , 46 , 23 ㎝ 하부 폭 ㎝ 두께 ㎝이

다.

(10) ( ) 손불면 동암리 복암 伏岩 선돌

복암 선돌은 마을앞 도로 맞은편 최종기 씨 소유의 밭에 있

다 마을에서는 . , 이 선돌을 가리켜 수살하나씨라 부르고 있고

2000년까지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제사를 지내고 볏짚으로 만

든 줄을 감았다고 한다 크기는 . 118 , 70 , 높이 ㎝ 하부 폭 ㎝ 두

께 18 . ㎝이다

복암 마을에는 원래 이 선돌 이외에도 약 100m 가량 떨어진

복암 저수지 아래에 1기의 선돌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그 선돌

은 복암 저수지 공사 때 매몰되었다고 한다


(13) ( ) 손불면 산남리 용흥 龍興․지사리 선돌

용흥 선돌은 마을입구 새마을 창고 맞은편 논둑에 있다 마을에서는 . 이 선돌을 가리켜

수살이라 부르고 있고 1950년대 후반까지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줄다리기를 한 다음 그 줄

을 음력 2 1 . 105 , 60 , 월 일 선돌에 감았다고 한다 현재 선돌의 크기는 높이 ㎝ 하부 폭 ㎝

상부 폭 22 , 30 .


(14) ( ) 손불면 북성리 차경 且京 선돌

차경마을에는 모두 합해 4 . 기의 선돌이 분포되어 있다

먼저 ①의 선돌은 마을 어귀 도로 오른편 박상중 씨 소유의 논둑에 있다 이. 선돌 주위

에는 이팝나무 2 . 그루와 느릅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박우규 씨 집 뜰에 있던 수령 약

300 , 년 정도 된 모과나무를 웃당산이라 하고 이 선돌을 아랫당산이라 하여 정월 보름이면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 . ④의 선돌에만 제를 지내고 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60 , 70 , 20 . ㎝ 하부 폭 ㎝ 두께 ㎝이다

②의 선돌은 박중상 씨 소유의 논에 있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선독이라 불리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20 , 26 , 40 , 15 . ㎝ 하부 폭 ㎝ 상부 폭 ㎝ 상부 두께 ㎝이다

③의 선돌은 ②의 선돌에서 약 5m 정도 떨어져 있고 이 선돌 또한 마을에서는 선독이라

부르고 있다 크기는 . 100 , 55 , 25 . 높이 ㎝ 하부 폭 ㎝ 두께 ㎝이다

④의 선돌은 ②의 선돌에서 약 70m . 정도 떨어진 밭둑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선돌을

가리켜 당산이라 부르고 있고 마을에 분포되어 있는 4기의 선돌 가운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매년 정월 보름날 제를 지내고 줄을 감는다 크기는 . 110 , 55 , 20 높이 ㎝ 하부 폭 ㎝ 두께

㎝이다.


(16) ( ) 신광면 보여리 보전 甫田 선돌

보전 선돌은 마을입구 도로가에 있다 좀더 . 자세히 소개하면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m . 떨어진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선독거리라 하고 이 선돌을 가리켜 수살맥이

라 부르는데 아직까지 특별한 제의는 지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선돌은 주민들의 민속적 신앙의 대상이었다기보다는 선사입석(先史立

石) . 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보여 진다 왜냐하면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이 선돌에 대해 제의를 지낸 적이 없었고 또 이 선돌에서 북쪽으로 약 10m 가량

떨어진 곳에 선돌과 석질이 같은 고인돌 1 (310 기 가 ×215×70 ) ㎝ 자리하고 있어 이와 관련

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보전 선돌의 크기는 높이 340 , 160 , 85 , 48 ㎝ 하부 폭 ㎝ 상부 폭 ㎝ 두께 ㎝로

그 규모면만을 볼 때 함평군에서는 가장 큰 선돌이다.

< > 

(23) ( ) 학교면 학교리 회춘동 回春洞 선돌

회춘동 선돌은 마을의 당산나무인 팽나무 아래에 있다 마을에서는 . 이 선돌과 팽나무를

대상으로 정월 보름날 당산제를 지낸다 제관은 . 연장자 중에서 선출되며 제의 당일 날 아침

이 되면 제사장 주위에 금줄을 치고 남녀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한다 이. 때 여자가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제의는 . - - - - - . 진설 헌주 재배 축문 소지 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85 , 28 , 18 .


(51) ( ) 해보면 산내리 원산 元山․산안 선돌

모평에서 시작되는 군도 13 . 호선은 산안에서 끝난다

모평 쪽에서 군도 13선을 따라 올라오면 산안 마을 어귀에 정자

가 있고 그 곁에 거대한 선돌이 서 있으며 이 선돌을 선독할매라

부르는데 크기는 높이 217 , 50 , 32 . ㎝ 하부 폭 ㎝ 두께 ㎝이다

또 이 골짜기에는 40 . 여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월 보름에 이 선돌에 줄을 감았는데 지금은 그 의식

을 행하지 않는다 년에 . 1984 국립광주박물관이 펴낸『함평문화유

적지표조사 에』 소개된 이 선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돌할머니는 썩은 동아줄로 머리를 칭칭 감았는데 낯모르는 사람은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

습에서 선돌 할머니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돌 . 할머니 옆에는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모정

이 있고 마을 뒤 봉암에는 깃대봉이 있어 마을 제를 행할 때 깃대를 꼽는 장소가 된다.

또한 마을 내에는 진대 솟대라고도 ( ) 1 함 가 개 있었는데 현재는 나무가 썩어 없어지고 그 아래 부분만 남아 있

다 진대는 . 부근의 산에서 장대와 같이 곧게 자란 나무를 베어다가 다듬어 세우고 맨 꼭대기에는 나무오리를 올려

놓았다고 한다 진대는 . . 지역에 따라 짐대라고도 하는데 마을을 지키는 신목으로서 솟대와 같은 뜻을 지닌다 진대

옆에는 당이 있어 6.25 10 ( ) 한국전쟁까지만 하여도 여 아름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마을 제 당제 를 지

낼 때는 선돌 할머니 옷 입히기 굿과 더불어 당제도 함께 올렸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58) ( ) 월야면 용월리 용두 龍頭 선돌

용두 마을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특히 함평군에서 제일 큰 150t의 고인돌이 있

는 마을이다.


(62) ( ) 월야면 계림리 주곡 舟谷 선돌

주곡마을은 6.25 ( ) 한국전쟁 때까지 마을이 있었고 마을 명칭은 형국이 행주형 行舟形 이어

서 주곡 이라 ( ) . 舟谷 불렸다고 한다

이곳의 선돌은 주전 마을 ( ) , 30 柱田 김영원 씨 소유의 대밭 속에 있는데 현재 약 °가량

기울어져 있다 사람들은 . 276 , 이 선돌을 가리켜 수구맥이라 부르며 크기는 높이 ㎝ 하부

폭 67 , 57 . ㎝ 두께 ㎝인데 이는 군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이 선돌이 있는 일대는 16 , 1986 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년 목포대

학교 조사진이 조사할 때 하천 변에 옮겨져 파괴된 고인돌의 덮개돌이 서로 겹치거나 흩어

져 있었고 제방 , 속에도 여러 기를 매몰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어 그 같은 사실을 증명

해주고 있다 따라서 . . 주곡 선돌은 이 고인돌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만하다

< > 


2. 유적개요 및 수습유물

1) ( ) 학교면 월산리 월산 꺾창 銅戈

현 광주항만청 학교무선취급소 부지내의 토광묘에서 1976 1 년 꺾창 점을 주민이 수습 신

고하였고 이 유물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봉부 의 ( ) ( ) ( ) 鋒部 일부가 결실되었으며 칠흑색의 백동질 에 白銅質 가까운 것으로 신부 身部

에 검푸른 녹이 나 있고 도능 모짐 과 ( . ) ( ) 刀稜 홈 이 血溝 봉부에서 합쳐지며 도능은 봉부에서

만 보이는 윤무병 교수 분류 2식에 해당하고 제작의 상한 연대는 초기 철기시대로 보고 있

다 길이 . 25.5cm, 7.5cm, 1cm. 폭 두께

< > 선사시대 화보를 볼 것


2) ( ) 나산면 구산리 출토 돌검 石劍

구산제 아래의 고인돌이 군집한 밭에서 밭을 갈다 발견한 것으로 파손된 부분이 없이 정

교한 솜씨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정교함은 오늘날 군대용 대검보다 우위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돌검이 쓰인 곳은 대개 가정에서 요리를 하거나 전쟁에서의 무기, . 사냥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산리 출토의 돌검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용한 흔적이 없고 또 그 섬세함 등을 고

려해 볼 때 이 유물은 실제 생활 용구였다기보다는 껴묻기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돌검은 크게 자루가 있는 유병식 을 ( ) ( ), ( ) 有柄式 비롯해 유경식 有莖式 무경식 無莖式 으로

나누는데 유경식과 무경식은 돌창 에 ( ) . 1 , 2 ( ) 石槍 가깝다 자루가 있는 돌검은 단 단병 二段柄

또 혈구 가 ( ) . 血溝 있고 없음에 따라 분류한다 돌검 중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이 홈이 없는

즉 파인 , 1 . 곳이 없는 단병식이다

구산리 돌검은 오르도스동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전남지방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역적인 특수성을 감안하여 그 상한 연대를 기원전 3~4 . 세기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돌

검도 이 상한 연대에 맞춰 볼 수 있다 현재 . .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체 길이

36cm, 4cm, 8.5cm, 6.4cm, 1cm. 폭 손잡이 길이 손잡이 폭 두께

< >

6) 엄다면 송로리 담안 수습 돌자귀

이창규 소유의 집안 텃밭에서 1989 2 . 2 년 봄에 점을 수습하였다 점 모두 몸체는 원통형

이며 날은 양면에서 비스듬히 돌을 떼어 정교하게 잘 다듬었다 엄다리 . 거주 이창규가 소장

하고 있다.

7) 엄다면 송로리 담안 유물산포지

담안마을 이점규 씨 댁 뒤편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낮은 구릉에 분포한다 이. 구릉 동쪽

사면부에서 돌자귀 2 . 점이 수습된 바 있다


1978 ( ) ( ) 년 일본의 히로시마 대학 야스다 교수가 廣島大學 安田喜憲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영산강 지류의 부식토를 채집하여 꽃가루분석 을 ( ) . 花粉檢査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부터 이 일대가 사람에 의해 파괴 또는 개간되기 시작했으며 주위에 소나무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욱 ,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쌀(Oriza satival rice) . 3000B.P(BC. 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그 쌀 생산의 실제 연대도 약1050) . 나 되어 이때 이미 영산강 유역에서 벼농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분검사법 은 (Pollen Analysis) Radio 늪 속에 묻힌 꽃가루가 썩지 않고 있기에 그 자체가Carbon dating과 같은 절대연대 결정의 자료로서 도움을 주어 당시에 살던 사람들의 기후

환경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탄화미 는 ( ) 炭化米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12 BC 7 , 호 주거지에서 세기 이전의 것이 발견되었고 이어 나주 나시면 가흥리에서 BC 10세기 이전의 것이 발견되어 우리나라 최고 볍씨로 지금까지 알려졌었다 그런데 . 이후 이러한 탄화미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만한 일이벌어지고 말았다.

1994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에 오창 과학산업단지조성과 관련하여 문화재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중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구석기 문화층과 토탄층을 확인했고, 이어1997년부터 2001년 사이 이곳에서 고대 볍씨 18 알, 유사 볍씨41알  등 모두 59  알의 고대 탄화  (炭化 )볍씨를  발굴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이 볍씨들은 탄소연대측정 결과 이제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 ) 성   출토 볍씨보다도 무려3000 년이나 더 오래 된 것으로 평가받아 세계를 놀라게 했다 .

이러한 사실은 곧 세계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어 이후 2003 10 22 년 월 일에는“국제적으로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성 출토 볍씨보다도 약 3천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의 볍씨가 한국에서 발견됐다 고” 영국 BBC . BBC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당시 인터넷판은 기사에서 “충북대 이융조 교수 연구팀이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고대 탄화 볍씨를 발굴했는데 59 , 개의 볍씨를 대상으로 탄소연대측정법을 실시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고” 전했다 또. 기사에 따르면 이들 “ ‘소로리 볍씨 의’ 유전자구조는 지금의 쌀 유전

자와 달라 이 교수 연구팀의 발굴로 인해 쌀의 진화과정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가능케 하고 또, 고대 볍씨가 출토된 한국 중부지방은 아시아 석기시대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 고” 소개했다 다시 . 말하면 소로리 유적지는 마지막 빙하기의 기후와 식생 등을 알아내는데 중요한 유적지이라는 것이다.이로써 우리 함평지역과 인접한 나주 가흥리 출토 볍씨는 이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출토 볍씨로 알려졌으나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성 출토 볍씨보다도 무려 3천년이나 더 오래된 세계 최고의 볍씨가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유적에서 발굴됨으로써 그 자리를 소로리 출토 탄화미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다시 . 말하면소로리 출토 탄화미는 나주 다시면 가흥리 것보다 무려 7 천년이나 앞선다(지금부터 1만년전의 볍씨).


┃제1장┃ 진국 의 ( ) 辰國 해체와 마한의 발전 380

집필 / 이명헌

┃제2장┃ 마한시대의 함평 390

집필 / 이명헌

┃제3장┃ 신미제국( ) 新彌諸國 과 함평 406

┃제4장┃ 백제시대의 함평 411

집필 / 이명헌

┃제5장┃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433

집필 / 이명헌

┃제6장┃ 마한 백제의 · 유적과 유물 440

집필 / 이명헌



제제 장1 진국( ) 辰國 의 해체와

마한( ) 馬韓 의 발


절1 ( ) 진국의 해체와 삼한 의 三韓 대두

원삼국시대 즉 삼한사회 가 ( ) ( ) . 三韓社會 이룩되기 전에 삼한의 땅에는 진국 이 辰國 있었다 그

러나 이 진국이 언제 생겼고 언제 어떻게 해체 되었는가는 문헌의 빈약과 연구의 미진으로 구

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의 북쪽에 위만조선이 존속하고 있을 때에 그 남쪽인 한반도 중․남부지역

에는 진국이 있었다 이. . 진국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아직도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다

만 진국은 , , ( ) 고대국가로 보기 어렵고 한족 의 韓族 여러 부족과 소국들이 제의와 중국과의 교역

등을 통해 상호 결속한 완만한 형태의 연맹체로 여겨진다.

또 진국의 생성과 관련해서는 북방보다 훨씬 원시성을 면치 못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한

반도 중남부지역 ․ 진국의 선주민들이 선진적인 북방의 문명이 이입 됨에 ( ) 移入 따라 그 영향으로

인해 적어도 기원전 3~4 . 세기 무렵 생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진국은 많은 소국을 거느

리고 있는 부족연맹사회였을 것이다 즉. 진국의 통수권자였던 진왕은 왕권 소유자라기보다는

최고 맹주로 해석함이 옳을 것으로 보이며, ( ) 진왕은 목지국 目支國 49)의 거수( . ) 渠帥 族長 가 세

습( ) . 世襲 하였다

또한 위만조선이 망한 뒤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왔고 이보다 , 앞서 위만이 고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을 때에도 상당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진번군이 폐지되는 등의 변동에 따라 적지 않은 유이

민 들이 ( ) . 流移民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진국에는 한강 이북의 유민 이 ( ) , 流民 끊임없이 유입하여 북방의 문화를 전하였고

특히 고조선이 해체되면서 이들 해체된 집단이 대거 남동으로 이거하여 이미 선착한 진국의 주

민들과 융화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 말해서 한 단계 앞선 금속기문화를 가진 고조선계 주민

들이 이주해 옴에 따라 한반도 , . 중남부지역의 ․ 한족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대전 익산 대구 경주 김해 마산 , - , - , -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새로운 금속기문화의

유적과 유물은 그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그. ( ), ( 결과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 馬韓 변한 弁

韓), ( ) ( ) . 진한 의 辰韓 삼한 이 三韓 형성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삼국지 위지 『 ( ) ( 三國志 魏志 』 동이전 한전조 東夷傳 韓傳

條)50)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9) 월지국 이라 ( ) . 月支國 표기된 곳도 있는데 여기서는 에 『後漢書』 표기된 목지국으로 기술한다


당시 삼한사회는 모두 78 , ( ) 개의 소국으로 형성되었는데 그 강역을 요약해 비정 해 比定 보면

다음과 같다.

마한 개국이며 ( ) 54 , , 馬韓 ∶ 현 경기도 일부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일대

진한 개국이며 ( ) 12 , , 辰韓 ∶ 현 경기 강원도 일부 경상북도

변한 개국이며 ( ) 12 弁韓 ∶ 현 경상남도 일대

이 가운데 마한의 소국이었던 백제 가 ( ) ( ) , ( 伯濟 후일 백제 로 진한의 百濟 소국이었던 사로국 斯

盧國) ( ) . 이 신라 로 新羅 번창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 함평은 진국 영속이었다가 마한 영속으로 되었다 국명에 . ( ) 있어 마한 馬韓 의 “마( ) 馬 ”

는 본래부터 진국의 일명이었던 고마 에서 ( ) , ( ) 蓋馬 온 것이며 변한 의 弁韓 “변 은 (弁” 그들이

사용한 관모 에서 ( ) .


제 절2 ( ) 마한 소국 의 小國 위치 비정

마한 소국의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몇몇 학자가 마한 54개국의 위치를 비정한 논

문을 내놓은 바가 있다.

그러나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학자마다 비정한 나라의 위치가 서로 다르고 대개 전라북도와

충청도에 비정한 나라가 많다 앞으로 . 마한 소국의 위치 비정은 고인돌과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지방을 중심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며 통일된 학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우리 함평군에 적어도 1~2 . 의 마한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나라 이름은 비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 1~2 함평에 적어도 개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보

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 ( 정약용은 그의 저서『대한강역고 大韓疆

域考) ( ) . 』삼한총고조 에서 三韓總考條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널리 살피 건데 마한 54 54 ( ) . 50 , 30 국이란 개 현 이다 옛날 縣 중국에서는 대개 리 리를 나라라고 불렀는데 강황요

육 과 ( ) ( ) . 姜黃蓼六 같은 것이 이런 유 며 類 오늘날 일본의 법 역시 현을 나라라 하여 세습하고 있으니 제후와 같다 마

한의 54 ( ) . 개국 역시 이런 유 였을 類 것이다 ”

또 삼국사기 에 『 』 의한 분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돼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조 에 ( ) ( ) ( ) 韓傳條 나오는 제국 은 諸國 오늘날 국가의 뜻 이라기보다는 읍성 邑城 또는 대

취락 에 ( ) ( ) , , ( ) 大聚落 가까웠을 것이고 이것이 뒷날 삼국 의 三國 주 군 현 이 州郡縣 제도화되기 이전까지 기본적인 지역

단위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 함평군 지역에는 백제 때 두개의 현 즉, ( ) 굴내현 屈乃縣 51)과 다지현( ) 多只縣 52)이 있었

다 위의 . , 인용문에 의하면 굴내현과 다지현이 마한 때는 모두 부족국가였다고 일단 볼 수 있

다 그런데 . . 이 가정을 다시 확증해 주는 것이 그들이 남긴 유적이다

선사시대에서 마한으로 이어지는 유적을 살펴보면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함평천을 중심으로 하는 유적이며 또, 하나는 고막천을 중심으로 하는 유적인데 이들 두개 집


마한에는 성이 없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실제 많은 성이 있었음이 입증된 바 있

다.



옛 굴내포55) 인근으로 당시에는 교통의 요충지로 또 넓은 들이 있어

식량이 풍부한 고대 부국 의 ( ) 富國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어서 마한 소국 나아가 신미제

국 의 ( ) . 新彌諸國 중심국으로 손꼽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기 해 ( ) ( ) ( ) 附記 두고자 하는 것은 김정호 가 金井昊 함평모씨 를 咸平牟氏 언급하면서 제

언 한 ( ) . 提言 부분의 글이다

“이 집안은 경상도로 옮긴 자손과 전남북 서부를 중심으로 사는 수가 거의 같은 수효를 보이고 있다. 옛날 성

( ) ( ) ( ) 姓 이 출신 지역의 이름이었음을 생각할 때 고창 의 高敞 백제 때 이름이 모양부리 라고 毛良夫里 이두식으로 표기

했던 점 그, ( ) 고을의 마한 때 부족국가 이름은 모노비리 였을 牟盧卑離 것이라는 점 등과 관련해 현존한 모씨들이 주

로 토반 세력으로 살았던 모평 백제 ( . , ) 牟平 때 다지 고려 때 모평으로 개칭 과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56)

모평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근의 군집한 고인돌 사촌의 , , 돌널무덤 사산의 독널무덤

과 돌방무덤 넓게 , . 펼쳐진 평야 등 고대 소국 형성의 요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모평의 원뜻이

“ ” 물뜸 이고 면 의 , ( ) ( ) 面 현재 지명인 해보 가 海保 역시 “물뜸 이라는 ” 것을 생각할 때 현재

학자들이 모수국 을 ( ) ( ) 牟水國 경기도 수원 으로 水原 비정하고 있으나 수원보다는 모평이 설득력

이 있으며 모씨들이 많이 사는 곳 중의 하나인 인근의 고창이 모노비리로 비정되었는데 모수와

55) 구주포라 주민들이 흔히 부르는 곳 백제 . . 때 굴내현에 있던 포구라 하여 굴내포라 불렀다고 전함 옛 기록에도 굴내포

( ) , 屈乃浦 로 표기되어 있고 백제 때는 이 포구가 서남해안 일대에서 제일을 자랑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


그간 전남의 여러 군에서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마쳤고 그, 결과 전남에 분포하는 고인돌이

약 20,000 . , , 여 기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영산강 유역인 함평군 나주시 영암군에 고

분이 약 300 . 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는 통계도 나왔다 이들 유적들이 마한 소국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세력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사실일 것이다.

다음 < > , 표 를 보면 학자들의 마한 소국 비정이 얼마나 각각이며 하루 빨리 통일된 비정설이

나와야겠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표 마한 소국의 위치 비정 比定

나 라 이 름                                              위 치 비 정

             정인보( ) 鄭寅普 의 비정 이병도( ) 李丙燾 의 비정 천관우 비정

원 양 국 爰 襄 國

          경기장단( ) 長湍 ∶구려 때의

     ‘야야 니 ( ) 耶耶 ’ ‘아내’로

     읽음(長淺城縣 一云

     耶耶一云夜牙)

                             경기 수원 음덕∶고려시대의

                   재양현( ), ( ). 載陽縣 고안양현 古安陽縣 여람

                 남양부조를 볼 것

                                                                    *전남

                                                                  비정분만 옮김

모 수 국 牟 水 國

                    경기 수원∶구려의

                    ‘매홀( ) 買忽 ’이니

                     모수는‘물’이다.

                                        수원 일대 구려의 ∶ 매홀( - - 水城 수성 의

                                              뜻 신라 ). 수성

상 외 국 桑 外 國

                      황해 봉산( ) 鳳山 ∶구려 때

                   휴류암 이니 ( ) 鵂鶹巖 ‘병바희’로

                            읽을 것이다.

                                                 수원 장안, , 우정면∶장안 우정면을 속칭

                                      삼귀( ), ( ), ( ) 三歸 삼귀 三貴 삼괴 三槐 라하고

                                           고려때는 쌍고현( ) 雙皐縣 임

소석색국 小石索國

전북 순창( ) 淳昌 ∶백제

역평현 이니 ( ) 礫坪縣 ‘잔돌새’로

읽을 것이다.

경기도 서해의 어느섬 위서 ?∶ 백제전

개치왕 표문 ‘西界 小石山 北國海中

云云’

대석색국 大石索國

전북 임실( ) 任實 ∶백제 때

역평현 이니 ( ) 礫坪縣 ‘돌새’로

읽을 것이다.

소석색국의 인접?

우휴모탁국 優休牟國

황해 재령( ) 載寧 ∶구려 때

식성현( ) 息城縣 이니

‘쉬음들’이다

경기 부평( ) 富平 ∶구려의

주부토군( ). ( Ju) 主夫吐郡 우휴의 반절 反切

주 와 (Ju) 음이 통하고 모탁은

‘수제 물둑 의 ( . ) 水堤 ’ 뜻이니 후에

부토 보둑 로 ( . ) 夫吐 변한 듯

신분활국 臣濆活國

전남 낙안( ) 樂安 ∶백제 때

분차군 이니 ( ) 分嵯郡 신분치’로

읽을 것이다.

경기 양성( ) ( ). 陽城 ∶사복홀 沙伏忽 분활과

복 은 ( ) ( ) ( ) 伏 동음 이사 로 異寫 적 赤 의

방언( ) 邦言 인 ‘ ’ 밝 의 사음( ) , 寫音 이요

신 과 ( ) ( ) ( ) 臣 사 는 沙 동음으로 적의 의 義 를

수식한 말인 듯. 즉

‘ ’ 샛밝 진적 의 .( ) 眞赤 ‘샛’의

차음( ) 借音

백 제 국 伯 濟 國

경기 광주( ) ( ) 廣州 ∶백제 구도 久都 경기 광주 백제는 ∶ 위례마을( ) 河北 에서

일어나 후에 하남 광주로 옮겨 그곳

지명에 의해 백재 라 ( ) . 伯濟 했다



기원 전후부터 서기 300 3 . 년경까지의 약 세기를 고고학에서는 원삼국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이 시기는 국사에서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시대 읍성국가시대 , , . 등 여러 가지로 불러왔다 또 고

고학계에서는 김해시대 웅천기 , . 또는 초기 철기시대라 불렀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 『 』 의하면 이 시기는 엄연히 삼국시대며 실제로 삼국시대라면 누구나 삼

국사기의 편년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위에 든 것 같은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 ( ),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삼국시대의 원초기 또는 原初期 원시 단계의 삼국

시대라는 뜻에서 원삼국시대 라는 ( ) . 原三國時代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57)

마한이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정확한 사료가 없다 다만 . (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후한서 後

漢書) , 』에 삼한의 위치를 비롯해 소국의 수와 호수 마한의 규모와 도읍지 및 마한이 실질적으

로 삼한을 통솔했다는 위상 등의 내용 이외 건국과 , 관련해서는 다른 사서와 같이 일체 언급이

없다.

“한 은 ( ) . ( ), ( ), ( ) . 韓 세 종족이 있다 첫째는 마한 둘째는 馬韓 진한 셋째는 辰韓 변한 이다 마한은 卞韓 서쪽에 있으며

모두 54 . 12 나라인데 그 북쪽은 낙랑과 연결되었고 남쪽은 왜와 연접되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모두 나라인데

그 북쪽은 예맥 과 ( ) . 12 濊貊 인접되어 있다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고 역시 모두 나라인데 그 남쪽은 왜와 인접해 있

다 이렇게 . , , 78 . ( ) . 해서 마한 진한 변한 세 종족은 도합 나라이다 백제 도 伯濟 그 중 한 나라이다 이 중에 큰 나라

는 만여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수 천호에 불과하다 이들은 . 4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땅을 합치면 천리가

된다 그리고 . ( ) .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이르러 끝이 났으니 모두 옛날 진국 이다 이 辰國 중에 마한이 제일 큰데 함께

그 종족 중에서 사람을 뽑아 세워서 진왕 을 ( ) ( ) 辰王 삼고 월지국 月支國 58)에 도읍했다 이리하여 . 이 진왕은 이들 삼

한 땅을 모두 통솔했으니 실상 이 모든 나라 중에서 왕 노릇하기 시작하기는 마한이 제일 먼저였다.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망해서 군사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마한을 공격하여 깨치고 자기가 한왕 이 ( ) 韓王 된 일

이 있었다 그러나 . . 준은 다시 마한에게 망하고 마한 사람이 다시 서서 진왕이 되었다 ”

이와 달리 안정복 은 ( ) ( ) ( ) 安鼎福 그의 저서 동사강목 에서 『 東史綱目 』 기자조선 箕子朝鮮 의 패망

과 마한 건국을 연결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그, .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57) 전라남도, 2 , 1993, 230 . 『전라남도지』 권 쪽

58) 다른 사서에는 월지국 이 ( ) ( ) . 月支國 없고 목지국 이 目支國 기록되어 있고 학계에서도 목지국으로 통용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도 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한왕이 되어 금마군에 도읍했다고 하였으나

마한은 이 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약용도 그의 저서『대한강역고( ) ( ) 大韓疆域考 』중「마한고 馬韓考 」에서 기준이 남으로

올 때 이미 마한이 있었고 기준이 마한을 열었다는 설은 잘못이라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마한은 지금의 익산군에 그 총왕이 도읍했다 지리지 에 . ( ) 地理志 말하기를 ‘금마군 은 ( ) 金馬郡 본래 백제의 금마

저군 이다 라고 ( ) . 金馬渚郡 ’ 했다 정인지의 . ( ) 지지 에는 地志 ‘금마군은 본래 마한국인데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합하고

그 후부터 금마저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미륵산에 석성이 있다 세간에 ( ). ( ) ( ) 전하기를 기준이 처음 쌓았다고 한다 또 후조선 의 後朝鮮 무강왕 武康王 및 비

( ) ( ( ) ( ) 妃 의 능이 있다 세간에서 부르기를 말통대왕릉 이라 末通大王陵 하는데 말통대왕은 백제 무왕 이며 武王 어릴 때 이

름은 서동( ) ). 薯童 이다

살피건대 한사 에서 , ( ) ( ) . 漢史 말한 목지국 은 目支國 의심할 나위 없이 익산이다 마한이란 나라가 본래부터 있었는데

기준이 습격해와 돌이키지 못하고 멸


따라서 위의 정약용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익산의 기씨 마한은 마한 54 ( ) 개국 중 목지국 目支國

의 건패 로 ( ) . 建敗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다음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 』 BC. 20 ( . 38) BC. 19 ( 39) 년 혁거세왕 조와 년 혁거세왕 조에

의하면 원래 , 마한이 강력한 지역연맹체로 삼한을 통솔했다는 중국의 사서가 사실임은 입증되

나 이, 때에 이미 진한과 변한이 강성해져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마한이 강력히 규

제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미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한 .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

다.

“봄 2 . ( ) 월 호공 을 瓠公 마한에 보내 수교코자하니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진 변 두 ( ), ( ) 辰 卞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와서 조공을 보내지 않으니 사대 하는 ( ) ? 事大 예가 이럴 수 있소 하였다 호공은 ’ . ‘우리나라는 이

성 이 ( ) ( ) ( ) 二聖 일어나시고 인사 가


○ BC. 6 ( 13) 년 온조

8 . ( ) ( ), 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 한 遷都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 浿河 남으로 웅천

( ), ( ), ( ) . 熊川 서로 대해 동으로 大海 주양 을 走壤 한계로 하였다

9 . ( ) . 월 성궐 을 城闕 세웠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본래 마한 땅에 빌붙어 살더니 온조왕 10년으로부터 점

차 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북쪽의 마한 땅을 비롯해 금강유역까지 빠르게 영속하였을 뿐만 아

니라 온조왕 27 . 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마한을 망하게 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망한 것으로『삼국사기』는 정리하고

있으나 이, , 기록은 전라북도 일부지역까지를 말하는 것이고 백제의 변방에 위치한 남쪽 특히

영산강 유역은 마한의 강력한 부족연맹체 로서 ( ) 部族聯盟體 독자적인 문화권을 계속 형성한 것으

로 보고 있다 그것은 . 다음에서 인용한 문헌통고 등 『 』 여러 기록에서도 그러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44 ( 17) ( ) ( ) ( ) . ( 년 백제 다루왕 한 이 漢 마한 사람 소마시 를 蘇馬諟 봉하여 염사군 으로 廉斯君 삼았다 마한의 염사 염

사는 지금 어느 곳인지 미상 사람 ) ( ) 소마시 등이 낙랑에 나아가 토산물을 바치므로 제 가 帝 그를 봉하여 염사군을

삼고 낙랑군에 예속시키니 사시로 조알하였다.”( ) 문헌통고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온조왕 , , 대에 마한의 총왕이 다스리던 나라는 망했지만 그 밖의 여러

소속되었던 나라는 복속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마시 등이 한군 에 ( ) 漢郡 나아가 토산물을 바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61 다음에서 보는바와 같이 신라기 에는 『 』 년에 마한 장수가 사로에

항복했던 것을 기록


○『위지 동이전 을 』「 」 비롯한 중국의 정사

“5 . 월이 되어 씨를 뿌리고 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고 놀아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춤을 . 출 때는 여럿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데 한 사람이 춤을 추면 수십 명이 한

꺼번에 일어나 서로 뒤를 따르면서 땅을 밟고 높이 뛴다 이. ( ) . 10 춤추는 모습은 탁무 와 鐸舞 같다 월에 농사가 끝나면

이렇게 또 한번 논다.

귀신을 몹시 믿기 때문에 고을마다 한 사람을 뽑아 세워서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

君) . ( ) . 이라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따로 읍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 라고 蘇塗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사방에서 . . 도망 온 사람이 이곳에 모여드는데 돌아가지를 않는다 이들은 도둑

질을 좋아한다 그들이 . .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불가에서 절을 세우는 것과 같다 ”

위의 인용문을 보면 마한에는 , ( . - ) 정치적인 군장 읍차 과 君長 邑借 제사를 담당하는 천군이

분리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천군은 별읍인 소도에서 농경의식과 종교의식을 주관했음을 알 수


제 장3 신미제국( ) 新彌諸國 과 함평

신미제국의 실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를 『 』 비롯한 삼국유사 등 『 』 우리나라 옛 사서에는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 ) ( ) ( ) 3 ( . 282) 중국정사 中國正史 인『진서 晉書 』「장화전 張華傳 」 태강 년 서기 太康 조의기록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나타난다.

“동이의 마한과 신미 여러 나라는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사는데 나라의 거리는 4천리며 대대로 붙이지 않

은 채 20 .( 여 개국이 살아오는데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헌한다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大海 去州四千餘里 歷世未附者

二十餘個國 竝遣使朝獻)”

또 진서 사이전 한 조에는 『 ( ) ( ) ( ) 晉書 』「 四夷傳 」 韓 마한의 사신이 진나라에 온 것을 다음과 같

이 기록하고 있다.

“함녕 년 년 에 ( ) 3 (277 ) (278) . ( . 280 ) 2 咸寧 다시오고 그 이듬해 도 또 와서 물건을 바쳤다 무제 태강 원년 太康 년 과

년 년 년 년 에 (281 ), 3 (282 ) ( ), 7 (286 ), 8 (287 그 나라 왕은 자주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고 共主頻遣使入貢方物 년 년 년

년 년 년 년 년 에도 ), 9 (288 ), 10 (289 ) . ( . 290 ) ( ) 자주 왔다 태희 원년 년 에도 太熙 동이교위 하감 에게 何龕 와서 물건을

바쳤다.”

위의 두 기록을 살펴보면 같은 282 ( 3 ) ( ) 년 태강 년 에 사이전 에는 「 」 동이마한 東夷馬韓 이 사신

을 보냈고 장화전 에는 , ( ) 「 」 동이마한 신미 가 東夷馬韓新彌 사신을 보냈다고 마한과 신미를 대등

한 나라로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바는 “동이마한신미제국( ) 東夷馬韓新彌諸國 ”이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의 진서 기록에 . (290), ( . 『 』 대하여 태희 영희 永熙 서진

혜제 연호 당시를 . 290) 근거하여 삼국사기 를 『 』 지었다는 김부식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이를 부정하였다.

“마한이 망했는데도 왕망 때부터 아래로 태강에 이르기까지 근 300 , 년간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때는 백제라 칭하

던 시기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 의 ( ) ( ) ( ) 丁若鏞 경우는『대한강역고 大韓疆域考 』중「마한고 馬韓考 」에서

신미제국의 실체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 위치 비정 등에는 이르지 못했다.

“진서에 안북장군 장화가 ( ) 20 安北將軍 마한의 신미제국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대대로 붙이지 않은 채 여

개국이 살아오는데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헌한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 신미가 어떤 나라인지는 알 수 없어도 요컨대

서진시대 에 ( ) 20 西晉時代 마한의 여러 나라가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관계로 여 개국이 각각 조헌했을

것이다 후한서에 . 54 ( ) 1 . ( ) ( ) 마한은 개국인데 백제 는 伯濟 본래 그 중의 개국이다 범엽 이 范曄 역사를 쓸 때 백제 伯濟

에는 통일하지 못한 곳이 남아 있었다고 했고 북사 에도 , ( ) ( ) . 北史 역시 백제 는 伯濟 마한의 속국이라 했다 ”

이와 관련하여 성낙준 은 ( ) 成洛俊 신미제국의 실체를 인정함과 동시에 위치 비정에 대해 다음

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72)

“3 . 세기 후반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마한 등 동이제국에서 중국의 진에 사신을 파견한 기사가 빈번하게 보인다

여기에 주목되는 부분은 마한 신미제국 , 20 ( ) . 등이 사신을 보내는데 여국이 역세미부 한 歷世未附 것으로 되어 있다

마한은 이미 함녕 3 (277) ( ) . 년 에 복래 하였다 復來 했으므로 역세미부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기 의 ( ) . 帝紀 마한과 장화전에 나오는 마한은 그 실체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73) 특히 신미국의 등장은

서남해안에 자리 잡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다 마한의 . 54개국 이름에

는 신미국이 보이지 않아 그 실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 20 신미국을 비롯한 여국의 위치에 대하여

‘의산대해 거주사천여리 라 ( ) 依山大海去州四千餘里 ’ 한 것을 근거로 중부 이남의 서해안으로 추정하거나74) 보다 구

체적으로 전라도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산재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근거로 영상강 유역의 옹관고분을 들기

도 한다 또한 . 신미국은 목지국 세력 해체 이후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마한의 잔여 세력으로서 『일본서기』신

공기 서기 ( ) 49( 369 ) ( . ) ( ) 日本書記神功紀 년 에 보이는 침미 의 忱彌 多禮 음이 신미 와 新彌 비슷함을 들어 동일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75)

또 이해준 은 ( ) 李海濬 위치 비정 뿐 아니라 신미제국의 존속 기간까지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

다.76)

“한국 역사상에서 마한 세력은 대체로 서기 369 ( 24) . 년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신미제국은 우리나라 사서에는 기록된 바 없지만,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 여러 학자들이 그 신미제국의 위치를

우리 함평군을 비롯한 영산강유역에 비정하고 있으며 그 주체를 독무덤 조성 세력으로 보고 있

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진서의 장화전을 소개하면서 “동이마한신미제국( ) 東夷馬韓新彌諸國 ”을 “동

이의 마한과 신미 여러 나라 로” 번역하였다 이는 . ( ) 신미 가 新彌 마한연맹체와 같은 성격을 가

진 종주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 신미의 여러 나라는 마한세력의 재편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신미의 여러 나라는 언제 설립되었을까?

이는 자료의 부족 연구의 , . 282 미진으로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서기 년에 신미국이

란 이름으로 진에 사신을 보냈고 20여 개국이 있는데 모두 조헌한다고 하였으니 그 이전에 이

미 태동했을 것이며 이때는 , 신미가 여러 나라를 대표하는 지배권을 행사하던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대형 독무덤이 출현하는 3 . 세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진서에 나타난 마한의

사신 파견 기록은 283 2 286 291 년부터 년간 끊겼다가 년부터 년까지 이어지고 그 이후에는 보

이지 않는다 이에 . . 대해 김학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진서에 나타나는 마한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차령 금강의 이북에 위치하던 초기 목지국 중심의 마한세력이 아니었

음을 알 수 있다 이는 . 백제의 고이왕대에 정복당한 차령 금강 이북의 마한을 제외한 차령 금강 이남의 마한 잔여

세력들의 역사 활동인 것이다 마한은 . 차령 금강 이북의 세력을 잃고 익산에 있던 건마국이 중심이 되는 세력으로

재구성되었으며 이들이 마한의 대표세력으로서 중국과 교섭을 시도한 것이 진서 277~282년까지의 교섭 기사인 듯

하다 그리고 . 그 후부터는 신미국으로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면서 이들도 독자적으로 마한과 함께 교섭을 시


그러면 신미의 여러 나라는 언제 백제에 영속되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도 아직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한국 . 역사상에는 마한의 잔여세력 즉 신미의

여러 나라가 백제에 영속된 것을 다음의『일본서기』신공기( ) 49 , 日本書記 神功紀 년에 나오는

반 설화적 기사를 들어 일단 369 ( 24 ) . 년 근초고왕 년 으로 보고 있다

백제의 청에 따라 장군 아리다베스( ), ( ), ( ), 荒田別 시카아베스 鹿我別 가라라가이시 木羅介資 사

사노궤 에게 ( ) ( ) ( 沙沙奴跪 명하여 정병을 이끌고 가라 방면으로 加羅 출병 가라로부터 비자본 比自

本)77) 등 7 . . 국을 평정하고 서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병사를 서쪽으로 이동 고해진( ) 古奚津 78)에 이르렀다. , ( ) 남만 침미다례 忱彌多禮 79)를 없애고 백제에 주었다. 백

제왕 초고 와 ( ) ( ) . 肖古 왕자 귀수 가 貴首 군사를 이끌고 왔다 이때 ‘북리벽중포미지반고사읍(北利辟中布彌支半古四

邑)’80)이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백제왕 . , ( ) 부자와 아리다 가라라 등이 모두 의류촌 意流村 81)에서 만났다.<仍移兵西

廻 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伏 是

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 木羅介資等 共會意流村( ) > 今云州流須祗 相見欣感 ”

이 기록이 전라도 지방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주 9)에서 보듯이 학자간의 위치 비정이 다르고

이에 대한 후학의 연구도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강역을 크게 확장한 왕이다 평양까지 . (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 故國原

王) 372 ( ) ( ) 을 전사케 하였으며 년에는 진 에 晉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고 국사 國史 를 쓰

게 하는 등 국력을 튼튼히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남쪽의 경략에도 힘을 썼으리

라는 점에는 수긍이 간다 또. 369년에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까지를 정복한 백제

가 그 세를 과시하기 위해 372 . 년에 진과 외교 


신미의 여러 나라가 이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 대 이후 백제가 고구려와의

국경에서 분쟁이 심해 국력을 북쪽에 쏟을 수밖에 없어 남쪽은 한번 스쳐간 정도로 방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 함평지역이 신미제국에 영속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 신미제국 중 중심적 거점 세력이

살았다는 점에서도 지역 내 분포하고 있는 대형고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와 . 관련해 성낙준

은 당시 신미제국의 주요 거점들을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옹관고분이든 석실고분이든 대형의 봉토분이 분포한 곳은 유력한 토착집단 또는 재지세력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특히 옹관묘의 중핵지대인 나주시 반남면이나 영암군 시종면을 비롯하여 위로는 광주광역시와 함평군 월야면 일대,

서쪽으로는 함평읍과 무안 사창리 일대 남으로는 , 해남 북일면 일대에 대형고분이 분포하고 있어서 이곳들을 중요

거점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82)

이러한 견해는 지금 많은 학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갖는 견해이다 위에서 . 살핀 바를 요약

한다면 신미제국은 마한의 재편세력으로 대략 3세기 말 이전에 우리 함평지역을 비롯한 영산

강 나아가 , 282 ( ) 전남지방에서 연맹체를 형성하여 년에는 진 과 晉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강

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은 독무덤이라는 독특한 지역 묘제를 성립시켰으며 적어도 5세

기 말까지는 존속하였다.


앞장 에서 ( ) ( ) 49 章 말한 바와 같이 한국역사에서는『일본서기』신공기 日本書記神功紀 년조를들어 함평을 비롯한 영산강유역 나아가 , 369 ( 24) 전남지방이 년 근초고왕 에 백제에 영속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백제의 이 지역 정복은 정치적 복속 까지는 ( ) 服屬 이르지 못해 이 지역은 마한의전통을 이은 신미제국으로 적어도 5 ( ) 세기까지는 존속하면서 독특한 독무덤의 지역묘제 地域墓制를 형성하였고 특히 , 우리 함평지역은 마한시대나 신미제국시대에 걸쳐 중심적 역할을 했을 거점세력이 살았음을 군내 곳곳에 분포하고 있는 대형고분들이 말해 주고 있다 앞으로 . 이 고분

들이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밝게 규명되리라 믿는다.

우리 함평지역을 비롯한 영산강유역 나아가 , 전남지방이 언제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었는가에대해 학계에서는 다음 기록 즉 삼국사기 백제본기 , ( ) 20 (498) 『 』 동성왕 년 조의 東城王 기록을 주목하고 있다.

“8 . ( ) ( . ) 월 왕이 탐라 가 耽羅 조공의 예를 닦지 않으므로 친히 치기 위하여 무진주 현 武珍州 광주 에 당도하니 탐라가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를 청하므로 드디어 중지하였다 탐라는 . ( ) .( 곧 탐모라 耽牟羅 八月 이다 王以耽羅 不修貢賦親王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耽羅卽耽牟羅).”

왕이 친히 광주까지 온 것은 당시 이 지방이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일 복속되지 않았다면 이 지방에 와서 전쟁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 이 기록은 백제가 신미의 여러 나라는 물론 제주도까지를 복속시켰다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 5 우리 함평지역은 세기 말경 백제에 완전 영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의 일파 인 ( ) ( ) 一派 부여씨 의 扶餘氏 집단이 남으로 내려와 마한의 왕으로부터 북쪽 100 . ( ) ( ) 리 땅을 얻어 건국한 나라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시조 건국 始祖 설화 建國說話 와 개치왕 이 ( ) ( ) 蓋齒王 북위 에 北魏 보낸 국서 중에 “신여고구려원출부여( ) 臣與高句麗源出扶餘 ”라는

말이다 그리고 . ( ) ( ) 백제의 왕묘로 추정되는 서울 석촌동 의 石村洞 기단식돌무지무덤 基段式積石塚이 압록강유역의 고구려 것과 직결된다는 고고학적인 발굴 연구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백제 의 ( ) ( ), ( ), 伯濟 건국 초기 지배적 집단으로는 온조집단 溫祚集團 비류집단 沸流集團 북부의

해씨 및 ( ) ( ) , ( ) . 解氏 진씨 집단 흘우 집단 眞氏 屹于 등이다 이들은 시기적으로는 약간 다르게 남으

로 내려와 살면서 점차적으로 통합되었다고 본다 건국 . , ( ) 설화에 보면 처음에는 미추홀 彌皺忽

에 자리 잡은 비류집단이 주도권을 장악하다가 아우인 온조집단으로 합류하였다.

백제국은 온조왕 13 (BC 6) ( . ), ( . 년 에 이르면 북으로는 패하 浿河 예성강 남으로는 웅천 熊川 안성천 금강 동으로는 , ?), ( . ), ( ) 주양 춘천 서로

제 절2 ( ) 백제의 관제 와 官制 함평백제의 관제는 260 ( 27) , 년 정월에 古爾王 정비되었는데 백제가 삼국 중 제일 먼저 관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민에 비해 지배자인 유민이 훨씬 뛰어난 기술문화를 가짐으로서 토착

민의 부족적 기반을 ( ) . 部族的 쉽게 수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고이왕 이전의 관제에 좌보 우보 좌장 등의 ( ), ( ), ( ) 左輔 右輔 左將 관직이 보이고 그들에게 병마( ) ( ), ( ), 兵馬 에 대한 일을 맡겼으며 좌우보의 ․ 임명은 주로 왕족이나 북부의 해씨 解氏 진씨 眞氏동부의 흘씨 집단에 ( ) . 屹氏 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관제는 우리 함평과는 무관하다 이. 때 우리 함평은 마한 아니면 신미제국에 영

속되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제 절3 ( ) 백제의 행정구역 行政區域 과 함평

백제의 행정구역과 관련하여『삼국사기』백제본기( ) 31 ( 13) 33 百濟本紀 온조왕 년 서기 조와 년

( 15) . 서기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온조왕 31 ( 13) 년 서기 조

“봄 정월에 . ( ). 국내의 민호를 나누어 남북


제 절4 백제의 문화와 함평

백제의 문화는 북방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백제 전형의 섬세하고 우아한 문화를 형성

시켰고 이 문화는 신라로 이어져 신라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하였다.

신라의 중요 사찰과 탑 등



제 절5 ( ) 백제의 토속신앙 土俗信仰 과 종교

1. ( . , , ) 소도 蘇塗 솟대 짐대 솟대가

백제의 토속신앙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불교가 . 들어오기 전의 신앙을 토

속신앙이라 할 때 그것은 무속신앙 이 ( ) 巫俗信仰 되고 “무 는 ( ) 巫 ” 신라에서 왕의 명칭인 “차

차웅 과 ( ) 次次雄 ” 같다고 하였으므로 무격신앙 이 ( ) 巫覡信仰 고대 우리나라에서 갖는 비중은 참

으로 큰 것이다.

이 무격신앙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이 마한 지역에 존재한 소도 신앙인 것이다. 소도신앙은

앞장 마한의 풍속에서 살펴 본 바가 있다.

1970 ( ) ( ) ( ) 년 대전 괴정동 에서 槐亭洞 소도 그림과 다른 면 에 面 농경문양 이 農耕文樣 새겨진 농

경문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 ) 유물은 청동기 문화의 소산 인 所産 동시에 농경 사회에서


3. ( ) 도교 道敎

도교는 후한의 장릉 이 ( ) ( ) ( ) 張陵 종래의 노장사상 에 老莊思想 신선술을 가하여 창시 創始 하였음

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가사상 에 ( ) 道家思想 신선술을 가미한 도교가 언제부터 백제에 전래했고 함평을 비롯한 이웃

지역에 어느 정도 포교되었는지는 전거할 기록이 없어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고구려 고국원왕 이 ( ) 故國原王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므로 근초고

왕 은 ( ) ( ) 近肖古王 태자 太子 110) 를 파견


3. ( ) 도교 道敎

도교는 후한의 장릉 이 ( ) ( ) ( ) 張陵 종래의 노장사상 에 老莊思想 신선술을 가하여 창시 創始 하였음

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가사상 에 ( ) 道家思想 신선술을 가미한 도교가 언제부터 백제에 전래했고 함평을 비롯한 이웃

지역에 어느 정도 포교되었는지는 전거할 기록이 없어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고구려 고국원왕 이 ( ) 故國原王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므로 근초고

왕 은 ( ) ( ) 近肖古王 태자 太子 110) 를 파견


제 절1 ( ) 백제의 멸망과 당 唐 지배기의 함평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준비를 하게 된 것은 655 . 5 년경이다 이후 년간 백

제 정벌을 목표로 군사적 경제적 준비를 끝낸 신라는 당 에 ( ) ( ) 唐 사신을 보내 동맹군 同盟軍 의

출정을 협의하였다.

659 ( ) ( ) 660 1 ( ) 년에 아찬 진주 를 眞珠 병부령 에 兵部令 임명하고 년 월에는 김유신 金庾信 을 상

대등 에 ( ) . 上大等 임명하여 군사적인 체제를 마쳤다

660 3 , ( ) 13 ( ) 년 월 소정방 을 蘇定


○ 김부식의 논( ) 論

“ ‘ 신라의 고사에 하늘이 금궤를 내려 주었으므로 성을 김 씨라 ( ) . 金 하였다 하였으나 ’ 그 말이 괴이하여 믿어지

지 않는다 신 이 . ( ) . 臣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그 말이 오래도록 전해오기 때문에 깎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또 들

으니 신라 사람이 자칭 소호김천씨 의 ( ) . < ( ) 小昊金天氏 후손인 까닭으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신라 국자박사 國子博士

설인선 이 ( ) ( ) ( ) ( ) 薛因宣 지은 김유신의 비 및 박거물 이 朴居勿 글을 짓고 요극일 이 姚克一 글씨를 쓴 삼랑사 三朗寺 비문

에 보임>

고구려 역시 고신씨 후손이므로 ( ) ( ) . < > 高辛氏 성을 고 씨라 高 하였다고 한다 진서에 보임

고사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하였고 또 .’ , 이르기를 ‘진한의 난리시대에 중국 사람이 많이 해동

으로 갔다 하였으니 .’ 삼국의 조상이 참으로 옛 성인의 자손이었던가 어찌 ? ( ) ? 그리 나라를 오래도록 향유 享有 하였던고

백제의 말엽에 이르러 행하는 짓이 거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이로움과 편의를 따라 신라의 중성 과 ( ) ( 重城 거진 巨

鎭)을 탈취하기를 마지않았으니 이른바 ‘ ’ 어진이와 친하며 이웃과 좋게 지냄은 나라의 보배 라는 것이 아니다. 이

에 당나라 천자는 두 번째 조서를 내려 그 원혼을 풀라고 하였는데 겉으로 따르는 척하고 안으로 어기어 대국에 죄

를 지었으니 망함이 마땅하다 하겠


제 절2 ( ) 백제 유민 의 遺民 부흥운동

백제 유민의 부흥운동은 부여 함락 후인 660 7 년 월부터 바로 시작되었으며 그 전모는 다음

과 같다.

○ 660 9 3 ( ), ( 년 월 일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끌고 당으로 떠나기 이전부터 백제의 민중은 남잠성 南岑城 진현성 眞峴

城), ( ) , ( ) ( ) 임존성 등에서 또 任存城 두시원악 에서는 豆尸原嶽 좌평 정무 가 正武 무리를 모아 나당군에 ․ 대항하고 있

었다 나당군이 . . ․ 임존성을 공격하였으나 백제의 군사들이 험악한 곳에 의지하여 있으므로 격파하지 못했다

○ 660 9 23 1 7 년 월 일 소정방의 부대가 떠난 것을 알아낸 백제의 부흥군은 당군 만과 신라군 천명이 지키고 있는

사비성으로 쳐들어 와서


제 장6 ( ) 마한백제의 ․ 유적 과 遺蹟

유물( )

제 절1 ( ) 고분 古墳

함평군내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을 마한 과 ( ) ( ), 馬韓 신미 백제시대 新彌 등으로 분류하여 기술

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 국내의 연구가 분류 단계에 이르지 않은 관계로 이 항에 묶어서 정리하

였다.

고분이란 일반적 의미로는 고대의 무덤을 말하지만 고고학적인 , ( ) 면에서는 한정적 限定的 의

미로 대개 삼국시대 에 ( ) . 三國時代 해당하는 무덤을 일컫는다

고분은 봉토 의 ( ) ( ), ( ), ( 封土 형식에 따라 원형분 圓形墳 방대형분 方台形墳 장고형분 長鼓形墳․ 일

본은 전방후원분- ), ( - ), ( ), ( 前方後圓形墳 이음돌무덤 즙석분 葺石墳 표형분 瓢形墳 돌무지무덤 적석

총 등으로 - ) . ( ), ( ), 積石塚 구분하고 있다 또 내부의 형식에 의해 널무덤 土壙墓 돌널무덤 石棺墓

덧널무덤( ), ( ), ( ) . 木棺墓 돌방무덤 石室墳 독무덤 甕棺墓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인류가 처음으로 시신 을 ( ) 屍身 땅에 묻은 것은 중석기시대 때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 유적

에 네안데르탈인이 묻힌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 경우는 현재 신석기시대부터 이루어진 무

덤 유적이 발견 조사되었을 뿐


1. 함평군의 고분 분포 현황

함평군의 고분에 대한 종합적인 첫 조사는 1984 . 년 국립광주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함평군에는 51 . 1990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어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년에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월계리 석계고분군에서 이루어졌고 또, 같은 해 리현석에 의해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져 총 125 . 기가 분포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뒤 1993 98 , 년에는 목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기가 조사 확인되었고 116) 1999년 함평군사

편찬위원회의 조사에서는 46 149 . 개 군집에서 기가 조사 확인되었다 117) 이어 2003년에는 동신

대학교 문화박물관에 의해 문화유적 지표조사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져 총 40 109 개 군집에서 기

가 조사 확인되었다.118) 또 이보다 앞선 2


2. 함평군의 발굴조사 고분

1) 월야면 월계리 석계 고분군

1990 3 11 년 월 일에 함평군 향토문화연구회원들이 하루 동안 월계리 석계마을 뒷산과 마을안

의 대밭을 지표조사 했었다.

그 때 이미 지표면에 석재가 노출한 추정 돌방무덤 등 봉토를 확인할 수 있는 원형분 11기

를 조사했다.

그 후 이 마을의 김영희 씨가 자기 밭 번지 을 (416-1 ) 8 중장비를 이용해 정리하다가 점의 토

기가 출토되자 중장비 기사와 함께 전남대학교박물관에 그 사실을 신고하였다. 이에 김영진 교

수와 최인선 등이



8) 함평읍 장년리 김대순 묘역 고분군

하느리 정류장에서 국도 23 300m 호선을 따라 쯤 북쪽으로 가다보면 경주이씨 선산이 나오고

천수답 이 ( ) . 天水畓 펼쳐지는데 이 논의 북단에 잘 치장된 김대순 가문의 묘역이 있다 이 묘역

내에 봉분 지름 20m , 1990 . 가량의 원형분이 있었는데 년 묘역을 정리하면서 완전 훼손하였다

훼손된 상태에서 1차 조사를 했는데 고분 중심부였을 것으로 보이는 곳에 영산강 유역의 독

특한 전용 독이 매장되었고 그 남쪽아래 7m 지점에 돌널이 조성되어 한 봉분 내에 두 형식이

혼재했었다.

전용 독은 심히 훼손되어 몇 조각만 수습되었고 돌널은 길이 2m, 1m 폭 의 바닥 돌만 제자

리에 있었다 뚜껑돌이 . . 없었다는 전언에 따라 내부형식을 돌널로 추정한 것이다 당시 광주박

물관 성낙준 학예관과 2 4 . 차 조


제 절2 ( ) 산 성 山城

1. ( ) 기산성 箕山城

소재지 함평읍 ∶ 기각리, 함평리 기산

1) 축성과 폐성

기산성은 함평읍의 주산인 해발 147.3m ( ) . ( 높이의 기산봉 에 箕山峯 위치한다 이 성은 읍성 邑

城) 6 1 임에도 불구하고 군창을 비롯해 우물 개소와 개소의 연못 등 산성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읍성과 산성의 역할을 모두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 ( ) 현 의 縣 치소와 거리가 불과

5 (2km) . 리 이기 때문에 별도의 읍성이나 산성을 축성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작 기산성의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언제 쌓았는지에 대

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 지금의


4) ( ) 함평읍 대덕리 고양 나

이 유적은 국도 23 . 호 도로변 미양주유소 맞은편 구릉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이곳은 모

두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는 민묘가 자리하고 있다. . 고양촌고인돌군이


제4편 통일신라시대의 함평

┃제4장┃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 560

집필 / 이명헌

┃제5장┃ 후삼국시대의 함평 567

집필 / 이명헌

백제가 멸망당하고 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간 후 함평지역은 신라의 영내에 편입되었다. 신

라는 정복된 백제와 고구려 지역과 민 에 ( ) . 民 대하여 효율적인 편제를 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

구려의 고지 와 ( ) ( ) 古地 그 유민 에 流民 대하여 관용과 포섭의 시책을 쓰는 한편 강력한 통치를

펴며 견제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통일신라는 전국을 9 ( ) 5 ( ) . 9 ( ) 117~120 주 소경 으로 州 小京 편제하였다 전국 주 는 州 개의 군

( ) 293~305 ( ) . 17 (757) 郡 과 개의 현 으로 縣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덕왕 년 에는 전국의 지명

을 모두 한식 으로 ( ) , ( ) ( ) , 漢式 바꾸었는데 함평지역의 경우는 굴내현 은 屈乃縣 함풍현 咸豊縣 으로

다지현 은 ( ) ( ) . 多只縣 다기현 으로 多岐縣 변동되었다

전국 9 ( ) 3 . ( ), 주 가운데 종래 백제지역에 설치한 주 는 州 개였다 웅천주 熊川州∶공주 완산주

( ), ( ) . 完山州∶전주 무진주 광주 가 武珍州∶ 바로 그것이었다

무진주에는 15 ( ) 43 ( ) . 개의 군 과 郡 개의 현 이 縣 영속되었다 당시 함평지역의 함풍현과 다기현

은 무안군의 영현 이었으


함평지역은 견훤 과 ( ) ( ) . 甄萱 왕건 이 王建 세력을 크게 다투었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이 지방을

먼저 점거한 사람은 견훤이었다 그는 . 900 전라도민의 호응을 크게 얻어 년에는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거의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 892 902 10 년 이후 년까지 년간 함평은 후백제

견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왕건이 효공왕 7 (903) ( ) ( ) 년 수군 을 水軍 거느리고 서해 로부터 西海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유

역의 10 ( ) ( ) ( , ) . 903 여 군 과 郡 현


제 절3 ( ) ( ) 함풍현 과 咸豊縣 다기현 多岐縣

함평지방이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은 백제의 수도 부여가 나당 의 ( ) 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

되고 의자왕이 항복을 한 660 7 4 년 월부터가 아니라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이 좌절된 문무왕 년

(664) . 초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영역에서 후백제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은

신라 진성여왕 6 (892) ( ) ( ) 년 즉 견훤이 무진주 의 武珍州 동남쪽 군현 들을 郡縣 통합하여 나라를

세우면서부터였다 따라서 . 230 함평이 신라의 영역으로 신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약 여 년간이

된다.

우리가 현재 주로 쓰고 있는 각 지역의 한자식 지명은 경덕왕 17 (757) ( 년 에 전국의 지명 地

名) ( ) . 9 ( ) 을 모두 한식 으로 漢式 바꾸면서부터였다 주 가운데 하나였던 무진주도 이때 무주 武州 로

바뀌었고 무진주의 , ( ) ( ) . 영속 군이었던 물아혜군 은 勿阿兮郡 지금의 무안군 으로 務安郡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무


제 장3 군사조직과 함평

좌우군주( ) ( ) 左右軍主 → 대당 大幢

사 벌 주( ) ( 13) ( ) 沙 伐 州 → 상주정 上州停∶진흥왕 → 귀당 貴幢

신 주( ) ( 29) ( ) 新 州 → 남천정 南川停∶진흥왕 → 한산정 漢山停

비열흘주( ) ( ) 比列忽主 → 우수정 牛首停

실 직 주( ) ( ) 悉 直 主 → 하서정 河西停

하 주( ) ( ) 下 主 → 완산정 完山停

이와 같이 신라의 기간병력은 6 ( ) ( ) 정이


제 장5 후삼국시대의 함평

제 절1 후삼국의 성립과정

1. ( ) ( ) 신라 통치력의 붕괴와 군웅 群雄 봉기 蜂起

신라는 하대 가 ( ) ( ) 下代 시작되면서부터 귀족사회 가 貴族社會 사치와 부패에 빠지게 되면서 내

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안으로는 중앙귀족 의 ( ) ( ) . 中央貴族 왕위쟁탈전 이 王位爭奪戰 격심하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혜공

왕 년 부터 ( ) 4 (768) ( ) 2 (887) 100 ( ), 惠恭王 정강왕 년 까지 定康王 여 년 동안에 선덕왕 宣德王 원성

왕( ), ( ), ( ), ( ), ( ), ( ), 元聖王 소성왕 昭聖王 애장왕 哀莊王 헌덕왕 憲德王 흥덕왕 興德王 희강왕 僖康王

민애왕( ), ( ), ( ), ( ), ( ), ( 閔哀王 신무왕 神武王 문성왕 文聖王 헌안왕 憲安王 경문왕 景文王 헌강왕 憲康

王) 20 . 등 무려 여 차례에 걸쳐 정


2. ( ) ( ) ( ) 견훤 궁예 세력의 甄萱 ․ 弓裔 성장과 후백제․태봉 泰封 의 성립

처음 원종 애노 기훤 양길 등의 ( ), ( ), ( ), ( ) 元宗 哀奴 箕萱 梁吉 세력은 아직까지 지방의 한 개 반

란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 이들 속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신라와 대항하는 자가 나

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견훤 과 ( ) ( ) . 甄萱 궁예 의 弓裔 세력이었


제 절2 ( ) 후백제 後百濟 와 함평

견훤은 통일신라 말기 전라도 서남지방 방술군 의 ( ) ( ) . 防戌軍 비장 裨將 이었다 당시 신라 사회

는 정치적 영향력의 부재로 인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 견훤은 큰 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 을 ( ) . 州縣 쳐서 세력을 확장시켰다 각지의 호응을 얻어 몇 달 사이

군사 5 , 6 (892) ( ) 천이 되었고 진성여왕 년 에는 무진주 광주 를 武珍州∶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 되

었다 이어 . . 서남지방 각지의 호응을 얻어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였다 그리

고 효공왕 4 (900) ( ) 년 에는 마침내 완산주 전주 로 完山州∶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정식으로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직 을 ( ) 官職 설치하니 이에 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고 남중국의 오월 과 ( ) . 吳越 친교를


제 절3 ( ) 태봉국 泰封國 과 함평

1. 태봉국의 성립과 멸망

궁예는 처음 세달사 의 ( ) ( ) 世達寺 榮州 ∶ 浮石寺 중이 되어 이름을 선종 이라 善宗 하였는데 자라

나면서 승률 에 ( ) ( ) . , 僧律 구애받지 아니하고 담기 가 膽氣 있었다 그는 세상이 소란하여지자 「어지

러움을 틈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겠


2. ( )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왕건 王建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자 로 ( ) ( ) . 10 (896) 王者 추대된 것은 왕건 王建 이었다 진성여왕 년

왕건의 부자가 궁예에게 귀순하자 궁예는 왕건의 아버지 용건 을 ( ) ( ) 龍建 금성 金城∶金化 태수

( ) ( ) ( ) 太守 에 임명하고 왕건은 약관의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장군 으로 將軍 등용하여 육해 陸海 양

면으로 여러 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 2 (898) 왕건은 효공왕 년 에

양주와 견주를 공격하고 년 , 2 900 ( ) 뒤인 년에는 광주 충주 廣州 청주 및 당성 괴양 등의 군현을

공격하여 이를 모두 점령하는 등 육전에서도 수 삼차의 전공을 세웠으나 왕건의 중요한 활동은

대부분이 수군활동에서 이루어졌던 것인데 이것은 왕건이 해상활동가 집안의 출신으로서 이를

배경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왕건은 효공왕 7 (903) ( 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에서 전라남도 해안으로 나아가 금성군 錦

城郡∶나주 등) 10 ( ) , 909 ( ) ( 여 군현 을 郡縣 쳐서 점령하고 년에는 진도 와 珍島 고이도성 皐夷島城

∶현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 을) . (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는 견훤이 친히 거느린 수륙 정병 精

兵) . 을 덕진포에서 크게 격파하고 수 십. 을 덕진포에서 크게 격파하고 수 십 군현을 점령함으로서 이 곳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왕

건은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치어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지방으로 출정하여 혹은 이 지방의

군현을 점령하고 혹은 , 직접 견훤과 싸워 이를 격파시킴으로써 후백제의 세력을 꺾는 등 눈부

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 같이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지방을 공략한 것은 단순히 나

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군현을 점령하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후백제의 배후를 위

협 교란하여 후백제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는 . ( ) ( ) 곧 북 으로는 北 태봉 泰封 에 대

한 공격을 약화시키고 동 으로는 ( ) ( ) 東 미약한 신라 를 新羅 후백제가 병탄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것이며 또, ( ) ( ) ( ) ( ) 서남 쪽으로는 西南 해상 을 海上 봉쇄함으로써 후백제의 중국 과 中國 일본 日本 에

대한 외교활동을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건은 전라남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쪽의 점령 군현을 근거로 하고 해안을 따라 경

상남도 해안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는 . 뒷날 육지로 낙동강을 끼고 남하하는 고려의 세력과

강주 에서 ( ) 康州∶晉州 연락함으로써 후백제를 포위하는 성과를 올리고 마침내 후백제를 타도하

고 후삼국 을 ( ) . 後三國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군웅활거의 시대에 우리 함평은 어떠했을까?

후백제 견훤의 영역 하에 있었던 우리 함평지역은 그러나 효공왕 7 (903) 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안을 타고 남하한 왕건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나주를 비롯한 인근 10 ( ) 여 군현 郡縣 을

쳐서 점령하게 되었고 이어 , 909 ( ) 년에는 진도 와 珍島 고이도성이 점령됨으로서 환란의 파장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 . 긴 세월동안 전란의 와중에서 살았음도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왕건이 나주를 비롯한 인근 수십 군현을 점령할 때 우리 함평지역도 그들 군현 가운데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5편 고려시대의 함평

┃제5장┃ 조운( ) ( ) 漕運 ․역참제 驛站制 와 함평 600

집필 / 이명헌

┃제6장┃ 외침과 함평 612

집필 / 이명헌

┃제7장┃ 과거제도와 함평출신 급제자 621

집필 / 이명헌

┃제8장┃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 


□ 고( ) 庫

전저창( ) 典儲倉

광흥창 벼슬아치들의 ( ) . 廣興倉 ∶ 봉급을 맡아 봄

요물창 궁중의 ( ) . 料物倉 ∶ 미곡을 맡아 봄

의염창( ) . 義鹽倉 ∶소금을 관장함

내 고 임금의 ( ) . 內 庫 ∶ 물품을 맡아 봄

가각고 궁중의 ( ) ( ) ( ) . 架閣庫 ∶ 도서 와 圖書 전적 을 典籍 맡아 봄

이밖에 특수 기관으로는 삼사( ), ( ), ( ), ( ), 三司 중추원 中樞院 어사대 御史台 예문관 禮文館 사천대

( ), ( )


제 절2 ( ) ( ) 함풍현 과 咸豊縣 모평현 牟平縣 의 설치

성종 11 (992) ( ), ( ), ( ), ( ), ( ), ( ), ( ), ( ) 년 에는 전국의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관 關 역 驛 강 江 포 浦 의

이름을 고쳤다.

태조 23 (940) 년 에 개칭된 것은 신라적이거나 백제적인 지방행정 체제를 명칭상으로 나마 고

려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9 5 주 소경과 그 외 몇 지역만 바꾸었지만 이때는 광범위하게

이름을 고려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우리 함평지역에 있던 백제 때의 굴내현 은 ( ) ( ) 屈乃縣 신라 조에 바꾼 함풍현 咸豊縣 그대로 두

었으나 백제 때 다지현 은 ( ) ( ), ( ) 多只縣 신라 조에서 다기현 多岐縣 고려조에서는 모평현 牟平縣 으

로 바꾸었다 고려시대에는 . . 현 함평군 지역에 함풍현과 모평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신라 때부터 내려온 영풍향 과 ( ) ( ) . 永豊鄕 다경부곡 은 多慶部曲 이때도 있었으리라 보아진다 그

러나 함평의 향과 부곡은 당시 나주목에 속해 있었다.


제 절5 ( ) 무인정권 대두와 武人政權 함평의 감무설치

고려 제 제 의 1, 2 도시인 개경과 서경을 크게 파괴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문벌중심 정

치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였다 묘청의 . 난이 김부식 일파에 의해 진압된 후 문벌체제의 정

치적 경직성과 모순은 더욱 확대되어갔다 그러한 . 가운데 차별대우로 불만이 고조되어있던 무

신 들이 ( ) ( ) 24 (1170) 8 . 武臣 의종 년 월에 毅宗 반란을 일으켰다 군대의 통솔을 맡은 무신들이 일

으킨 이 반란에는 고된 역에 시달리면서도 경제적 급부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일반 군인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정중부 등 ( ) ( ) (1170) , 4 鄭仲夫 무신들은 명종 을 明宗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이후 반세

기 동안 정치는 혼란 속에 빠졌다 이러한 . 혼란 속에서도 우리 함평지방은 정중부 등에 의해

추대 즉위한 명종 2 (1172), ( ) 년 함풍현과 모평현에 감무 가 監務 설치되어 고려시대에 이르러 처

음으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게 되


제 장5 조운( ) 漕運 ․역참제(驛站制)

와 함평


제 절1 조 운

조운 이란 ( ) ( ) , 漕運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에서 수운 을 水運 통해 세곡 즉 세금으

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운송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 ( ) 물류의 운송과 유통은 수운 水運 과

육운 으로 ( ) , ( ) ( ) . 陸運 나뉘며 수운은 바다를 이용하는 해운 과 海運 하운 으로 河運 나눌 수 있다 이

러한 활동은 물류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동까지도 포함된다 조운은 . 수운과 육운을 겸하기도 하

지만 주로 , . 선박을 이용한 수운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운영주체가 국가이고 세곡의 운송

과 수납 기능까지 갖는 점에서 커다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길은 육로와 운반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운송로였다. 특히 국

가 재정의 근원이 되는 세곡 운송은 많은 양을 신속하게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선박과 물

길을 이용하였는데 이를 조운이라고 한다.

조운은 기원전 3 ( ) . 7 세기경 중국 진 나라 秦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기

초 수 나라 , ( ) ( ) 隋 때 중국 내륙을 남북으로 잇는 대운하 가 大運河 개통되면서 남방의 곡물이 북

부지방으로 운송되는 길이 열렸고 제도적으로 , ( ) , 확립된 것은 당 나라 唐 때이며 국가적 정책으

로 자리매김하여 유지된 시기는 원 나라에 ( ) . 元 이르러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가 확립된 삼국시기에 국가운영의 중요 수단으로 바닷

길과 내륙 수운을 활발하게 이용하였으며 세곡운송도 , .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백제는 교통과

조세 물자 , , ( ) 교류를 고려하여 수도를 한강과 금강 하안에 두었으며 조세 담당기관인 곡부 穀部

가 설치돼 있었다 뿐만 . ( ) , 아니라 통일신라 시기에는 창부 가 倉部 그 역할을 담당하였고 이어

고려시기 조운은 제도로서 정비되어 이후 조선시대까지 약 1천년 동안 국가 재정 운영의 근간

이 되었다.

1. 고려시대 조운제도

고려시대 조운제도는 국가에서 지방의 조운 거점에 조창 을 ( ) 漕倉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거둔

세금을 체계적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 에 . , ( ), ( ), ( 『 』 의하면 조운은 조전 漕轉 조만 漕輓 해조 海

漕), ( ) . 해조운 이라는 海漕運 이름으로 기록되어 나타난다

앞의 < > ( , 표 는 한정훈 고려 「 초기 교통과 조세운송 체계의 성립 고려시대 」 『 교통과 조세운

송체계 연구 부산대대학원 』, , 2009, pp.58-59) 박사학위논문 의 표를 좀더 간략하게 재정리한

것이다 당시 . , 1 5 21 수경가 제도에 의하면 운송료 석당 먼 곳은 석부터 가까운 곳은 석까지 개

경으로 세곡 운송이 가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포의 . 60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곳이 많지

만 수경가 , . 만으로도 개경과 거리의 원근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60 , 포의 위치는 아직까지 실제 지점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많고 사료의 오기 혹은

지명 비정에 의견이 갈리는 것도 있다 예컨대 .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로 우리 함평지역과 관련

하여 윤경진 고려 ( 11 , 45, 2002, p.181) 「 성종 년의 읍호 개정에 대한 연구」 『역사와 현실』

은 60 ( ) , ( ) ( ) ( 포 중 이통포 의 利通浦 소재지 즉 합풍군 을 合豊郡 함풍현 이 咸豊縣 아닌 무풍현 茂豊

縣) . 의 오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백제시대로부터 굴내현 의 ( ) ( ) 屈乃縣 대표적 포구라 하여 굴내포 屈乃浦

라 이름 하였던 포구 이름을 고려 성종 11 (992) 년 에 지방 호족들을 흡수 통제하기 위한 정책

으로 국가에서 각 포구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굴내포의 이름도 이통포

로 바뀌게 되었고 합풍군의 , 17 (757) 경우는 통일신라 경덕왕 년 에 굴내현을 개명한 함풍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 , 당시의 이통포 즉 굴내포는 우리 함평지역에 있었

던 포구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 굴내포 이통포 는 ( ) . 지금의 함평 어느 지역에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

하면 굴내포는 함평읍 장년리 구주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주포 . 즉 지금의 장년

리 백년과 월선마을이 위치한 곳은 백제 때 굴내현에 속해 있었던 곳이고, 굴내현의 대표적 포

구가 있던 곳이라 하여 포구 이름을 굴내포라 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또. 조창의 위치 비정에

있어서는 지금 마을나무 노거수 팽나무 가 ( ) 있는 곽구현 씨 소유 대지와 언덕 밭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 ( ) 고려시대 초기까지 함평지역의 세곡은 바로 이곳 굴내포 구주포

에 모아졌다가 매년 봄 수도 개경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고려시대 조운제도는 성종 이후 현종 연간에는 (1010~1031)

2. 고려시대 조운선의 운영

조창에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시설 뿐만 아니라 주민을 관리하는 행정관청의 성격도 있다.

먼저 조창에는 판관 이라는 ( ) . 判官 최고 감독관리가 주재하였다 판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으며

관할 영역을 다스리고 주민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조운을 수행하는 최고 책임자

였다 이러한 . 20 . 막중한 일 때문에 외관의 대우를 받아 미곡 석의 녹봉을 지급받았다

향리는 고려시대 국가권력의 최 말단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 ) 조창에도 색전 色典 이라

불리는 향리가 존재하였다 색전은 . ( ), ( ) 조운선을 몰고 가는 초공 수수 의 梢工 水手 선원들과 더불

어 사고가 일어나면 그 책임을 져야하는 보상의 주체였으므로 조운 수행에 있어서 실제적 책임

자였다 즉 조창 . , , 소속의 색전은 판관의 지휘 하에 세곡을 조창에 수납하고 조운선에 승선하여

조운을 감독하며 그리고 , 개경에 도착하여 세곡을 경창에 납입시키는 임무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의 선원은 키잡이 배꾼 잡인 , , .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운선이 정해진 기한에

출발하였으나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초공 키잡이 명 ( ) 3 , ( ) 5 이상 수수 배꾼 와 잡부 명 이상이

미곡과 함께 침몰한 경우에는 조세를 다시 징수해야 했다 그리고 . 기한보다 늦게 출발하였고

초공수수의 ․ 3 1 분의 까지의 인원이 빠져 죽은 경우에는 그 고을의 관장․색전․초공․수수 등에게

나누어 징수하게 하였다.

조운선 항해에는 초공수수잡부 ․ ․ 등이 동원되었는데 초마선 , 1 12 , 척당 초공 명 수수와 잡부

20 32 . 6 200 명 등 총 명이 승선하였다 그러면 조창 당 척이 출항하면 총 명이 동원되었던 샘이

다 이들은 . , . , 모두 조창의 주민으로서 평상시에는 어업과 선운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색전 즉

향리의 지휘 하에 해로 또는 수로를 잘 살펴가면서 조선을 난파시키지 않고 세곡을 목적지인

경창까지 운송하여야만 했다.

조운의 일은 국가적인 일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역 이기 ( ) . 役 때문에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다

조운의 역은 운송 도중에 세곡에 손실이 생기면 보상을 해야 하는 매우 가혹한 의무까지 부과

되었다 또한 . 조창민들은 수군에도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노고는 매우 무거

웠을 것이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 변동으로 인한 지배체제의 동요는 조창제도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특히 . , , 조창제도의 존립기반을 이룬 군현제의 변혁 삼별초의 난 왜구의 침입 등은 조운

제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 지금까지 국가 통제 하에 있던 조운은 각 지방

의 군현이 주관하는 분산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즉. 바다나 하천에 인접한 군현은 각자 스스

로가 조운선을 구비하고 세곡을 운반해야 하였으며 민간인에게 청부를 맡기는 곳도 나타났다.

3. 고려시대 조운선의 세곡 운송

조운선은 먼 거리 바닷길을 항해하기 때문에 1 1 . 년 회 운항이 원칙이었다 그리고 국가 재정

원인 세곡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계절풍을 이용해야 하였다 우리나라는 . 1 6 7 8 년 중 ․ ․ 월은

606 ┃ 제5편┃ 고려시대의 함평

풍고 라 ( ) , 風高 하여 풍파가 심하여 선박의 운항이 어려웠고 파도가 일지 않고 행선이 적합한 시

기는 풍화 라 ( ) 2 5 . . 風和 하여 월에서 월 사이였다 따라서 조운선의 운항 시기는 이때에 맞추었다

세곡은 11~12 , 2 월에 거두어 일단 조창에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월부터 수송을 시작하여 가까운

조창에서는 4 3 , 5 4 . 월까지 개월 안에 먼 곳의 조창에서는 월까지 개월 안에 조운을 마쳐야 했다

고려 초기 13 66 , 41 107 . 개 조창에서 보유한 선박은 초마선 척 평저선 척 등 모두 척이었다

이들이 1 74,200 . 1 년에 운송할 수 있는 총 적재량은 석이었다 적재량이 초마선은 척당 천석이

었기 때문에 66 66,000 , 2 척이 적재할 수 있는 양은 석이었고 평저선은 척당 백석이었기 때문에

41 8,200 . 척이 적재할 수 있는 양은 석이었다 그러므로 전체 조운에서 해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89% . 1 에 이르렀다 한강을 오가는 평저선이나 수도 인근의 초마선은 적어도 회 이상 운항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운송량은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또한 . 고려후기에 왜구에게 한 번 약탈당한

전라도 조운선이 200 , 척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조운선과 함께 일반 사선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고려시대 조세제도

고려왕조는 권력을 중앙으로 모으고 국가의 재정을 운영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각

군현의․ 규모에 따라 부세를 균등하게 나누었다 고려의 . 조세 제도는 군현민의 ․ 재산 소유에 따

른 조세징수가 원칙이었으며 주현속현향부곡 , . ․ ․ ․ 등에 다양한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조세 제도는 크게 토지와 사람에 부과하는 3 . ( , ) 종류 세금이 있었다 이것은 전조 田租 田賦 ․공

물 요역 또는 ( , ) ( ) ( ) ( ) ( ), ( ) ( ) ( ) 貢物 貢賦 ․ 徭役 조 조 역 조 포 역 등 租 ․ 調 ․ 役 租 ․ 布 ․ 役 다양한 형태로 구분

할 수 있다.

전조는 토지세의 하나로서 토지에 대한 수조율은 1/10, 1/4, 1/2 . 등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땅을 소유한 백성은 수확물의 1/10 , 을 국가에 토지세로 냈으며 공해전둔전․ 등 국․공유지를 빌

려 경작할 경우는 1/4, 1/2 . 일반 사유지를 빌려 경작할 경우는 를 토지세로 냈다

공물은 중앙에서 지방의 호구 를 ( ) 戶口 기준으로 각 지방 군현 단위에 부과하는 세금으로서

지방의 특산물이나 토산물 수공업품을 , ( ) . 바치는 공납 이다 공물에는 貢納 매년 정기적으로 징수

하는 상공 과 ( ) ( ) . 常貢 수시로 징수하는 별공 이 別貢 있었다 상공은 매년 각 주․현으로부터 일정한

양의 현물을 세금으로 받는 것으로 금백금구리철소금쇠가죽 ․ ․ ․ ․ ․ 등이었다 별공은 . 특수 생산지에

서만 거두는 것으로 쇠․구리․자기․종이․먹 등이 있다.

요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으로서 삼국시대 세제인 조용조 ․ ․ 중에서 용 에 ( ) . 庸 해당한다 노

동력의 수취는 징발 주체에 따라 국가의 요역과 군현의 상요 가 ( ) , , 常徭 있으며 주로 조세 운반

공물 조달 토목공사 , . 등에 활용되었다 이외에도 특수 생산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부터 받

는 어세( ), ( ), ( ), ( ), ( ) . 漁稅 염세 鹽稅 상세 商稅 산세 山稅 선세 船稅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조세제도는 중앙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때 전국의 바닷길과

육로의 교통망도 정비하였다 그것이 . . 바로 조운과 역참 제도이다 조운은 조세 수취와 운송을

위해 창 을 ( ) , ( ) ( ) 倉 운영한 것이며 역참 은 驛站 교통과 통신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각지에 역 驛 을

설치한 국가제도이다.

제5장 _ 조운·역참제와 함평 607

일정한 지역에 역을 설치하고 도로를 정비하여 중앙과 지방 사이의 명령을 전달하고 관리의

사행 및 운수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육상에는 , ( ), ( ) 육참 해상이나 陸站 강변에는 수참 을 水站 설치

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다 이러한 . 조운과 역참은 모두 지방의 행정구역 확립과 호족세력

을 통제하는데 기여하였다.

제 절2 ( ) 역참제 와 驛站制 함평의 역

1. 역제의 기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해 가며 지방통치를 원활히 하

고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기 위한 도로가 발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지방조직을 발

전시켜 중앙의 정치적인 명령이 미치게 하는 행정로이자 문화를 파급시키는 문화로의역할을 하

였다 그리고 . 군사적으로는 지형상 요새가 되는 곳에 성책을 축조하여 외적을 방비하며 지역주

민의 안보를 기하는 군사로가 생겨 삼국의 주요간선 형성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이처럼 정치

적 군사적 , . 요구에 따라 발달한 도로가 제도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 바로 우역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제의 기원은 이처럼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역제의 기원은 어제부터였을까 지금까지 . 알려진 바에 의하면『삼국사

기 에』 실린 기록을 전거로 하여 신라 소지왕 9 (487 ) . 3 년 년 으로 보고 있다 즉『삼국사기』 권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 3 , 년 월조에 의하면 비로소 “ 사방에 우역을 두고 왕은 관사에 명하여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라는 .”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록만으로는 당시의 도로 사정을

알 길이 없으나 ‘관도 라는 ( ) 官道 ’ 표기로 볼 때 이 관도는 주요 간선도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 . 8 (668) 신라 문주왕 년 에 왕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을 돕기 위해 출진했

다가 “환국 길에 올라 요돌역에 행차했다 는.” 기록이 있어 비록 한 개의 역에 지나지 않지만

비로소 역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또 삼국사기 권 잡지 『 』 37 6 4 , 제 지리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의 역에 관한 기록이 보

인다 즉. “국내성은 평양으로부터 17 , , , , 역을 거쳐서 이르게 되고 발해의 남해 부여 압록 책성

의 4 39 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인데 신라 천정군으로부터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무릇 역이

다 하여 .” 당시 역로에 설치돼 있던 역의 수효를 엿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역제는 통일신라로 이어졌고 이후 , 정치제도 개편과 함께 우역사무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경도역 을 ( ) . 京都驛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 뒤 경덕왕은 종래의 경도역을 도정

역 이라 ( ) , 17 都停驛 고쳤다가 다시 경도역으로 고치고 그 관리를 관등 가운데 열두 번째에 해당

하는 대사 인에게 ( ) 2 , ( ) 2 . 大舍 맡겼고 또 사 인을 史 두었다

통일신라는 기존보다도 확대된 영토와 늘어난 인


예도(10 ), (16 ), (11 ), (12 ), (29 ), (43 ), 역 금교도 역 파령도 역 흥교도 역 흥화도 역 운중도 역 도원도

(21 ), (42 ), (15 ), (24 ), (30 ), (28 ), (15 ), 역 삭망도 역 청교도 역 춘주도 역 평구도 역 명주도 역 광주도 역

충청주도(34 ), (21 ), (30 ), (28 ), (12 ), (23 ), 역 전공주도 역 승나주도 역 산남도 역 남원도 역 경주도 역

금주도 역 상주도 역 경산부도 역 등 (31 ), (25 ), (25 ) 22 525 총 개 역도에 개 역이 설치되어 있는 것

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 우리 함평지방에는 2 ( ) , 22 개소에 역 이 驛 설치되어 있었고 이들 역은 앞의 개 역도

가운데 승나주도 에 ( ) . 昇羅州道 속해 있었다

하나는 함풍현에 속한 가풍역 이고 또 ( ) , ( ) . 街豊驛 하나는 모평현에 속한 덕수역 德樹驛 이었다

이중 가풍역은 조선시대 가리역 으로 ( ) 加里驛 이름이 바뀌어 존속했던 것으로 지금의 신광면 가

덕리에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덕수역은 조선시대 때 역이 폐지되어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 ,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 역은 나산면 덕림리에 있었다는 주장과 또 덕림

리와 지근거리인 지금의 구산리 방두동에 있던 조선시대의 구미원 근처에 ( )


제 장6 외침과 함평

제 절1 ( ) 거란 의 契丹 침입

고려가 성립되는 10 ( ) 5 10 ( ) 세기에 중국에서는 당 이 唐 멸망하고 대 국을 거쳐 송 이 宋 대두하

였고 북방에서는 , 916 ( ) 926 ( ) 년 거란 이 契丹 흥기하여 년 발해 를 渤海 멸망시키고 중국으로 남하

하여 북경 부근의 땅을 장악하였다 세기 . 10 , , 3 중엽 이후에 동아시아에는 고려 송 거란의 국의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적대적이었다 고려는 .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북진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고 반대로 , , 거란은 만주지역을 차지하고 남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태조 25 (942) 50 , 년 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 낙타 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

의 맹약을 저버리고 하루아침에 발해를 공멸한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 하여 .” 사신을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개경의 만부교 아래에 붙들어 매어 굶어 죽게 하였다 그리고 . 태조는 발해

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청천강까지 국경을 넓혔다.

이러한 태조의 북진정책은 후대의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정종은 . 북방 개척을 위해 서경 천도

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를 설치하고 광군 30 . 만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광종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 사이에 성을 쌓아 방비하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시켰고 이로 인해 현종은 공주 公

州) ( ) 1 13 ( ) . 와 삼례 를 三禮 거쳐 월 일 나주 까지 羅州 피난하였다 그러나 양규의 군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고려인의 저항이 치열하자 거란군은 , 이후 고려의 왕이 친히 거란을 방문한다

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10 . 일 만에 물러갔다 현종이 당시 피난하여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란군이 강화를 맺고 개경에서 퇴진한 이틀 후였다 현종은 . 1 21 2 월 일 나주를 출발하여 월

23 . (1 ) 일 다시 개경으로 환궁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나주에는 얼마 되지 않은 기간 주일 정도 이

기는 하지만 임시 수도로서 행재소 가 ( ) . 行在所 설치된


제 절2 ( ) 몽고 의 蒙古 침입

고려의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인 최충헌이 독재 정치를 하고 있던 13세기 초에 북방의 몽골족

은 부족을 통합하고 세계 제국을 세울 기반을 닦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 몽골 서쪽에 있는 티베

트족의 나라 서하를 정벌하고 이어 금을 공격하였다 금의 . 지배 아래 있던 거란족은 이 기회를

틈타 나라를 세웠으나 곧 몽고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몽고에 . 쫓긴 거란족은 고려로 쳐들어와

서 북쪽지방을 약탈하고 개경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 거란족을 평양 동쪽의 강동성에 몰

아넣었다 년 . 1218 9 . 월의 일이었다

이 무렵 간도 지방에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세운 동진국이라는 나라

가 있었다 칭기즈칸은 . , 만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먼저 동진국을 복

속시키고 동진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강동성으로 가


동나무 기름 각 10 . 근 등이었다

이후 고려는 해전에 약한 몽고군을 피해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 적극적인 항전 태세를 갖추었

다 각. . 지방에도 사람을 보내 백성들에게 산성과 섬으로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다 최우가 서울

을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고의 침략과 농민 천민의 , 항쟁으로부터 자기의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서였다 지배층들은 . . 강화에서 전과 다름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본토에 남아 있

는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대책을 세워 주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입게 되

었다.

몽고는 이후 1258 6 , 30 . 년까지 차례에 걸쳐 쳐들어왔는데 그 기간은 무려 년이나 되었다 몽

고의 제 차2 ( , ) , 침입은 강화도에서의 항몽을 이유로 처인 현 處仁 용인 까지 진격해왔으나 이때는

고려 민간 용장인 김윤후 에 ( ) . 金允候 의해 몽고장수가 전사하자 몽고군이 퇴각했다 이때 고려는

대장경 등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제 차3 22 (1235) 26 (1239) . 침입은 고종 년 부터 년 사이에 장기적으로 전쟁이 계속 되었다 이

때는 전남지방을 제외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였는데 전북의 , 고부와 부안까지 몽고군이 쳐들

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 9 경주의 황룡사 층탑이 불타 소실되었고 장기전으로 인한 인명 피

해는 물론 농토가 황폐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 내용이『고려사』에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우리 함평지방의 생활형편 또한 그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 차4 32 (1247) . 침입은 고종 년 의 일이었다 침입의 구실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 5 때는 전쟁의 피해가 전국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이어 제 차 침입은 고

종 40 (1253) . 년 에 있었다 이때는 몽고군이 전주까지 쳐들어왔으나 당시 고려도 조직적인 저항

을 하여 몽고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천도한다는 조건으로

몽고군은 이 전쟁에서 철군하였다.

1254 6 . 년에 시작된 제 차 침입의 피해는 특히 심했다 이때의 참혹한 모습이 “이 해에 몽고

병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 6,800 , . 만 여 명이며 살육된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저

제6장 _ 외침과 함평 615

들이 지나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라고 .”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때의 침입은 고

려의 왕만 개경으로 나오고 신하들은 그대로 강화도에 남아있다는 구실을 들어 고종 41년

(1254) 46 (1259) 6 . 부터 년 까지 무려 년간에 걸쳐 네 번이나 침입을 자행하였다

실제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것은 고려의 정부군이 아니라 일반 농민이나 천민이었

다 세기 . 12 , , 이후로 전국에서 농민 천민들이 가혹한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하였는데 이제는 이

들도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부와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한 . ( ) 예로 마산 평북 귀주 부근 초

적의 우두머리가 최우를 찾아와서 정병 5000명을 내어 몽고군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합치겠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초적은 . 일반 농민이 아니고 무장한 농민 반란군인데 이들조차 몽고와 싸

우는데 앞장선 것이었다 노비나 . , . 부곡 소의 백성들도 몽고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웠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정부에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 기간에도 지배층이 농민에게서 걷어

가는 세금은 여전하여 농민들은 , . 정부의 수탈과 몽고의 침략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농

민들 가운데는 몽고군이 오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고 몽고에 , 투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 몽고와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지배층의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경우

도 있었다 우리 . . 전남지역과 관련해서는 담양의 초적 이연년의 예가 그것이다

한편 제 차6 침입기간 중 우리 전남이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입은 것은 두 번째 침입 때였

다 고려사 에 . , 42 『 』 따르면 충주에서 패퇴한 몽고군이 전남으로 진격로를 바꾼 것은 고종 년

(1255) 10 . 월이며 이때 광주나주장성영광담양 ․ ․ ․ ․ 등이 적에게 유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함평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인근 지역의 정황으로 보아 우리 함평지방도 그들에게 유린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몽고의 . 장수 차라대는 이때 광주 무등산에 주둔하며 인근 지역을 노

략질하였다.

당시 몽고군이 전남지역에 침입하게 되자 이곳 지역민들에 의한 재미난 현상이 일어나게 되

었는데 이는 , . 고려의 부패한 무인정권과 관련된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몽고군이 전남지역을

침입할 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몽고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환영했다는 기록이『고

려사 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 60 현상은 아마도 당시 최충헌 일가의 여 년에 이르는 장기 무

인세도 가 ( ) 武人勢道 얼마나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단상이

라 하겠다 그리고 . . 당시 전남지역에는 최씨 일가의 농장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하여

전남지역민들은 몽고군의 피해에 못지않은 그들의 수탈에 탈진 상태였을 것이다.

다음은 당시 몽고군이 전남지역에 쳐들어왔을 때 지역적인 정황을 엿볼 수 있는『고려사』권

24 43 4 . 세가조 고종 년 월조의 내용이다

“이광 과 ( ) ( ) 李廣 송군비 가 宋軍斐 영광으로 가서 길을 나누어 칠 것을 약속하였으나 몽고군이 이를 알고 미리 방

비함으로 이광은 성으로 다시 들어가고 송군비는 , ( , ) . 입암산성 장성 立岩山城 입암면에 있는 산성 을 보수하였다 성

안에 있던 장정들이 모두 적에게 투항하고 오직 늙은이와 어린애들만 남아 있었다. . . … 후략 ”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지역민들의 성향과 파견된 정부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장성으로 퇴각

했음을 엿볼 수 있고 또, 43 (1256) 1 이광과 송군비가 전남지역에 파견된 것이 고종 년 월이었

기 때문에 이미 영광과 우리 함평지역이 몽고군 침입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제 절3 ( ) ( ) 삼별초 의 三別抄 항몽 과 抗蒙 함평

고려의 지배층 안에서는 몽고와 강화는 맺어졌지만 강화도에 남아 몽고와 싸울 것을 주장하

는 집권 무신과 몽고를 끌어들여 권력을 되찾으려는 왕 문신 , .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마침

내 원종 11년 왕과 문신은 몽고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후 개경으로 돌아

갈 것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 100 , 고려 국왕은 여 년간 빼앗겼던 왕권을 되찾았지만 반면에 고

려는 더욱더 몽고에 종속되었다.

30 , ( ) , 년 동안이나 농민 천민의 항전을 토대로 몽고의 침략을 막아 냈던 삼별초 三別抄 는 고

려 정부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이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났다. 삼별초는 고려가 수도의

치안을 위해 설치한 야별초 가 ( ) 夜別抄 좌우로․ 나뉘고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

들로 구성된 신의군 을 ( ) . 神義軍 합쳐 부른 이름이다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하여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국왕과 문신들이 나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 ( ) 끝내 개경 천도가 이루어지자 이들 삼별초는 배중손 을 裵仲孫 중심으로 하

제6장 _ 외침과 함평 617

여 원종 11 (1270) 6 년 월 ‘반개경정부 반몽고 의 , ’ 기치를 들고 왕족인 원종의 동생 승화후

( ) ( ) . 承化候 온 을 溫 국왕으로 추대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

이후 삼별초는 나주와 전주를 공략하다 정부군과 여몽 연합군에 패해 진도로 들어갔으나 해

상권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 뒤 여몽 연합군의 진도 공략은 수차례에 걸쳐 시도되었고

끝내는 진도가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삼별초는 탐라 제주도 로 ( ) 다시 옮겨가 고려 정부와 몽고

의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당시 삼별초의 세력은 한때 전라도의 연안 여러 섬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 , , 진주 거제 합포

( ), , ( ) , 마산 동래 금주 김해 까지 판도를 넓혔고 또 일본과도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

으며 밀양과 개경 등 여러 고을이 이들에게 호응하여 관청의 노비들과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는 몽고와 고려 정부의 이중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당시 . 삼별초의 위세

가 어떠했는지는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라도에 토벌사로 부임한 참지정사 신사전 은 ( ) ( ) 參知政事 申思佺 나주에 이르러 삼별초군이 나주를 공략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개경으로 달아나 버렸고 나주부사 박부 등은 , ( ) ( ) 羅州副使 朴浮 투항과 저항을 결정 못하고 있었으

며 전주부사 이빈 도 , ( ) ( ) . 全州副使 李彬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 103 ). 『고려사』 권 김웅덕 傳

“삼별초가 진도에 진을 치고 있으며 주와 군을 약탈하고 제지 를 ( ) 帝旨 주며 전라도 안찰사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수확을 독촉하여 해도 에 ( ) . 海都 옮겨 살게 하였다 ”( 26, 11 8 ). 『고려사』권 원종 년 월조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고려 정부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짓밟혔고 삼별초도 진압되었다.

즉 제주도에서 , 14 (1273) 4 재건의 바탕을 마련하던 삼별초는 원종 년 월 김방경과 몽고의 홍다

구 에 ( ) . 洪茶丘 의해 함락됨으로써 한 맺힌 항몽 전쟁의 끝을 맺었다

이로써 고려 안에서 몽고에 반대하는 세력은 제거되었고 고려의 , 몽고에 대한 굴종적인 태도

는 이후 원 이 ( ) 80 . 元 망할 때까지 여 년에 걸쳐 이어졌다 하나의 예로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되어 왕의 칭호도 조 나 ( ) ( ) ( ) ( ) 祖 종 자를 宗 쓰지 못하고 왕 이나 王 충 자를 忠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속에서도 몽고풍이 크게 유행하였다.

삼별초의 3 2 년간에 걸친 항몽전 기간동안 우리 함평지역은 적어도 년간은 삼별초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 그들이 관리를 파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

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 ( ) 해로 가 海路 그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므로 우리 함평에

서 거둬들인 조세가 영광 법성창을 통해 고려 중앙정부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

문이다.

제 절4 ( ) 왜구 의 倭寇 침입


왜구들이 약탈하려 한 주된 목표물은 곡식이었다 왜구들이 . 주로 조세로 걷은 곡식을 모아

놓은 조창과 그것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습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고려에서는 육로를 이용해

곡식을 운반하려했지만 저들은 내륙까지도 침탈해 왔으며 민가에 , 들어가 닥치는 대로 곡물을

빼앗아 갔다 또. . 고려의 민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고려는 왜구의 침략에 대해 회유와 무력 토벌의 양면책을 썼지만 이중 , 직접 토벌에 좀더 적

극적이었다 예컨대 . 2 , 우왕 년에 대규모의 왜구가 충남 연산 부근에 침입하자 최영이 출정하여

홍산에서 크게 무찔렀는가 하면 우왕 , 6 500 년에는 척이나 되는 왜적 선단이 금강 어귀의 진포

에 들어와 배를 묶어 놓고 연안에 올라와 약탈을 자행하자 최무선 , 등이 화포를 사용하여 배를

모두 불사르고 적을 무찔렀다 이미 . , 상륙해 있던 왜구가 각지를 노략하면서 남원 운봉에까지

이르자 이성계 등이 거느린 군사가 황산에서 이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 적이 흘린 피 때

문에 냇물이 67 1600 일간이나 핏빛으로 흘러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없었다 하며 노획한 말도

여 필이나 되었다는 것을 보면 싸움이 , .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전남지역에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충정왕 2 (1350) 4 . 년 월부터였다 전남의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순천이었고 그, , 다음이 광주 장흥 등지

였다 또. 100 . 규모가 컸을 때는 순천지방에 침입한 왜구의 배가 무려 여 척이나 되었다 우리

함평과 이웃한 영광의 경우 각각 2 , 회의 침입을 받았고 나주와 영산포 그리고 목포 등도 침입

을 당했다 다음은 . . 전남지방의 왜구침입 횟수를 각 지역별로 조사해 정리한 현황이다


특히 우리 전남지방은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의 지맥인 운봉 의 ( ) ( ) 雲峰 황산 에서 荒山 격멸된

아지발도 라는 ( ) 15 . 阿只拔都 세 소년이 이끄는 왜구에게 피해를 많이 입었다 운봉 황산에는 현

재 전승비와 기념각이 세워져 있다.

『고려사 등』 옛 기록에 우리 함평지방이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은 1 . 회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고을인 영광이나 목포 나주 , 등지에 침입했을 때 침입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 영산포와 나주를 공략할 때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므로 우리 함평

지역을 통과했다 따라서 . . 여러 가지 형태의 피해가 컸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고려사 에 『 』 기록되어 있는 이웃 고을의 왜구 침입


제 장7 과거제도와 함평출신

급제자(及第者)

특히 후백제인들이 과거제도에 대해서 매우 관심이 많았던 것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새로운

제도에 따라 등용되는 것을 희망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성종은 지방향리들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에 관심을 쏟았는데 이는 향리의 자제들을 과거란

제도를 통해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 )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자는 부호장 副戶長 이상

의 자손이었던 것 같다.

우리 함평사람들로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함평노씨( ), 咸平魯氏 함평이씨

( ), ( ) 7 . 咸平李氏 함평모씨 가 咸平牟氏 각각 명으로 함평이 본관인 성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리고 인동장씨 이천서씨 가 ( ), ( ) 3 , ( ) ( 仁同張氏 利川徐氏 각각 명 파평윤씨 坡平尹氏 와 진주정씨 晋州

鄭氏) 1 . 가 각각 명 등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조 때 함평지역내의 호족은 이들 성씨가 아니었나 짐작케 하며, 특히

함평모씨는 중앙관직에 고관이 많아 고려의 중앙귀족화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어쨌든 함평이 본관인 노씨 모씨 이씨 , , 가운데에 급제한 사람들은 함풍이나 모평을 배경으

로 하여 정치적 진출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함평사람으로서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은 다음의 < > . 표 와 같다

이는 1871 ( ) 1895 , 1899 , 1906 , 년에 발행한『함평현읍지 咸平縣邑誌 』를 비롯해 년 년 년

1930 , 1969 ( ) ( ) 년 년에 각각 간행한 함평군지 와 『 咸平郡誌 』 각 문중의 『보첩 譜諜 』및『한국인

의 족보 등을 』 참조하여 정리했다.


제 절1 ( ) ( ) 함평의 고려 사찰 과 寺刹 유물 遺物

고려시대의 문화는 우선 불교문화로 대표되고 있다 불교의 . 융성이 고려의 융성이었고 불교

의 문란이 망국을 자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함평에는 고려 때 세웠던 절이 현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신증동국여지승

람 의 ( ) ( ) 新增東國輿地勝覽 』 불우조 에 佛宇條 기록되어 있는 사찰 가운데 신라시대 때 창건됐다

는 용천사 를 ( ) 龍泉寺 제외한 나머지의 사찰은 모두다 고려시대에 세운 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실려 있는 절은 고산사( ), ( ), ( ), 高山寺 월양사 月良寺 용천사 龍泉寺 서

상사 일명 ( , ), ( ), ( ) . 瑞祥寺 君遊寺 죽림사 대굴사 등이다 이 竹林寺 大堀寺 가운데 앞서 말한바와

같이 신라시대에 창건한 용천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은 고려시대에 창건하였던 사찰로 보인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 』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유물과 주위 사람들의 구전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사찰로서 극락사 와 ( ) ( ) . 極樂

1. ( ) 고산사지 高山寺址

고산사지는 함평향교에서 저수지를 지나 약 1.5km 가량 떨어진 고산봉(高山峰∶해발

359.1m) . 중턱에 있다

18 ( ) ( ) 세기 중후반기에 ․ 작성된『여지도서 輿地圖書 』및『범우고 梵宇攷 』에는 모두 “금폐(今

廢)”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18 내용으로 보면 고산사는 아마도 세기 중반 이전에 폐

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 1986년 현지에서 수습된 막새에 ‘주□만력십년옥□(主□萬曆十

年玉)’이라는 명문 이 ( ) . 10 1582 ( 15) 銘文 보여 주목된다 만력 년은 년 선조 으로 이 때는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0 . 년 전이다 그러니까 고산사는 이 무렵에 한번 대대적인 중창을 했

거나 아니면 어느 일부분의 건물을 보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지 의 ( ) ( ) 2 寺址 현 상태는 뒤편에 민묘 기가 民墓 들어서 있고 숲이 우거져 정확한 현상을 파

악할 수는 없으나 가로 약 50m, 20m . 25Cm, 세로 규모의 평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두께 직

경 120Cm 되는 원형 석재가 숲속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석재는 주초석으로 보기에는 너무 큰

것이어서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어쨌든 고산사지는 고려 초반기로 추정되는 마애불의 조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했던 사

찰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군유사는 ,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인해 폐사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 . 지명과 관련하여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군유사는 이

름 그대로 임금이 잠시 놀다 갔다하여 생긴 이름인데 군유사가 , 있는 군유산의 이름도 임금이

머물다 갔다하여 머무를 ‘유 자를 ( ) 留 ’ ‘ 써서 군유산 이라 ( ) 君留山 ’ 부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금은 고려 공민왕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인근지역의 지명들 즉, 풀을 먹여 훈련시켰다는

‘마구청 이나 ( ) 馬廐廳 ’ 또는 3천의 군대를 주둔시켜 전쟁준비를 하였다는 ‘삼천동( ( ) 三千 泉

洞)’등의 지명 등을 고려한다면 공민왕 보다는 고려를 건국했던 왕건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군유사는 한국전쟁 당시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과 관련하여 군경에 의해 전소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의 내용은 당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함평양민학살』( ) 정찬동 과『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김영택 등에 』( ) 소개된 내용 가운데 군유사 피해과정과 관련한 군유산작전 부분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보병 제 사단 11 20 2 제 연대 제 대대는 불갑산 주둔 빨치산 토벌에 앞서 군유산에 주둔한 공비들을 먼저 소탕하고자

작전계획을 세웠다 불갑산에서 . 50 . 서쪽으로 약 리 거리에 있는 군유산은 영광과 함평군의 경계에 위치한다 함평쪽에

는 손불면 북성리에 접해 있고 신광면 , . 산내리 등 험한 산세로 연결되어 있었다 군경이 함평까지 진주하여 전 지역을

확보했으나 유독 북성리와 산내리는 불갑산 주둔 빨치산이 확보하고 있었다.

손불면 북성리 사기마을 45 280 , 40 250 , 35 190 , 70 호 명 차경마을 호 명 승선마을 호 명 신광면 송사리 삼천동마을

여호 등 집집마다 입산한 좌익들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 , 주민들은 죽지 않으려면 방도가 없었고 주둔 대부

분의 좌익세력은 무안 해제방면에서 들어온 사람들로 마을사람들보다 그 숫자가 많아 군유산 골짜기에도 살고 있었다.

1951 2 19 ( 1. 14) 10 , 년 월 일 음력 시경 손불면 소재지 월천리 등지에서 요란한 총성이 온 산천을 떠들썩하게 흔들

고 있었다 무장한 . . 빨치산 대원들이 마을 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군유산으로 올라가도록 유도하였다

626 ┃ 제5편┃ 고려시대의 함평

빨치산 대원들은 좌익은 물론이요 모든 마을사람들을 군유산으로 올라가게 하여 8 , 부 능선에 배치 어깨동무를 하

게 하여 사람 장막을 만들었다 그리고 . . 무장한 대원들은 군유산 봉우리에 올라가 군경을 향해 총을 쏘았다 손불 북

성리쪽의 봉우리에서 신호탄이 군유산 봉우리를 향해 발사되었다 작전개시 . . 신호였다 사방으로 군유산을 향해 군경

들이 진격을 했다.

마을 집집마다 군인들이 불을 질렀다 군유산을 . . 포위하여 산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신광면 송사지역에서 군인들이

군유산 봉우리를 점령했다 무장한 . . 빨치산 대원들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다 어깨동무를 했던 수백명의 대열이 일

시에 흩어져 산 아래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 , 산 아래로 내려오고 산밑에 있던 군경들은 넓은 산을 포

위하여 그물로 고기를 잡듯 서서히 조여 오기 시작했다 채포된 . 사람들은 산봉우리에 모아놓고 군인들은 옷 색깔이

황토 빛이나 갈색 빛이 나는 사람들만을 골라 사살했다 빨치산 . 유격대들이 그와 같은 색깔의 옷을 많이 입고 있었

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 . 대부분 총살을 시켰다

참혹한 군유산 작전이 끝났다 여기저기 . , 산등성이에 시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차경 큰골과 사기 큰골의 수 천평

넓은 땅이 시체로 덮여 있었다 골짜기에서만도 . . 수천여명이 사살되었다 북성리 입구 승원마을 앞 냇가에서도 수백

명이 총살을 당했다 군유산 . 작전으로 수천 명의 생명들은 좌익도 우익도 원망할 필요도 없이 전쟁의 비극이 만들어

낸 동족살인극이었다.”

삼천동 마을 거주 최정의 씨 증언에 따라 한국전쟁 이전 시기 군유사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유사는 한국전쟁 이전 시기 두 분의 스님이 상주하고 있었다 절에는 . 법당을 비롯하여 종

각 층 , 5 . 4 , 석탑 등이 있었다 법당은 약 칸 정도의 규모로 함석으로 된 우진각 지붕이었으며

법당 앞에는 2 . 5 층 누각 형태의 종각이 있었다 그리고 종각 우측 법당과 종각 사이에는 층 석

탑이 있었다.

그러나 군유사는 1951 2 19 ( 1. 14) 년 월 일 음력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시에 군경에 의해 법

당과 종각이 전소되었고 층 , 5 . 석탑은 전쟁이후 무너져 있었는데 언젠가 없어졌다

4. ( ) ( ) 군유사지 君遊寺址 부도 浮屠

이 부도는 원래 군유산 서상사지 군유사 에 ( ) ( ) 6.25 있었던 것인데 신광면 송사리 송계마을 때

절이 폐사되면서 산 주인인 이동범 의 ( ) ( 357) 李東範 집 함평읍 함평리 정원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동범은 . . 한말 만경과 은율군수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후 그의 손자 이일완

( ) , , , 李日完 과 후손들이 관리해 오고 있는 이 부도는 기단부 탑신 옥개석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

아 있는 수준급으로 군내에서 유일한 것이다.

부도의 가장 밑 부분인 기단부를 보면 2 4 단

5. ( ) 해보 탑동 사지 寺址

모산마을 남쪽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계곡들이 형성되어 있는데, 남쪽에 좀

더 깊숙하게 이어지는 계곡이 탑동 골 이다 계곡은 ( ) . 100m 너비 미만으로 동북쪽에서 남서쪽으

로 300~400m 깊이로 형성되어 있는데 계곡이 끝나는 산 능선 바로 아래쪽에 형성된 좁은 대

지에 석불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해발 70~90m의 낮은 야산으로 곳곳에는 민묘들이 조성되어 있고 두개의 앝은

산 능선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는 계단식 논이 있다 계단식 . 논들은 현재 더 이상 경작되지 않

지만 가장 위쪽 논에 물웅덩이가 남아있어 절 시암 샘 으로 ( ) . 추정된다 샘의 북쪽에는 민묘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작은 산 능선이 있는데 여기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호인 171 함평 해보

리 석불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석불이 세워져 있었던 능선 대지부터 샘 부근의 계곡부에서는 기와조각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를 다듬은 흔적이 있는 석재도 확인되어서 이 일대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함평 . ( ) 해보리 석불입상과 동여정 의 同余亭 주초석으로 사용된 석탑재가 모두 여기에서 반출

된 것이라고 하므로 이 일대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 ) 일대를 죽림사지 竹林寺址 로 보

는 견해도 있지만 아직까지 , . 이 사찰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7. ( ) ( ) 해보 탑동 塔洞 석불입상 石佛立像

해보 탑동 석불입상은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호 로 171 (1990.2.24) . 지정되어 있다 원

628 ┃ 제5편┃ 고려시대의 함평

래 이 석불입상은 해보면 해보리 탑골의 절터에 세워져 있었으나 주민들의 신고로 밀반출될 위

기를 모면하고 지금의 위치인 함평군민 복지회관의 앞뜰로 옮겨지게 되었다.

석불입상의 원 소재지인 해보리 산 61 80~85m , 번지 일대는 해발 의 낮은 야산으로 파평윤

씨 사매당파 문중의 산과 논밭으로 이루어졌다 문중 . 7 산에는 파평윤씨 문중 묘 기가 들어섰고

주변에는 시누대가 무성하며 소량의 와편과 일부 면이 잘 다듬어진 석재가 발견되었다. 절터

향 좌측에는 지금도 풍부한 수량을 보이는 샘이 있다.

절터에는 석불과 함께 석탑 1기도 있었으나 파평윤씨 문중에서 동여정을 건립하면서 주춧돌

로 사용했다고 한다 석불입상은 . (1941 ) , 모산마을에 거주하는 노병기 년생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파평윤씨 문중묘역 중앙부의 향 우측에 서 있었는데 1980년 무렵 동네 젊은이들이 넘어

뜨려 버렸다고 한다 그. 때 대좌 구멍에서 고서들이 발견되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 길이 없다

고 한다.

이후 1980 8 , ( 년 월경 파평윤씨 문중에서 석불을 매각해 버렸고 이로 인해 석불을 탑재 탑골

사지 뒤편 고개 너머 ) 200m 발미마을 쪽 길가로 약 정도 이동시킨 후 실어갈 차량을 기다리는

도중에 리현석 작고 씨가 ( ) . 발견하여 군에 신고하였다 이어 전라남도의 긴급조치로 타지로 반출

을 막았다 그. 뒤 문중 관계자들에게 문화재 매각과 이동의 부당함을 설득시켜 함평군청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도록 합의했다.

1982 4 25 154-1 년 월 일 함평읍 함평리 번지에 자리한 함평군민 복지회관의 앞뜰로 옮긴 뒤

이전 표석을 세웠다 이때에 . 석불을 대좌 위에 세우려다 보니 석불 하반부가 파손된 상태여서

대좌에 마련된 장방형의 구멍에 들어가지 않자 석불 하반부를 5㎝ 정도 다듬어서 대좌의 구멍

에 끼우고 시멘트로 마감했다고 한다.

이 석불은 광배와 대좌를 갖춘 완전한 불상이다 광배와 . 1 ( ) 발등까지를 석 으로


제 절2 ( ) ( ) 고려청자 高麗靑磁 도요지 陶窯址

함평군에는 옛 도요지가 많이 있다 조선시대 . 때는 이 고장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특산품으로

꼽히기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옛 도요지 가운데 고려청자 도요지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고 조선시대의 도요지

는 조선시대의 유적 유물 편에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고려청자에 대해서 간략히 말해보면 고려청자는 , ( ), ( ) 원래 중국의 송 원 의 宋 元 영향을 받아

제작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송 원의 , 청자를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창력을 발휘하

여 세계 어느 나라의 도자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비취색을 만들어 냈으며 그 오묘한 빛깔은

고도 문명시대라는 오늘에도 그 신비를 풀지 못하고 있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그 원인이 일하는데 잡념을 넣지 않고 자기의 온갖 정성을 쏟았으며

자연에 순응했고 상욕 이 ( ) ( ) . 商慾 들지 않은 순수한 산물 이라는데 産物 가치가 있다

비취색 밑에 숨어 있는 단운고학( ) ( ) 斷雲孤鶴 의 상감 象嵌 140), 한들한들 흐느적이며 부풀어 오른 물레141)의 흔적이 정중동 의 ( ) . 靜中動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도예가인 영국의 버나드리치 박사는 고려청자의 , “ 깊고 엷고 적적한 맛의 오묘함을 꼭 내손

으로 이루고 싶다 내가 . 영국에 돌아가서 만일 이런 색의 도자기를 만들어 낸다면 나는 저 흐

린 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 내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고려청자를 세계 사람들은 근래까지도 중국 또는 일본의 특수 자기로 아는 사람이 많

았으나 이제는 한국 사람이 만든 세계적인 우수품인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까지 전남에서 고려청자 요지가 발견된 곳은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 , 계율리 사당리 칠

양면 심흥리 고흥군 , , , , , 두원면 운대리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동암리 영

광군 염산면 오동리 영암군 , 학산면 상월리 등인데 우리나라에서 최상품을 만들어낸 곳은 전남

의 강진군 대구면과 전북의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등이다.

함평군의 청자 도요지는 1983 ( ) 512 ( , 1 년 리현석 작고 이 손불면 양재리 밭 번지 리종일 소유

호요 와) 142-7 ( , 7 ), , 양재리 산 번지 리종욱 소유 호요 두 곳의 고려청자 도요지를 발견 『함평군

사 에』 수록했는데 1987 , 512 년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원 김정영 박문식이 재조사에 나서 밭 번

지 요에서는 고려청자 외에 조선시대 초에 분청자도 만들었음을 확인하였고 곳 , 2 외에 리종휘

소유의 논 호요 박의구 (5 ), (8 ), (3 ), 3 소유의 논 호요 리정훈 소유의 논 호요 곳과 또 손불면 동암

리에도 청자요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바 있고 년에는 , 1988 (2 광주박물관 조사진이 여시밭굴요

호요 리재오가 ), (4 ), 7 50m (6 ) 8 대밭요 호요 호요에서 동남쪽 지점요 호요 를 추가 확인하여 모두

기를 확인하였다 광주박물관은 ( , ). 김정영 박문식이 확인한 박의구 소유 논의 요를 조사하지 못함

광주박물관의 조사보고서142) 내용에 리현석


제6편 조선시대의 함평

제 장2 조선의 건국과 함평현 신설

제 절1 중앙 및 지방제도 개혁과 함평현의 성립

1. 중앙정치기구의 개편

조선왕조의 창건은 고려 중기에서 시작되는 무신정권과 원의 지배체제에 수립, 여기에서 벗어나

려는 개혁정치의 연속에서 진행되고 이루어졌다 왕위에 . 오른 태조는 처음에는 고려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도읍도 개경에 그대로 두었으며 고려의 , . 제도를 승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미

‘조선 을’ 개국한 공신 및 추종세려들은 고려와 다른 독단의 국가편제로 전환시키고자 제반 문물

제도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개혁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들의 . ( ) 개혁구상은 정도전 이 鄭道傳 지은 태

조의 즉위 교서에 잘 표현되어 있다.

왕은 이르노라 하늘이 . ( ) , , 많은 백성을 낳아서 군장 을 君長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럼으로 군도 의 . , ( ) ( ) , ( ) 君道 득실 이 得失 있게 되어 인심 이 人心 복종과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 의 , ( ) , . 天命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여기 매어있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건국 초기를 당

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자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례를 조목별로 후면 에 ( ) . 後面 열거한

┃제6장┃ 조선후기 지방행정의 운영과 함평농민항쟁 803

집필 / 김영택

┃제7장┃ 동학( ) 東學 농민전쟁과 함평 856

집필 / 김영택

┃제8장┃ 항일의병 의 ( ) 抗日義兵 전개와 함평인의 활약 875

집필 / 김영택

┃제9장┃ 조선시대의 유적과 유물 931

집필 / 이명헌

┃제10장┃ 고문서 및 전적자료 1012


양반은 자기과전의 경작자로부터 10 1 ( ) , ( 분의 세율의 전조 를 田租 징수하였는데 이 밖에도 곡초 穀

草)·수납가 기타 ( ), . 輸納價 잡물을 무상으로 받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그 수입이 많았다 이 때 사전

주는 경작자로부터 생산량의 10 1 15 1 ( ) 분의 을 전조로 받아서 그 가운데 분의 만을 지세 地稅 로서

국가에 납부하면 되었으니 양반에 , . , 의한 농민지배는 이런 제도에 의해 보장받았던 것이다 과전법

즉 수조권에 의한 토지 농민 · 지배는 15 . 세기 말에 이르면 현저히 약화되었다 양반층 내부에서 과

전을 둘러싼 갈등이 팽배하고 전주와 전객 사이의 대립이 격심해

2. 지방제도의 개혁과 함평현의 신설

1) 8도제와 전라도

왕권의 강화를 특성으로 하는 중앙의 편제 구성과 아울러 지방행정기관의 편제와 지방관의

권한강화는 초기 중앙집권화정책의 중요한 방향이며 왕조 의 , ( ) 王朝 민에 대한 일원적이고 직접

적 지배라는 면에서 국초부터 서둘러 시행하였다.

태조 때에는 고려의 유제 에 ( ) 遺制 따라 전국을 경기 도·5 ( ) 양계 로 五道 兩界 하였으나 태종

145) 한영우 조선전기 , ( ) , , 1983. 『 사회경제연구 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 』 을유문화사

146) 이경식 조선전기 , ( ) ( ) ( ) , ( ) 28 , 「 직전제 의 朝鮮前期 職田制 운영 과 運營 그 변동 變動 」 『한국사 연구 韓國史硏究 』 집

1980.

제2장 _ 조선의 건국과 함평현 신설 649

13 (1413) 8 ( ) 년 에 도로 개편하고 도 밑에 부 목 군 현 을 府 · ( ) 牧 · ( ) 郡 · ( ) 縣 설치하여 조선시대 지

방조직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전국을 경기· · · · · ·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 영안 ·평안 등 8 , 도로 나누고 도 아래에는

부 목 군 현을 · · · 두었다 도에는 . ( ) , ( ) 관찰사 감사 가 파견되었는데 그는 방백 이라 方伯 하여 자기 관

할 하에 있는 모든 군현의 지방관 즉, ( ) 부윤 府尹 ·목사( ) 牧使 ·군수( ) 郡守 ·현령, ( , ) 감 縣令 監 등

을 통할 감독하였다 이. 관찰사는 지방의 병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므로 지방 세력화할 위험이 있어

1 360 . 년 일로 임기가 제한되었다

관찰사 에게는 ( , 觀察使 方伯·監司) 행정 군사 사법 · · 3권을 행사하는 강대한 권한이 부여되

는 단임제로 하였고 아울러 상피제가 적용되었다.

부에는 대도호부에 부윤 도호부에 , , , 부사가 파견되고 목에는 목사 군에는 군수 현에는 현령

과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관찰사와 동격인 부윤을 제외하고 부사 이하 현감까지를 수령 또는 목

민관이라 통칭하였다

우리 고장도 함풍현 과 ( ) ( ) 咸豊縣 모평현 이 牟平縣 합병되면서 인근 영광군 속현이었던 해제현

( ) ( ) ( ) 海際縣 臨淄縣 과 임치현 또는 臨緇縣 그리고 나주군 소속이었던 영풍향 永豊鄕 ·다경부곡(多

慶部曲) ( ) . 6 을 합하여 함평현 으로 咸平縣 재편되었다 이렇게 하여 함평현에는 종 품의 현감이 파

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 . 의하여 함평현의 신설과정을

★補論 함평군 600년의 역사적 의의

2009 . 18 1409 ( 9 년은 함평군으로서는 의미가 큰 해였다 조선이 개국한지 년이 되던 년 태종

년 태종은 ) 고려의 구습을 혁파하고 나라의 면모를 일신하고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착수

했다 이. ( - ) ( ) 때 영광군 령 이던 領 屬縣 함풍 모평 두 咸豊 · ( ) ( ) 牟平 현 을 縣 통합하고 영광군 속현

이었던 해제현( ) 海際縣 과151) 임치현 그리고 나주군 소속이었던 영풍향( ) 永豊鄕 ·다경부곡(多慶

部曲) ( ) 6 을 병합하여 함평현 으로 咸平縣 재편함과 동시에 종 품의 현감을 임명해 국왕이 직접 통

치하는 현령관급 으로 ( ) . 505 1914 ( ) 縣令官級 승격시켰다 그리고 년 후인 년 현의 명칭이 군 郡 으

로 바뀌면서 ‘ ’ 함평군 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년은 . 2009 600 . 바로 그 주년이 되는 해다

당초 함풍현은 백제 때 굴내현 이었다 통일신라 ( ) . 屈乃縣 때 함풍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때

무안군 령에서 영광군 령으로 바뀌었다 모평현은 . ( ), 백제 때 다지현 多只縣 통일신라 때 다기현

( ) . 多岐縣 이었다가 고려 때 모평현으로 개칭되고 무안군 령에서 영광군 령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태종 9 . 년 두 현이 합쳐져 함평현으로 개편되고 현감이 임명되었던 것

『고려사 지리지 를 ( ) ( ) ( ) 高麗史 』「 地理志 」 보면 고려시대의 지방행정조직은 경 京 ·목( ) 牧 ·도

호부 군 현 진 등 ( ) 都護府 · ( ) 郡 · ( ) 縣 · ( ) 6 . 鎭 개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체계는 기능

상 경 목 지사군 현령관급 의 → → ( ) ( ) ( ) ( 知事郡 → 縣令官級 민정적 계열과 民政的 도호부→방어군 防禦

郡) ( ) , ( ) ( ) →진의 군사적 계열 다시 軍政的 말하면 내치행정 과 內治行政 국방임무 國防任務 를 수행

하는 지방행정조직으로 나누어 있었다 두. ( ), , ( ), 계열의 말단 관부 즉 官府 군수 현령 또는 현감

진사( ) 鎭使 는152) 그 기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다수의 속군현 을 ( ) 屬郡縣 거느리고 독

자적인 행정기능을 수행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 가장 기초적인 지방행정조직은 경 목 부 · · 아래에 설치된 지사군과 현, 도호부 아

래의 방어군과 진이었다 당시 . 129 335 , 28 . 전국에는 개 군과 개현 개의 진이 분포되어 있었다

군은 내용상 방어군 44, 17, 68 . 지사군 속군 개소로 나누어 있었다 방어군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설치된 군정적 관부로서 주로 국경지대나 해안지역에 설치되어 있었고 지사군은 세금을

거둬들이고 노역을 동원하는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민정적인 관부로서 군사적 필요에 의한 방

어군 이외의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 4 각기 국왕에 의해 종 품의 군수가 임명되는 독

립적인 관부로서 독자적 행정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 68 ( ) 개의 속군 은 屬郡 이들 독립적인 관

부와 달리 군수가 임명되지 않고 경 목 부 지사군 방어군에 · · · · 예속되어 행정적인 지배와 통

제를 받았다.

다음으로 지리지 에 「 」 실려 있는 335개현 중에는


2) 함평 전라수영의 치폐와 임치진

국초에는 중요한 해안 포구에 영진 을 ( ) . ( ) 營鎭 두었다 영진에는 처치사 處置使 ·절제사(節制

使)·도만호 만호 등을 ( ) 都萬戶 · ( ) . 萬戶 배치하여 수군을 지휘하였다 조선 초에는 육군보다 수군

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말부터 잦은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1) ( ) 대굴포 전라도수영 全羅道水營 155)

조선조 건국 초기에는 전라도수영이 현 전라북도 옥구 에 ( ) . 沃溝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 8 (1408) 12 년 월에 옥구는 전라도 해안선의 중앙에 있지 않아 방비업무에 허

점이 많다는 전라도절제사의 상소에 따라 당시 무안현이었던 대굴포로 전라도수영을 옮겼

다.156)

세종 14 (1432) 10 20 ( ) 년 월 일 전라도 순찰사 정흠지 의 鄭欽之 상계에 따라 대굴포에 있던 전

라도수영을 당시 무안현이었던 목포만호( ) . 木浦萬戶 로 옮겼다 157)

1440 ( ) 10 (1479) 1 6 년 목포의 전라도수영을 해남의 황원 으로 黃源 옮겼으며 성종 년 년 월 일에

해안선이 길어서 1 ( ) 개의 수영으로는 방위가 어렵다는 이극배 의 李克培 상계에 따라 황원의 전

라도수영이 수군절도사영 정( 3 ) , ( , 품 인 전라도 우수영이 되었고 당시 순천부 내례포 內禮浦 현

여수시 에) . 전라도 좌수영이 설치되었다

이상의 실록으로 대굴포 전라도수영은 ( ) 1408 1432 大堀浦 년에 설치되어 년에 폐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세종 , 14 (1432) ( ) 년 에 찬진 되었던 撰進 세종실록지리지에 수군처치사영인 무

안현 대굴포의 전라도수영에 전선 24 ( 8 , 16 ) 1,895 척 대선 척 중선 척 수군 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은 대굴포 수영이 상당히 대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대굴포의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옛 문헌들이 대굴포로 기록한 곳은 현재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으로 본다. 1914 이곳은

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함평군으로 편입된 무안군 진례면 이다 이 ( ) . 進禮面 곳을 대굴포로 보는 데

는 다음의 사료가 인용된다 성종 . 12 (1481) , 년 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고적항조에는 다음

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수영 은 ( ) . 古水營 대굴포에 있었다 지금은 해남으로 옮겼다”

또 대굴포에 대해서는

“무안현 동쪽 20 ( ) 3 리 나주 금강하류로 고려 때는 이 강을 지세 에 地勢 등져 흐르는 대강의

하나라”

, ( ) 대동지지 大東地誌 에는

“우수영의 고지가 대굴포에 있고 무안현 동쪽 20리다”

라고 했다 또한 . ( ) 동국여지승람에 대굴사 가 大堀寺 나오고 이 절은 대굴산에 있다며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 의 ( ) . 金克己 시 한수를 곁들여 적어 놓았다

서호 의 ( ) 西湖 흥취를 따라

멀리 백련( ) 白蓮 스님을 찾네

대나무숲 동산에 가을 일찍 맞이하고

소나무 가린 창문은 새벽빛을 늦게 보내네

- - 이하 생략

이 시로는 어렴풋이 현재 대곡 근처임을 ( ) , 大谷 알 수 있을 뿐이며 이 지역에서 몇 대를 살

았다는 90 . 1789 세 노인도 대굴포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년 호

구총수 지명에도 지금의 대곡 으로 ( ) . 大谷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지세에 등져 흐르는 3대강의 하나인 금강 하류와 배류지는 현

재 학교면 월호리 망월동 앞들을 배야 라 ( ) 背野 부르고 있고 그 지명 유래를 잘 알고 있어 바로

확증되었다.

옛 면성지 무안의 ( . ) . 綿城誌 고명 의 기록.

함평은 고려 때부터 나주의 청암도 에 ( ) , ( 靑岩道 속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모평현에 있던 덕수역 德

樹驛) ( ) . 은 폐지되고 가리역 만 加里驛 남아 있게 되었다 가리역은 지금의 신광면 가덕리 지내마을 앞

에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어 있던 역이다 가리역은 . 12 소로역의 하등역이기 때문에 관둔전 결과 공수

전 5 30 . 결을 지급받고 노비 명을 배치 받았다

청암도의 찰방은 나주의 청암에서 장성의 단암으로 옮겼는데 확실한 문헌의 기록이 없어 그 시기

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따라서 . 1871 가리역은 단암역의 속역이 되었는데 년에 간행한 한평현읍지에

장성 단암역의 속역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1871년 이전에 단암역이 찰방역이 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가리역은 . 무안→함평→무장→흥덕→정읍→태인→금구→삼례·제6로→소사→한성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국도상 의 ( ) . 國道上 역이었다

한편 고려와 조선은 중요한 길목에 역을 두는 한편 원을 두었다 원은 . 관명을 띠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귀빈은 . 지방관아에 부설된 객사에서 접대하였지만 그

외는 원에서 묵게 하였다

(2) ( ) 조선의 봉수제 烽燧制 와 함평

봉수는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활용된 것으로써 변경의 긴급한 정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

에 알리는 순전한 군사상 목적으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대략 .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후망 의 ( ) ( ) 候望 요지 가 要地 되는 산정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야즉 거화( ) 夜則擧火 주

즉 번시 하여 ( ) 晝則燔柴 ’ 평상시에는 1 ( ) , 2 , 3 , 거 를 적이 炬 나타나면 거를 경계에 접근하면 거를

경계를 범하면 4 , 5 ( ) , 거를 접전하면 거를 올리되 서울에서는 오원 이 五員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

에서는 오장 이 ( ) ( ) . 伍長 진장 에게 鎭將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159)

봉수는 목멱산 을 ( ) 5 ( ) 1 木覓山 중심으로 대 로 臺 이어졌는데 동측으로부터 제 대는 영안도·강원

도에서 오는 양주 아차산 의 ( ) , 2 楊州峨嵯山 봉수에 준하고 제 대는 경상도에서 오는 광주 천천령

( ) , 3 ( ) 廣州穿川嶺 의 봉수에 준하고 제 대는 평안도 육로로부터 오는 모악 동봉 의 母岳東峰 봉수에

준하고 제 대는 , 4 평안도 황해도의 · 해로로부터 오는 모악 서봉 의 ( ) , 5 母岳西峰 봉수에 준하고 제

대는 충청도 전라도에서 · 오는 양천 개화산 의 ( ) 5 陽川開花山 봉수에 준한다는 개의 연락조직을

갖추었다.

이를 통해 들어온 내용은 병조에서 사람을 지정하여 망을 보게 하고 이튿날 새벽에 승정원에

보고하여 왕에게 아뢰게 하였으나 만약 변고가 있을 때에는 야간이라도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봉수대에 주둔하는 병력구성을 보면 목멱산은 봉수대 매소마다 군사 4 , ( ) 2 인 오

간봉은 보조선을 말하며 직봉사이의 중간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도 있고, 국경방면의

전선 초소로부터 본진이나 본읍 으로 ( ) . 5 本邑 보고하는 단거리도 있었다 직봉 개 노선 중 전라도

해안선을 통과하는 봉수선은 순천의 돌산도→백야곶→흥양의 팔전산→마북산→천등산→장기산→

장흥의 전일산→ → → → →영암의 천관산 강진의 원포 좌곡산 완도 달마산 해남의 → 관두산→진도의 여귀

산 해남의 → 황원성 나주의 → 군산→무안의 유달산 고림산 함평의 → → 옹산→해제→영광의 차음산→

고도도 홍농산 무장의 → → 고리포 소응포 부안의 → → 월곡리→점방산→계화리→옥구의 화산→임피

의 오성산 불지산 함열의 → → 소방산 용안의 → 광두원 이하 → 생략 한성 → 목멱산의 제 봉으로 5 되어

있다.

이 봉수로에 따라 함평으로 된 옹산과 해제봉수는 1906년 행정구역정리 때 모두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옹산봉수는 . 현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에 위치한 봉대산에 있던 봉수로 현재 무안군

청계면의 도대봉의 신호를 받아 해제로 이어주는 연안( ) . 沿岸 봉수였다 해제봉수는 현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의 봉대산에 있던 봉수로 194.7m , , , 높이의 봉대산에 오르면 함평 영광 해남 진

도의 산세와 바다 위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섬들이 한 눈에 조망된다 성을 . 쌓은 흔적과 봉수

군들이 기거하며 먹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개껍질이 지금도 많이 나온

5. 조선시대 함평의 현감과 지방행정

1) 조선시대의 함평현감

우리 고장에는 문 무 음사 출신으로 · · ( ) 6 . 陰仕 종 품의 현감이 파견되었다 이때 관찰사 이하

지방관은 자기출신지역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여 통치상의 정실을 방지하고 지방 세력과 결탁

하여 독자적 분권화를 방지하고자 하였던 상피제 의 ( ) 相避制 규정이 시행되고 있었는데 함평현감

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함평의 현감은 비록 종 6 , 품이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는 여타 수령과 다르지 않았으니 행정·사

법 군정 · 등 모든 일을 왕권을 대행하는 차원에서 총괄하였다. 그 중 민정관계로는 농업장려(農桑

盛·․호구확보( ) 戶口增 ·교육진흥( ) 學校興 ·군정대비( ) 軍政修 ·부역책임( ) 賦役均 ·재판처리( ) 詞訟簡 ·향

현감의 임기는 처음에는 1,800 ( ) 일로 정해져 구임 함으로서 久任 민정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후에는 , 3 . 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현감이 임기규정에 따라 지방에 대하여 얼마나 책임감 있고 구임의 위치에서 행정을

어떻게 제대로 펼쳤는가에 대한 상황을 조선전기의 경우에는 살필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특

히 함평현은 신설된 태종 9 (1409) 100 년 부터 약 여 년 간 현감의 인적사항을 살필 수 있는 자

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 ( ) ( )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관정루 에 觀政樓 정인지 鄭麟趾 의

‘누기 가 ( ) 樓記 ’ 실려 있고 여기에 현감 김계보 가 ( ) 1 金季甫 부임 년 후부터 관정루를 지었다는

말이 씨여 있는 것으로 보아 1442 ( 년에 그가 현감으로 부임하였다는 사실과 또한 역락정 亦樂

亭) ( ) 에 현감 이계의 의 李繼義 기문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현감으

로 부임하였다는 사실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 함평현감의 출신도 우리는 살

필 수 없다 다만 . . 정인지의 관정루기에 의하면 문과출신이 부임했던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당시 지방수령의 자격을 엄격하게 하고자 하였던 세종초기의 진언과 그 실행의 차원에서 이를

짐작할 따름이며 그, 시기 함평현감의 수준을 엿보는데 정인지의 누기가 참조될

과거의 , 합격은 가문의 성쇠를 좌우하고 지방사회를 장악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향촌사회의 유력한 가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가문은 함평 이 나주 , , , , ( ), , , 정 진주 정 함평 모 함평 노 광산 魯 김 죽산 안 이천

678 ┃ 제6편┃ 조선시대의 함평

서 밀양 , . 박씨 등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어떤 성씨 집단이 함평지역의 향리역 을 ( ) 鄕吏役 가지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에 “함풍현의 속성으로 강씨 를 ( ) 姜氏 들고 향리역이었으며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 라고 ” 기록되어 있고 모평현의 , 속성에 김씨를 들고 향리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 . , 미루어 선초에는 강씨는 함풍현 김씨는 모평현의 속성으로 향리역을 세습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토지조사는 지금과 같이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수확량에 따라

조세량을 결정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수확량이 같은 땅을 같은 결부로 파악하는 측량이었다. 이

른바 결부제 인 ( ) , ( ) , 結負制 것인데 그 단위가 되는 결부속파 는 結負束把 바로 수확의 단위이었던 것이니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의 한움큼이 파 그 ( ), ( ), 把 열이 모이면 한 묶음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속 束 그

열은 한 짐이 된다는 부 그리고 ( ), 100 1 ( ) . 負 부가 결 이었던 結 것이다 그리고 이를 측량함에 있어서는

수확량을 비정하여 전지의 등급을 1-6 ( ) ( 등으로 정하여 그 등급에 따라 척 을 尺 달리하는 수등이척법 隨

等異尺法) . . 을 채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국대전의 규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토지는 6 20 , , 등급으로 나누며 년마다 한번씩 토지를 다시 측량한 후 대장을 만들어 본조 본도

본 고을에 보관한다.

1 ( ) 4 7 7 5 2 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주척 으로 周尺 바꾸어 자 치 푼 리에 해당하고 등전을 재는 자의 길

이는 5 1 7 9 , 3 5 7 3 , 4 6 4 3 자 치 푼 리 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자 치 리 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자 치 푼

4 , 5 7 5 5 , 6 9 5 5 . 리 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자 치 푼 등전을 재는 자의 길이는 자 치 푼에 해당한다 실지

면적에서 한자를 줌 이라고 ( ) 10 ( ) 10 ( ) 100 ( ) 把 하고 줌을 뭇 이라 束 하고 뭇을 짐 이라 負 하고 짐을 결 結 이라

고 한다 등전 . 1 1 38 ( ) 2 44 7 , 3 54 2 , 4 69 , 5 결은 묘 에 畝 해당하고 등전은 묘 푼 등전은 묘 푼 등전은 묘 등전

은 95 , 6 152 . 묘 등전은 묘에 해당한다

각 등급이 토지 14 1 . 짐이 중국의 묘에 해당한다

늘 경작하는 토지를 정전 이라 ( ) . 正田 하며 경작하기도 하고 묵이기도 하는 토지를 속전이라고 한다 정

전이라고는 하지만 토질이 메말라서 곡식이 잘 되지 않는 토지라든가 속전 이라고는 ( ) 續田 하지만 땅이 기

름져서 소출이 곱절이나 많이 나는 토지에 대해서는 고을원이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관찰사에게 보고

하여 다음번 식년에 개정한다.”164)


2) ( ) ( ) 조선전기의 면리제 面里制 ․ 오가작통제 五家作統制 와 함평

조선전기 지방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령칠사라고 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사

무를 원활히 하고자 하는 장치로서 이웃이 보증을 서도록 하는 다른 표현을 빌자면 이웃간에

상호연대책임과 의무를 지우도록 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등의 목적에서 인보법을 시행하고자 하

였던 것이다 이. 7 , . 때가 태종 년 정월이었는데 이에 대한 사료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65)

인보법 같은 ( ) ( ) ( ) , ( ) ( ) , ( ) ( 隣保法 것은 매년 호구 의 戶口 증감 과 인물 의 增減 人物 양천 良賤 과 군민 軍民 의 장약 壯

弱) , ( ) 과 단쌍 생산 물고 를 單雙 · ( ) 生産 · ( ) , ( ) ( ) 物故 두루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유이 流移 하거나 용은 容隱 하지 못

하게 됩니다 무릇 . ( ) ( ) ( ) ( ) ( ) 원근 에 遠近 차발 하는 差發 경중 과 輕重 부역 을 賦役 평균하게 하는 것은 군국 軍國 의

급한 일인데 각, ,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수고롭게 하거나 많은 사람을 동원하지 않고도 한달 안에 가만히 앉

아서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


제 장3 성리학의 보급과 함평의 사림문화

제 절1 조선시대 교육제도와 과거제

1. 조선시대 교육제도와 함평향교

1) ( ) 조선시대의 관학 과 官學 함평향교

조선의 건국과 함께 유교를 국시로 정하였던 왕조와 사대부는 학교를 매우 중시하였다.

태종즉위 후 얼마 안 되어 도평의사사 의 ( ) ( ) 都評議使司 배극렴 裴克廉 ·조준( ) 22 趙浚 등이 개 조

목을 상언 하는 ( ) 上言 중에서 “학교는 풍화 의 ( ) , ( ) ( ) 風化 근원이고 농상 은 農桑 의식 의 衣食 근본

이니 학교를 , ( ) , 일으켜서 인재 를 人才 양성하고 농상을 권장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할 것 을” 제

일 첫 조목에 넣어 학교의 중요성을 강조


조선후기에 이르러 향교와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이에 대한 타

제3장 _ 조선중기 성리학의 보급과 함평의 사림문화 689

개책의 일환으로 민과 관이 공동으로 출자하고 재원을 모아 양사재 를 ( ) . 養士齋 건립하기도 하였다 이

때 재생 들은 ( ) 齋生 혹한기와 혹서기를 피하여 양사재에 거쳐하면서 훈장의 지도 아래 매일 강경과 제

술을 반복하였는데 이, 때 충당되는 비용은 관민이 공동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학계 등을 운영하였거

나 아니면 생도들이 학습료를 내는 방식으로 마련하였다 이외에도 . 생원 진사시 에 · ( ) 小科 합격한 사

람들로 자격을 제한하여 이들이 공부한 사마재 가 ( ) . 司馬齋 있었다 우리 함평에도 향교에 양사재가 설

립되었었다 대성전 . 서북쪽에 사마재가 있었고 또한 양사재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양사재로 통합

되어 운영되었다 그. 1 , ( ) 2 , ( ) 2 , 임원에는 훈장 인 장의 인 색장 인이 掌議 色掌 있었으며 학도 등의 명

부인 ‘사마안 거접안 등과 ( ) 司馬案 ’ ‘ ( ) 居接案 ’ ‘재임안 이 ( ) 齋任案 ’ 남아 있다

생원 진사시에 · 합격한 것을 입격이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 1 5 , 2 25 , 3 70 등 인 등 인 등 인을 가려

내서 백패를 내리고 주과를 주었다 그러나 . 잡과 합격자의 백패와는 달리 생원 진사시 · 합격자의 백

패에는 국왕의 어보 중의 ( ) ( ) . 御寶 하나인 과거보 를 科擧寶 찍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생원·진사시의

백패는 국왕이 내려주는 합격증이었다

생원 진사는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이를 ( ) 급제 혹은 출신이라고 한다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었다 생원 진사에 . · 입격하는 것만으로 벼슬을 살기는 어

려웠으며 얻는다 하여도 하급직인 능참봉 교수 훈도 · ·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생원·진사만

되어도 면역의 특권이 주어지는 등의 향촌에서의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대우는 현저한 것이었

비록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생원 진사가 · 되고자 애쓰는 것이었으

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생원 진사를 · 양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2) ( ) 문과 文科

문과는 대과 혹은 동당시 라고도 ( ) 東堂試 하였는데 이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원칙적으로는

생원 진사이었지만 · 실제로는 일반 유생인 유학에게도 자격이 주어졌다 문과도 . 정기시인 식년

( ) . 式年 문과와 부정기적인 기타의 문과로 나눌 수 있다

식년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의 ( ) 初試 · ( . ) 覆試 會試 · ( ) 3 殿試 단계를 거치게 되었고 이중 초시·복시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 · 나누어 고시하였다 초시는 . ( ) 향시 鄕試 ·한성시( ) 漢城試 ·관시( ) 館試 가 있었는

데 소과와 같이 식년 이전해 에 ( ) 上式年 각도와 한성부에서 시행하였고 관시는 성균관에서 실시하

간 함평출신으로 1930년에 간행된 함평군지에 의하여 정리하여 보면 다음의 도

표와 같다 여기에서 . 126 0.83% 보면 모두 인이 급제하였음을 볼 수 있겠는데 이는 전체의 에

해당하는 것이었


여진정벌을 위한 군사모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처였다 세조는 . ( ) 북정 에 北征 따른

야인 의 ( ) 野人 회유책 또는 서북 지방민을 위한 인심수습책의 하나로서 별시무과를 자주 실시하

여 많은 인원을 뽑았던 것이다 이것은 . ( ) . 조선 후기 만과설행 의 萬科設行 시작에 불과하였다 계

속되는 외침을 대비하는 데 있어서 각 진 에 ( ) 鎭 배치되어 있는 유망병의 원수를 채울 수 없는

데다가 이들에 대한 생활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변장 들의 ( ) 邊將 침탈로 도망병이 많이 생

기게 되었다 이에 . . 국가에서는 만과를 자주 설행하여 군사를 보충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양

란 을 ( ) 兩亂 거치면서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전공을 세운 사람은 정도에 따라 무과에 등과시키

기로 하였다 조선시대 . . 함평출신 무과 급제자

제 절2 ( ) 호남사림의 성장과 함평의 정개청 鄭介淸 ․기축옥사

( ) 己丑獄事

1. 사림파의 성장과 호남사림

1) 사림파성장의 배경과 의의

15세기 조선사회는 성리학의 철학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집중적으로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홍건적과 . , , 왜구의 침략과 명의 압력 대토지 소유의 확대 불교의 폐해와 민생의

피폐 등 고려시대부터 누적되어온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제도

를 정비하는 것이 당시 건국세력의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성리학적인 명분론도 상대적으로 덜 중시되었다. 역성혁명이기는 하지만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으며 나아가 신분적으로 하

자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건국세력이 명분적인 면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성종 대에 들어서면서 고려 말 온건개혁파로 조선창업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에 남아 있던 세력

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영남사림 이 ( ) 嶺南士林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함

에 따라 조선왕조에는 새로운 정치적 기풍의 등장을 예고하는 징조를 나타내고 있었다. 향촌재

지세력이었던 이들의 등장은 그 때까지 지속되어온 초기의 학문적 경향과 전통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였다 성종 . ( ) 자신이 호문 好文 의

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오면 국왕과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므

로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관료층이 필요


향촌에서 일체의 사회관계를 재정비하려는 노력으로 구체화되었다 세기에 이

미 민간 자치적 곡물대여기관인 사창제 의 ( ) 社倉制 실시와 유향소 복설 운동으로 나타났던 이들

의 움직임은 16 . 세기에 들어와 서원의 설립과 향약의 보급으로 그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재

지기반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온 지방의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이들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은 훈척계열의 비리행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사상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도리론 명분론에 · 대한 확신과 자신들이 농촌에서 ·척

신들의 비리행위를 직접 체험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은 . ( ) 주로 언관 직을 言官 차지하

고 훈구대신들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 수세에 몰린 훈척계열들이 사림파에 대한 정치적 보복

으로서 일으킨 것이 곧 사화( ) . 士禍 였다

연산군과 중종 조에 걸쳐 일어나는 사화로 인하여 정계에서 물러났던 사림들은 향촌에서의 사회관

계를 재정비하고 향촌운동을 기하려는 노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표출하였으니 중종 대 이후의 향약보

급운동이 그것이었다 당시의 . 경제변동에 편승한 훈척계열의 비리행위에 직면한 사림들은 훈척들의

사림은

훈척의 비리와 탄압에 직면하여 도덕성과 수신 의 ( ) 修身 중요성을 절감하고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의

식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성리학적 , ( ) 세계관과 이기심성론 에 理氣心性論 대한 이론적 연구를 본

격적으로 수행하였다.

15세기 말 이후 사림들은 끊임없이 정계진출을 기도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학문연구와 후진양

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 . 수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이러한 풍조는 더욱 현저해졌다 또한

훈척계열 의 ( ) , ( ) 勳戚系列 비리를 비판하고 유교적 이상정치 즉 도 에 道 입각한 왕정을 구현한다

는 이들의 정치철학은 학문에 있어서 인간의 심성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 성리학의 발달을 보

게 하였다.172) 마침내 훈구계열의 관료군은 사림으로 대체되었고 선조대에 , 이르면 사림정치가

기존의 학문풍토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먼저 수기 에 修己 힘쓸 것을 주장하였

다 따라서 . ( ) . 주자성리학 수신서인『소학 小學 』이 중시되었다 174)

성리학에서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도학적 성격의 강화와 함께 나타나는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주자 중심 의리 ( ) , . 朱子 중심의 도통론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재야학자들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동시에 세조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이 학문에 반영된 것이었으며 훈척을 공격하는 효율적인 무기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정계에서의 훈구파에 대한 공격은 한편에서의 농민과의 관계에서도 다른 측면을 구현하게

되었다 주자의 . ( ) 권농문 에 勸農文 나오는 바의 지주전호관계의 명분을 향촌사회에서 시행하

2) 호남사림의 성장

이처럼 16세기는 향촌재지세력이었던 사림이 훈구세력과의 대립과정을 통하여 중앙정치의 주

도세력으로 성장하는 시기이었다 그리고 . 우리나라에서의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파의 형성과

정이기도 하였으며 성리학의 , 이해와 지연 혈연 · 등과 관련하여 붕당의 전개과정이기도 하였다.

학파를 보면 서경덕 학파가 ( ) ( ) ( ) 徐敬德 제일 먼저 형성되고 뒤를 이어 이황 李滉 학파와 조식 曺植

학파 마지막으로 , 16 ( ) ( ) . 세기 후반 이이 와 李珥 성혼 의 成渾 학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붕당은

대체로 서경덕 조식 이황학파는 · · 동인 으로 ( ) ( ) 東人 이이와 성혼학파는 서인 으로 西人 자정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 학파와 붕당을 이해할 때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서경덕은 경기도에 이이 성혼은 경기 충청도에 · 근거를 두면서 호남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황학

파는 경상좌도 조식학파는 경상우도에 기반으로 가진 것으로 보았으며, 이황·조식학파는 성종

대 영남사림파 서경덕 이이 성혼학파는 , · · 중종 대 기호사림파와 연결해 설명되어 왔다. 결국

호남사림은 기호사림에 포함되어 논의되었으며 그나마 경기 충청지방의 · 주변부로 강하되어 왔

다 그러나 . 16 실제 세기 호남사림은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다양한 학파가 공존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또한 선조 초년에는 중앙정계에도 적지 않게 진출하여 주도권을 행사

호남사림은 이미 연산군 대에 두각을 나타냈으니 영광의 송흠 과 ( ) ( ) 宋欽 나주의 최부 崔溥 와

같은 이들이 있었다 후자는 . . 특히 동국통감의 사평을 쓴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연산군의 기

묘사화에서 화를 입었는데 이 때 호남출신은 전체 피화자의 12% . 를 점하고 있었다 중종 대에

이르러 기준( ) 奇遵 ·최산두( ) 崔山斗 ·유운( ) 柳雲 ·윤구( ) 尹衢 ·유성춘( ) 柳成春 ·안처순( ) 安處順 ·

양팽손( ) 梁彭孫 ·고운( ) 高雲 ·박상( ) 朴祥 ·박소( ) 朴紹 ·송순( ) . 宋純 등이 그들이었다

명종 대에 이르러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에 대해 이해가 깊어지면서 조선사상계가 활발한 논의

호남사림도 내부의 분파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니 먼저 서경덕과 이황·조식의 학

파가 형성된 것과 궤를 같이하였다 호남에서의 . ( . 1523-1589) 서경덕 학파로는 박순 朴淳 ·이

중호 등을 ( , 1512-1554) ( ) 李仲虎 비롯하여 노수신 盧守愼 ·윤행( ) 尹行 ·윤의중( ) 尹毅中 ·박응남

( ) 朴應南 등이 있어 이들 문인들과의 입장을 같이 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나주의 최부의 계열이

이에 합류하였다 이중호의 . ( ) 아들로 후일 동인의 중심인물이 되는 이발 李潑 ·이길( ) 李洁 등과

정개청 도 ( ) . 鄭介淸 이에 속했다 한편 연산조의 송흠과 중종 대의 박상을 잇는 면앙정 송순도 일

파를 이루었는데, ( ) 김인후 金麟厚 ·나세찬( ) 羅世纘 ·기대승( ) 奇大升 ·임형수( ) 林亨洙 ·임억령(林

億齡)·양산보( ) 梁山甫 ·양응정( ) 梁應鼎 ·유희춘( ) 柳希春 ·오겸( ) . 吳謙 등이 있었다 여기에는 후

일 정철 고경명 김천일 이후백 등이 ( ) 鄭澈 · ( ) 高敬命 · ( ) 金千鎰 · ( ) 李後白 이에 연결되고 서인으로

결집하게 된다.

호남사림은 선조 6 (1573) , , 년 박순이 좌의정 노수신이 우의정 유희춘이 대사헌이 되면서 신

진사류 소당 가 ( - ) ( - ) . 小黨 구신들 노당 을 老黨 물리치고 정계의 주도권을 잡는데 기여하였다 그러

나 얼마 되지 않은 선조 8년 동 서· 분당에 따라 신진사류는 붕당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동인

에는 서경덕 이황 조식의 · · 학파 서인에는 , 이이 성혼의 · 학파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에 따라

호남사림도 동서로 분립하게 되었던 것인데 호남에서의 분기대립은 서경덕 학파와 이이학파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 이이 성혼 송익필과 · ·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정철이 중앙

정계에서 서인의 주요인물로 부각되면서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본래 . 정철 가문은 서울을 기반

으로 하였으나 을사사화를 계기로 집안이 몰락하자 16 6 (1551) 세 때인 명종 년 에 담양 창평으

로 내려왔기 때문에 기존의 호남사림보다는 재지적기반이 취약

2. ( ) 정개청의 학문세계와 기축옥사 己丑獄事

2) ( ) ( ) 기축옥사 己丑獄事 와 정개청 鄭介淸

한국에서 붕당형성의 기미는 고려 말에 재지중소지주층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하

였을 때 이미 나타났다 그러나 . 이러한 기미는 정치의 주도권이 결국 국가적 개혁론자들에게

돌아가 이들에 의해 과전제가 시행되면서 크게 억제되었다.

또한 붕당은 유교정치사상에서는 본래 용납되지 않았다 중국 .

1) 정개청의 생애와 사상

박순 이중호 노수신에 · · 이어 호남의 서경덕학파의 대표자격이었던 정개청은 본관은 고성(固

城), ( ) ( ) , ( ) 24 (1529) 자 의백 호는 義伯 곤재 이며 시호는 困齋 문청공 으로 文淸公 중종 년 에 부 세

웅과 모 금성 나씨 사이에서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가 중년에 나주 곡강촌(현

재 동강면 으로 ) , 1570 ( ) ( . 이거하였으며 년경 무안 엄담 윤암 현재의 淹潭 輪岩 함평 엄다면 엄다

리 제동 에 - ) . 濟洞 정착하여 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간 많은 재상들의 천거가 있

어 교정랑청에 불려가고 곡성현감 등에 부임하였으나 그 관직생활은 1 . 년이 되지 못되었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나주와 무안 함평에 · 재지적기반을 가지면서 강의계 등을 중심으로 학문

을 가르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그는 예학과 역학뿐만이 아니라 역사·천문·지리

의약 산수 복서 덕공력 의 · ( ) 算數 · ( ) 卜書 · ( ) 德功力 기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박순에 의해 왜

적을 막을 수 있는 팔도도원수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은 매우 많아 이중호의 문인이었던 나사침 의 ( ) ( ) 羅士枕 아들인 나덕명 羅德明 ·덕준

( ) 德峻 ·덕윤 형제들과 ( ) 3 ( ), ( ) ( 德潤 그의 사위인 정식 나세찬 의 鄭湜 羅世纘 손자인 나덕원 羅德

元), ( ) ( ), ( ) ( ), 안응정 문하이었던 安應鼎 안중묵 최경회 의 安重黙 崔慶會 조카이었던 최홍우 崔弘宇

유몽정 의 ( ) ( ), ( ) ( ) 柳夢井 종질인 유양 윤형정 의 柳瀁 尹衡貞 아들이었던 윤제 尹濟 등 나주·화

순 함평 보성 · · 등의 유력가문 출신들이었다 그는 . 평생을 격물치지하는 바의 학문에 힘을 쏟

아 공리와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하고 있다.

千乘景公同草腐 천승 수레끄는 경공도 풀과 같이 썩는데

一瓢顔子柱天榮 한쪽박의 안자는 하늘의 영화를 기둥삼네

是知仁義眞良貴 이로서 알겠느니 인의가 진실로 참되고 귀한 것을

莫道公侯謾姓名 공후를 말하여 성명을 오만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그의 인품과 학식에 대하여 박순은 주자 정자 · 이후의 단 한사람이며 윤선도에게서는

동방의 진유 로서 ( ) . 眞儒 이황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당대의 명성은 붕당을

달리한 유희춘 이이 · 등에게서도 인정되었다 미암 . ‘ 유희춘 은 ( ) 眉岩 柳希春 선생의 간절하고

깊은 함양 을 ( ) ( ) 涵養 마땅히 여기어 후학의 사표로 근덕 하여 勸德 덕준 등으로 하여금 이에 종사

( ) ( ) , ( ) ( ) 從師 케 하였으며 율곡 이이 도 栗谷李珥 또한 덕준 등에게 이르기를 정모 鄭某 는 학행 學行

이 독실하여 가히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함으로 모름지기 자주 종유 하라 고 ( ) 從遊 ’ 인정하고

격찬할 정도였다.

그도 여타의 사림과 마찬가지로 선학과 노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는 . 선학에 대하여

‘선학 을 ( ) ( ) 禪學 하는 사람은 맨 처음부터 욕심을 막고 사색 을 思索 가다듬으며 걱정을 내쫓는

정신을 양성하여 형체를 떠나고 잡념을 ( ) 離形 떠나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함으로 몸만 결백하게

할 뿐이어서 그 마음이 세상의 임무 를 ( ) ( ) 任務 싫어하고 번거롭게 여기며 직분 을 職分 버리고 청

허 함 ( ) , ( ) ( ) ( 淸虛 만 탐내어 사모하여 성분 을 性分 멸각 시키고 滅却 손발을 제멋대로 두어 종일 終

日) 아무 것도 하지를 않으며 스스로 고상하고 미묘함을 직접 끊고 능히 만사에 응한다고는 하

지만 하나의 사물 이 ( ) ( ) ( ) ( ) ( ) 事物 면전 에 面前 다다르면 명선 과 明善 성신 의 誠身

정해년 왜변에 열읍 이 ( ) ( ) ( ) ( ) 列邑 군사를 조발 하였는데 調發 전주 부윤 남언경 이 全州府尹 南彦經 소활하여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 ,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담

하여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 ( ) 나누어 조견 하는 調遣 데 있어 하루가 안 되어 마

무리지었다 그. ( ) ( ) . 장령 들은 將領 여립이 모두 대동계 에 大同契 들어 있는 친밀한 무사를 썼다 … 해서 지

방이 바야흐로 임꺽정의 난을 겪었는데 여립의 요언 을 ( ) 妖言 듣게 되어서는 백성들과 관리들이 두려워하

여 모두 군장 을 ( ) ( ) . 軍裝 예비하고 급경 에 急警 대비하였다 그런데 여립의 도당들도 그 사이에 섞여서 또한

변고에 대비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아 앞을 다투어 병기를 수리하였는데 실정을 , 모르는 자는 도적을 방

어하기 위한 것으로 여겼다.

이때 해서에 떠도는 말이 자자하였는데 호남 , “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서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

다 그때에는 . ( ) ( ) 수륙 의 水陸 조례와 일족이웃의 ․ 요역과 추쇄 등의 推刷 일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

과 서얼 을 ( ) ( ) ( ) . 庶孼 금고 하는 禁錮 법을 모두 혁제 할 革除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

하였다 어리석은 . .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현혹되어 왁자하게 전파하였다

여립이 사기 가 ( ) 事機 자못 누설되어 사람들의 말이 점차 널리 퍼진 것을 보고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

여 변란을 일으키려는 계책을 결정하였다 이에 . ( ) 비밀로 부서 를 部署 약속

그런데 정여립이 동인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서인의 동인제거의 옥사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

하여 동인 측은 혹독한 피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우득록 부록 상권 곤재선생사실에 나오는 바만

열거를 하면 다음과 같다.

“정여립 이 ( ) ( ) ( ) ( ) ( ) 鄭汝立 변사 를 變事 일으킨 것이 상정 되어 上程 정철 이 鄭澈 위임받은 관리 委官 가 되었으며

그 기회를 타서 화 를 ( ) ( ) ( ) ( ) 禍 꾸며 선 한 善 무리들에게 미치게 되었는데 먼저 여립 으로써 汝立 위학능문 僞學能文

으로 한 세상을 속인 것으로 삼고 진신 사이에 ( ) ( ) 振紳 이름높은 유자 와 儒者 티없이 맑은 선비가 모두 그 속임을

입게 되고 여립이 주살 되었으며 ( ) ( ) ( ) 誅殺 우상 정언신 은 鄭彦信 갑산 에 甲山 유배되었다가 이로 인해 배소에서 죽

고 참판 , ( ) ( ) , ( ) 정언지 는 鄭彦智 강계 로 江界 귀양갔으며 참의 백유양 은 白惟讓 옥중에서 장살되고 직제학 홍종록

( ) ( ) , ( ) 洪宗祿 은 구성 으로 龜城 귀양가고 구암한백겸 은 久庵韓百謙 곤장 맞고 멀리 귀양갔으며 영남의 수우 최영경

( ) , ( ) ( ) , 崔永慶 은 옥중에서 장살되고 조계 유종지 는 潮溪柳宗智 남명 의 南冥 문인으로 옥중에서 장살되고 동강 김

우옹 역시 ( ) ( ) 東岡金宇顒 남명의 문인으로 회령 에 會寧 유배되었다”

그런데 정철과 같은 호남에 기반을 둔 사림관리가 가장 혹독한 피해를 당하였으니 부제학 이발(李

潑. - . - ), ( . - . , - ), 자 경함 호 景涵 동 그 東岩 아우 사인 이길 자 李洁 경연 景淵 호 남계 南溪 지평 유

몽정 자 ( . - , - ), ( . , - . - ), 柳夢井 경서 호 景瑞 청계 도사 淸溪 조대중 曺大中 자 화우 和宇 호 정곡 鼎谷

찰방 이황종 자 중초 호 ( . , - . - ) 李黃鐘 仲初 만취 등이 晩翠 옥중에서 장살되었고 그 나머지는 수를 헤

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기축옥사는 전후 사자 수백 ( ) , 10 , 死者 명 조신명환으로 죽은 자 여명 연좌되어 유배된 자 수

백 명 파출자 수십 , ( ) . < > 罷出者 명이었


제 절1 조선중기 수취체제의 모순과 군역체제의 동요

사유지를 노비노동을 이용해서 경작하거나 또는 빈농·무전농민에게 대하여

경작케 하고 수확을 반분하는 병작반수제로 경영하였다 이러한 . , 토지는 농장이라고 불리었는데

양반이 신분적으로 농민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은 여기에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 이 같은 사

적토지소유를 통한 특권의 유지확대는 더욱 가속화하게 되었다 이것은 . 양반관료에의 수조권을

통한 토지분급제가 15 . 세기 말을 거치면서 현저히 약화되었던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양반층 내

부에서 과전을 둘러싼 갈등이 팽배하고 전주와 전객사이의 대립이 격심해졌

 . , 양반관료들은 녹봉만을 받게 되었으며 한편

으로는 이에 대신해서 사적소유지의 집중을 도모해 나갔던 것이다.177)

15세기 말부터 수조권을 매개로 한 토지지배가 무너지면서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지배가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 생산력의 꾸준한 발전을 토대로 대토지 집적을 둘러싼 지주전호제라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정립되어갔다 왕실과 . 지배층들은 개간과 아울러 일반 민전을 매입하거나

겸병하여 대토지농장을 형성함으로써 부를 축적해나갔다 농장은 . 이미 이전시기부터 전해오는

것이 많았고 평안도황해도강원도의 ․ ․ 묵은 땅을 개간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생산력이

높아진 15 ( ) 세기 말부터 지배층들이 적극적인 신전 개발이나 新田 매매․겸병․탈점․장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확대함으로써 더욱 발달해갔다.

새로운 농법의 개발과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경작지를 확대할 필요성이 절실해지고 인구증가로 땅

값이 등귀하자 지주들은 토지개간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지주들의 신전 개간의

일반적인 형태는 연해안 지역의 간석지 개간인 언전 곧 ( ) ( ) . 堰田 해택지 海澤地 개발이었다 간석지

개간문제도 고려말에 논의된 적이 있었으나 인력동원의 문제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15

세기 말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중앙의 . 왕실이나 권세가가 주로 중심이 되어 추진한 해택지

개발은 전라도와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서해안 전지역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규모가 큰 것이 특징


제 절2 ( ) ( ) 임진 壬辰 ․정유왜란 丁酉倭亂 과 함평

1. 임진왜란의 발발과 전황

조선에 아무런 예고 없이 일본대군이 침략을 개시한 것은 선조 25 (1592) 4 14 . 년 월 일이었다 일본

은 이미 전쟁 전에 몇 번의 외교사절을 보내왔고 이에 대하여 조선에서도 통신사로 황윤길( ) 黃允吉 과

김성일 을 ( ) . 金誠一 일본에 파견하여 외교적인 접촉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외교교섭

에서 조선은 일본이 의도한 침략의 속셈을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선린만을 희구하였다. 이리하여 외

교교섭은 결렬되었고 일본의 침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에서 몇 사람의 무능한 수령을

교체하고 영남과 호남지방의 연안을 중심으로 그 요해처에 성지 의 ( ) 城池 수축과 무기의 정비에 힘을

썼다 그러나 . . 이것마저 민심의 동요만 일으켰을 뿐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중지하고 말았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외교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침략군을 편성하기 시작하여 1진에서 16진까지를

육군으로 구성하고 그 외에 수군 약간을 두었는데 총 병력은 28 1,800 . 만 여명이었다 이들의

선발대인 1 4 3 1 ( ) ( 진에서 진까지는 월 일부터 그들의 본거지인 명호옥 을 名護屋 떠나 일기도 壹岐

島) 5 로 출발케 하고 진 이하는 각기 인솔하는 대장의 근거지를 떠나 명호옥에 집결하는 시기를

정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여 그들의 선발대 1 7,000 700 만 명을 군선 약 여척에 싣

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 , 조선의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고 이후의 전투에서 조선군이 실

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었다 조선은 . 200 건국 이래 년간의 평화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군정이 문란하고 군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또 실전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반면

2. 의병의 봉기와 함평출신 의병의 활약

의병이 봉기하게 된 동기는 관군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국토가 적에게 짓밟히고 많은 사람

들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병장은 . 대개가 전직관원으로 문반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무인들은 소수였으며 덕망이 있어 지방에서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민족적 저항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고, 유교의 도

덕적 교훈인 근왕정신이 오랜 유교교육을 통하여 깊이 뿌리를 박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3 ( ) 도의 관군이 무너지자 조정에서는 초유사 를 招諭使 각 지방에 파견하여 관군의 재건을 위

한 근왕병의 궐기를 외쳤으나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 서민이나 천민들의 일부

는 관권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 반항은 왕이 서울을 버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이제

국가는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유한 것이었

처음 곽재우가 의병을 규합하고 있을 때 합천군수 전견룡이 곽재우를 역적으로 조정에 보고하고 의병에 참가한 자를 흩어지게 한 것은 관군과 의병간의 불화 등에도 원인이 있었으나 아

무리 전시라 할지라도 사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통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호남에서도 고경명과 김천일이 의병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고려되어 유명무실하

기는 하지만 관군이 있었으므로 의병의 봉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특히 . 호남지역에서는 이른

바 정여립 모반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의병의 봉기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고경명

이 전라도순찰사인 이광의 2차에 걸친 징모 령에 전적으로 협조하였던 일은 이러한 문제와 무

관하지 않다 조정에서 . 이를 헤아려 신속히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사면령을 내

려 이 사건을 마무리한 것도 하나의 커다란 장애를 없애는 적절한 조치였다

나 임란초기에 큰 역할을 수행했던 의병은 전란의 장기화에 따라 점차 변질되어 갔다. 25 선조

년 월 (1592) 10 이후에는 각 지방에서 의병이 우후죽순 같이 일어나고 이들 의병이 난립하여 여러 가

지 폐단을 일으켰다 또한 . . 의병 중에는 명목뿐인 의병도 있었다 이와 같이 의병이 변모된 것은 임란

초기에는 각 지방에서 명망이 두터운 의병장이 봉기하였으나 이후에는 이들을 대신할 만한 의병장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 관군의 징모를 꺼리는 의병들이 의병장으로서 적격유무를 헤아리지 않고

이름 없는 의병장의 휘하에 모였기 때문이다 여 . 100 진에 이른 의병 중에는 안전한 곳에서 영세한 적

이나 쫓고 전공을 탐내거나 관군과 대립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등 국가의 통제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으로 오히려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

전직 우의정 심수경이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그로

하여금 모든 의병을 통솔케 하였다 이와 . 같은 조정의 일련의 조치에 의하여 의병의 통합이 명

목상으로는 이루어진 것 같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각지에 의병이 난립하였고 그들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채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던 것

전란에다 기근이 겹쳐 경기·전라·경상도에서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는 등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어 의병에게 군량을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에 의병은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도망병이 줄을 잇게 되어 의병 중에는 떼도둑으로 변하는 일조차 있게 되었다

관군과 명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전란이 초기와는 달리 관군의 권위가 높아지

고 민심이 안정되면서 의병의 존재가치는 떨어졌다 그리하여 . 조정에서는 각 지방의 의병을 관

군에서 흡수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관군이나 수령의 강력한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조 26 (1593) ( ) ( ) 년 조정의 의병 관병화 조치에 官兵化 따라 상당수의 의병장은 관인 官人 이 되었다

정월에 . 조정의 대

신들이 관군과 명군만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의병은 쓸모없

는 군대 라고 ’ 공언할 만큼 의병은 질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후기에 . 이를수록 의병장의 질적

저하와 관군에서 도망했거나 이기심에서 의병에 참여하는 등 의병의 저질화가 가속화되어 의병

에게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또. 설사 훌륭한 의병장이 대국적 견지에서 행동하려해도 의

병들의 집단의사가 이를 따르지 않아 진퇴가 임의적으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의병군

은 갖가지 폐단을 일으켰고 전란중의 기근으로 의병의 난행이 점점 늘어났다

임진왜란 중 집단적인 약탈이 시작된 것은 당년 겨울부터였다 그리고 . 시일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다 전란으로 . 질병과 기근이 심해지자 의병 중에는 떼 지어 관을 습격하여 관곡을

약탈하는 가짜의병도 나타났다 전란으로 . 인한 관권의 공백상태와 관의 권위상실로 말미암아

초기부터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반관적 경향이 . ( ) 半官的 특히 심했던 함경도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민심이 불온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후 기근과 질병

이 만연되자 반란의 온상이 되었고 모처럼 의병군이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식량의 부족으로 도

망자가 뒤를 이어 의병으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웠다.


의병 최후의 저명한 의병장은 김덕령 이었다 그는 ( ) . 26 12 金德齡 선조 년 월 광주에서 기병하

니 조정에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아니하여 충용장 이란 ( ) . 忠勇將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전국에 난립한 의병진을 통합하기 위하여 8 . 도 의병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에도 불

구하고 군량확보의 어려움으로 3,000 500 여명의 의병 중 여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귀가시

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500 뒤에는 명의 군량확보도 어려워 둔전을 계획하였으니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때마침 . ( ) 이몽학 의 李夢鶴 반란이 일어났고 김덕령이 이 사

건에 관계가 있다는 무고에 의하여 희생을 당한 후에는 의병장이 존재하였어도 이미 의병으로

서의 가치를 상실하였다

전라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유팽로 柳彭

老) . 였다 그가 서울에서 남하하여 옥과의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순창에서 반민이 집결하여 순창

읍을 공격하려는 것을 설득하여 의병대장을 자칭하고 그들을 인솔하여 옥과에 이르렀으나 전투

를 담당할 만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 의병이라기보다는 불량배의 집단이었기에 유팽로는

의병장을 자칭하였지만 그들을 인솔하여 전투장에 나갈 수 없었다

1) 금산전투와 함평의병

6 25 ( ) 월 일 고경명 의 高敬命 의병군이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은 황간으로부터 금산에 침입하여

이곳에서 전주로 침입코자 하였다 고경명을 . 비롯한 여러 의병장들의 북상의지와는 달리 왜군의 전주

침입 기도에 대하여 의병들의 거의 모두가 “전주는 호남의 근본이기 때문에 금산의 왜군을 먼저 격

멸하여 전주를 구하자 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 의병들의 주장에 대하여 고경명을 비롯한 수뇌부들

은 이 요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 이의 성공을 위하여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금산의 왜적을 합심

하여 공격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금산에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의 관군 1,500명은 금산서편의 이치

( ) , , 梨峙 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의 군대는 금산 남쪽

의 웅치에 진을 쳐서 왜장 소조천융경 의 ( ) . 小早川隆景 부대와 대진하고 있었다 소조천융경의 부대는

경상도의 성주 선산 김천 · · 등을 거쳐 서울에 유진하고 있었고 그 별대를 안국사( ) ( ) 安國寺 혜경 惠瓊

의 지휘 하에 유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 소조천융경은 왜장들의 작전회의에서 전라도 방면을 담당하게되어 먼저 별군으로 하여금 남원을 유린한 후 전주로 침입하려 하였으나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의 군

사들에 의하여 그 진로가 저지되었다 소조천융경은 .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서울을 떠나 청주를 거

쳐 남하하게 되었고 안국사 , 혜경은 할 수 없이 성주를 우회하여 소조천융경의 군대와 합류하여 전라

도에 침입키로 하였다 즉. 1 왜군의 대는 지례와 거창을 치고 또 별대는 횡간과 영동을 거쳐서 무주

에 침입한 다음 계속해서 금산을 공격했는데 금산군수 권종은 이들을 맞아 선방하였으나 끝내 장렬

하게 전몰하였다 이리하여 . . 금산에 안국사 혜경이 유둔하게 되었다 그는 의령에서 곽재우의 의병군

에게 패배하여 치욕을 만회하기 위하여 용담과 진안을 공격한 다음 웅치를 넘어 전주로 진공하려 하

였고 또, 1,000 . 별군 여명은 금산에 진을 치고 이치를 거쳐 전주로 침입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

이 금산에 유둔한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권율이 이치를 지키고 있었고 웅치는 김제군수 정담이 방어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 7 7 10 (7-8 ), (8 ), 월 일부터 일까지 사이에 웅치전투 일 이치전투 일 금산전투

(9-10 ) . 7 8 일 의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일과 일의 웅치전은 정담과 휘하 장병이 사력을 다하여 방

어하다가 백병전을 전개하여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으로 정담 이하 많은 장병이 전사하고 방어진

도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 이치전투에서는 권율과 황진의 군대가 적을 마침내 격파함으로써 전라도

보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경명의 . 1 의병군이 진산에서 전군을 재편성하여 진을 그곳에 두고 본진

으로 삼고 유팽로를 선봉장으로 안영 을 ( ) 7 8 . 安瑛 후군장으로 삼아 월 일 금산성을 향하여 출진하였다

그런데 금산성의 공격에 전라도방어사 곽영 과의 ( ) 郭嶸 합동작전이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그들과 공격

부서를 상의하여 관군은 북문을 의병군은 , . 10 서문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 전투에서 일본군은

관군진이 취약함을 알고 이곳에 집중공격을 하자 방어사 곽영 휘하의 영암·광주·흥덕의 여러 관군

진이 무너지자 이에 의병진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어 패퇴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고경명

을 비롯하여 그의 차남 인후 부장 ( ), 因厚 안영 유팽로 · 등 여러 의병장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전투에서 비록 의병군은 패배하였지만 생존한 의병들이 유능한 권율 장군의 막하에 편입 수습되

어 이치의 지세를 이용하여 왜군의 전주침입에 쐐기를 박아 이들을 격퇴시킬 수 있었고 문홍헌의 예와

같이 최경회의 의병활동에 기여하는 의병들이 많았다 한편 . 왜군이 금산 전에서 승전은 하였으나 전주

침입의 예기가 꺾이어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 이치전과 금산전은 각기 따로 전개되었지만 소

조천융경은 고경명 의병군의 금산진격에 따른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치의 공격을 단념하고

바로 금산으로 물러났던 것이다 이와 . 같이 고경명의 의병군은 이치의 권율 군에 적절하게 부응하여 측

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그들이 바랐던 향토방위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웅

치 이치 금산전은 · · 관군의 공주회전과 용인패전의 거듭된 실패로 의기소침하고 왜군에 대한 막연한 두

려움을 가졌던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에 실전의 경험과 승리에의 확신을 안겨주어 왜적을 물리칠 수 있

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수군기지를 안전하게 보호

해 주어서 해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안겨다 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권율 . 스스로도 이 웅치

전을 행주산성의 승리보다 값진 것으로 평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전투에 가담한 부대

를 간추려 보면 충청도 옥천에서 기병한 조헌 나주의 , , , 김천일 광주의 고경명 장성현감 이귀

( ), ( ) . 1 (7 9-10 ) 2 李貴 순창현감 김제민 부대들이다 금산 金濟民 차전 월 일 과 차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함평출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강귀지 진주 선무원종 ( , ) 2 . 姜貴知 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김의생( , ) . 金義生 광산 전사함

◇노성니( , ) . 魯省尼 함평 전사함

◇박광조 호 ( , - . ) 1588 朴光祖 지봉 밀양 년 砥峯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를 지냈으며 임진란이 일

어나자 아우 박광종 과 ( ) 朴光宗 더불어 의병을 모아 고경명 휘하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으며 둘 다 선무원종 공신에 책록되었다.

◇박응주( , ) . 朴應柱 밀양 전사

◇이방필( , ) . 李邦弼 함평 전사

◇이 원 함평 이령 원의 ( , ), ( , ), ( , ) 李 轅 李軨 아우 이가 李軻 원의 원우

3 , 10 형제가 의병과 의곡 노복 여명을 거느리고 고경명 휘하에 들어가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금산전투에서 모두 순국하였다.

◇정 유( , ) 鄭維 나주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고경명 휘하에서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전사.

◇정인세( , ) 鄭仁世 나주

정유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

◇정 회 호 ( , : - , : , 1564-1592) 鄭繪․ 송계 松溪 본관 나주

◇정민수 호 ( , : - , 1569-1592, ) 鄭民秀 ․ 월암 회의 月岩 삼종제

2) ( ) 남문창의 와 南門倡義 함평출신 의병들

고경명 의병부대가 금산전투에서 참담하게 패전함에 따라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주전

( ) . 主戰 인사들이 전몰하고 장수를 잃은 의병들은 지리멸열 해산되었다 전라도에서는 일부의 관

군이 남아 있었을 뿐 군사적인 공백지대가 되었다 이러한 . 군사적 공백을 메우고자 감연히 봉기한 의병이 화순의 최경회 보성의 ( ), ( ), ( ) 崔慶會 임계영 장성의 任啓英 김경수 金景壽 의병장이었

다.

당초 임진란 때 전라도의병의 주류를 이루었던 의병장은 김천일·최경회·임계영이었지만 이

밖에 또 다른 한 사람 김경수가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있었다.

★ 금산 700 7 19 의사 패몰의 소식을 전해들은 김경수는 월 일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

고 전라도 각 지방에 격문을 보냈다 각. 처에서는 이에 즉각 찬동하고 호응하여 의병과 군량미

가 모아졌다 월 . 8 24 239 , 190 2 . 일에는 군사 명 군량 석 말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너무

적어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격이 되고 만다 는.” 김경수의 말에 다시 각 지방으로 돌

아가 더 많은 의병과 곡식을 모으고 나섰다.

임진년 11 17 , ( ), ( ) ( 월 일 남문의병은 맹주 김경수 의병

김제민 . 12 15 남문의병은 월 일 당시 수원과 안성 사이에 주

둔하고 있었던 변이중 의 ( ) ( ) . 邊以中 소모사군 과 召募使軍 병합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문의병은 오히려 외적보다는 혹한과 군량결핍으로 더 이상 의병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다음 해인 선조 26년 정월 중순 회군을 결정하고 장성으로 되돌아와 의병활동을 벌

이다 해산했다 제 차 . 1 . 남문의병부대 창의활동

3) 2 제 차 진주성 싸움과 함평출신 의병들

금산에서 고경명 의병군의 패보에 접한 보성에서는 전 현감 임계영·박광전( ), 朴光前 전정자

정은제 진사 ( ), ( ) 鄭恩悌 김여중 문위세 능성현령 金汝重 · ( ), ( ) 文緯世 김익복 등이 金益福 합동하여

격문을 여러 읍에 발송하였다 월 일 . 7 20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문위세를 양향관

( ), ( ) , ( ) . 粮餉官 박근효 를 朴根孝 참모관 정은제를 종사관으로 삼고 호자 를 虎字 장표로 하였다

이들 임계영의 좌의병군은 장흥 낙안 순천 구례를 · · · 거쳐 남원에 이르는 동안 장흥에서는 관청

의 방해도 받았고 낙안에서도 의병군에 호의적이 아니어서 괴로움도 받았지만, 순천에서는 무과출

신의 전 만호 장윤 이 ( ) ( ) 張潤 참여하고 부장 으로 副將 활약하여 좌의병군의 전략과 전술에 크게 도움

군량미조달과 경상 우도에서의 피난민 대거유입으로 사회적인 혼란이 거

듭되고 있던 때였다 바로 . 전라도 의병은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향토수호가 목전에 닥쳐온 왜적만

이 아니라 나라에 ,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는 것 역시 향토를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의식을 갖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이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 때 오직 전라도만이 국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라는 생각을 사림 들은 ( ) . 士林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1 10 3 차의 진주성 전투는 임진년 월에 일본군 만이 총공세를 펼쳤으나 진주목

사를 비롯한 조선관군의 용전분투로 그들을 패퇴시킨 곳이다

군을 투입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여 그들의 실추된 위신을 되찾고 패사한 왜군의 한을 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또한 . 진주가 호남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이었기에 이를 공략하여 남방보급기

지를 확고히 구축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 영남일대에 있었던 일본군

은 전열을 정비하여 창원을 거쳐 함안에 이른 다음 의령과 반성의 두 길을 따라 진주성에 육박

진주가 이 같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조선의 관군은 남하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영남

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 도원수 김원명과 순찰사 이빈은 각도의 관병을 거느리고 선산과 의령

에 있었고 전라병사 , 선거이 충청병사 · 황진 전라방어사 · 이복남 등도 각기 군대를 인솔하고

이에 이르렀다 전라감사 . . 권율 또한 장졸을 거느리고 운봉을 넘어 창녕에 이르렀다

한편 이여송의 명군은 서울에 진을 치고 있어 왜적을 추격하여 남하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

고 있었다 명군 . ( ) . 측은 오히려 소서행장의 말에 따라 진주성의 공성 책을 空城 제안하였다 공

성 책이란 진주성을 비우고 우리 군대가 철수하면 왜군과의 충돌을 피해 그들이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 이는 왜군의 진주성공격에 대한 일시적 기만술책이라고 판단한 조선

관군 및 의병장들은 결코 현명한 대책이 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공성 책은 기만술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무릎 쓰고라도 진주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쪽은 의병장 김천일을 비롯한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 . 황진 등이었다 불행하게도 양론은

끝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분열되었다 관군과 . 의병 그리고 명군의 연합전선을 펴서 대

적하더라도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운 정세에서 진주성의 사수문제는 각 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에

맡겨졌다.

이리하여 도원수 김명원 체찰사 , 권율 등은 남원 운봉 등지로 떠났고 체찰사 이빈과 의병장

곽재우는 이곳을 떠나 원성현을 거쳐 서쪽 산음으로 돌아갔다 또한 .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은 사

천에서 호남으로 돌아가고 그 외 전라병사 선거이 등 여러 장수들도 흩어져 버렸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외부에서 입성한 관군 및 의병부대 병력 3,000여 명과 본래부터 상주하고 있었

던 병력을 재편성하여 수성구역을 분담시켰다 의병장 .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주장이

되고 황진을 수성장으로 삼고 여러 도의 관군과 의병을 요소에 배치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였

다 이. , 수성에 있어서 김천일은 의병장들의 절제를 맡았으며 최경회는 관군의 절제를 담당하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드디어 6 19 10 20 월 일 만 명에 가까운 왜적이 진주성 외곽을 포위하고 일에는 동북산성에 출

몰하고 나섰다 고립무원의 . . 진주성의 혈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적이 서북쪽 호수의

물을 빼고 흙으로 메운 뒤에 큰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일 . 22 10 오전 시경에 시작된 전투가

밤중까지 계속되어 수성군은 왜군의 세 차례 파상공격을 선방하였으나 외원군의 필요성을 절감

하여 임우화 를 ( ) . . 林遇華 구원특사로 보냈다 그러나 실패했다

23 . 일에는 적이 호수의 물을 모조리 뽑아 길을 만들고 성벽의 초석을 파기 시작하였다 이어

24 . 25 26 일에는 적이 병력을 증강하여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과 일에는 날이 갈수록적의 공격이 치열해졌으나 수성군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화기 로 ( ) 火器 대항하고 돌을 굴리는 등

의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와 . 29 같은 피아의 공방이 계속되다가 일 적이 성벽을 쇠막대

로 파괴하여 동문을 통하여 침입해 왔으나 이종인과 그 휘하 장병이 물리쳤다. 그러나 적은 서

북문도 같은 수법으로 공격해 오자 창의군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 촉석루로 장졸들이

후퇴하게 되는데 김천일은 큰아들 상건 과 ( ) ( ) , 象乾 양산숙 이 梁山璹 호위하고 최경회는 문헌홍이

고종후는 김계휘 고경원이 · 부축하여 북향재배 후 남강에 투신하였다. 이종인·강희열 등 10여

명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특히 . 이종인은 남강에 다다르자 좌우 팔에 적을 껴안고

“ ” 김해부사 여기서 죽노라 외치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일 . 10 간 계속된 진주성 전투는 왜적침

입 후 최대의 비극이었다 이. 싸움에서 성을 끝내 사수하지는 못하였으나 왜군이 진주 서쪽으

로 진격하는데 쐐기를 박았으니 호남을 지켜야 한다는 향토방위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진주성 . . 전투에 참전한 함평출신 의병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정 감 호 ( , : - , : , 1562-1593) ( ) 鄭瑊 신재 본관 愼齋 진주 단종 〓 때 우의정을 지낸 정분 鄭苯

의 5 ( ) ( ) 23 세손으로 명종 때 대학자인 우계 성혼 문하에서 牛溪 成渾 수학하였고 세에 사마시

◇정기린 별호 ( , : - , : , 1570-1593) 鄭麒麟 백자장 白字將 본관 하동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

하고 위엄이 있어 나이 15 ( ) ( ) 세 때에 무

◇김몽희 호 ( , : - , : )

◇김몽서 몽희의 ( , ) 金夢瑞 아우 몽희 몽서 〓 · 형제는 의병을 모아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세웠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박수기 호 ( , : - , 1545-1593) 朴壽麒 남포 김천일 南浦 〓 휘하 의병으로 참전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후에 .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박언후 본관 ( , : ) 1592 7 ( ) 朴彦後 무안 년 〓 월 영동 황간 전투에서 永同 · ( ) 黃澗 크게 활약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뛰어들어 투신자살하였다.

◇안 빈 호 ( : - , : ) 安礗․ 외리정 본관 外里亭 죽산 김천일 〓 막하에서 공을 세웠고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윤 근 호 ( , : - , : ) 尹瑾 퇴은 退隱 본관 파평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임진란이 일어나자

7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앉아서만 볼 수 없다며 김천일 창의소로 달려가 그의 원숙한 지략과

◇장이길 호 ( , : - , : ) 張以吉 야우 본관 野憂 흥덕 김천일 〓 막하에서 활약하였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3. ( ) ( ) 관군 의 官軍 승첩과 함평출신 전공자 戰功者

1) 행주대첩과 함평출신 전공자

선조 26 (1593) 2 년 월 한성 근교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는 명군의 벽제관 패전이후 조선

의 관군과 의병이 잘 싸워서 일격에 일본군을 섬멸한 대표적인 전승이었다

명군은 조선 측의 기대

와는 달리 강화교섭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종결시키려 하였다.185) 행주대첩에 참여한 함

평출신의 인적사항에 대한 사료가 드문 관계로 기록에 전하는 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채우령 본관 ( , : ) 3 蔡禹齡 평강 현〓 무안군 해제면 출신으로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읍

의 수령을 지냈으며 93 . 명의 동지와 함께 권율 막하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전사

하였고 선무원종 공신록에 책록되었으며 후에 , .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채종해 본관 ( , : ) 蔡宗海 평강 현〓 무안군 해제면 출신으로 권율 막하에서 활동하였으며 행주

산성 전투에서는 많은 적과 용전분투하여 전과를 올리다가 중상을 입자 적진으로 돌격하여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우춘 본관 ( , : ) . 李遇春 함평 대동면의 〓 모정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동으로 출병하였다 순천

에 이르러 예교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 후 행주싸움에 가담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

다 후에 . 2 .

2) 이순신의 해전과 함평출신 전공자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서 일본수군을 격퇴하여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의 수군은 전라좌·우수군과 경

상우수군이었고 특히 , . 그 주력은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집권층은 조선의 수

군으로는 해상에서 일본군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속단함으로써 처음부터 육상방위에 주력할 것을 고집해

왔다 이는 . .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일관된 흐름이었다 즉 일본군이 해전에 능한 반면

에 조선 측은 육전에 능한 것으로 오판하여 적이 쳐들어올 경우 그들을 육지로 끌어올려 대적할 수 있

다고 믿었던 것이다.186)

육상의 진관체제는 지방행정 단위인 읍 자체

를 군사조직 단위인 진 으로 ( ) 鎭 편성하여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지만 수군의 , 경우에는 행정구획과 관련시키지 않고 연해지역 요해처에 설치된 정

규수군 의 ( ) ( ) 正規水軍 진 을 鎭 묶어 연해지역의 읍까지 관할하는 진관조직으로 개편하였던 것

종전의 진관체제 밑에서는 정규수군이 연해안의 각 진포 에만 ( ) 鎭浦 소속되어 수

군으로서의 자체임무만 수행했었지만 이제는 연해지역 각 읍에까지 수군기지를 설치하여 수사

( ) 水使 관할 하에 둠으로써 수군은 물론이고 정규수군 아닌 일반주민들도 필요에 따라 비정규순군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종전의 해방체제를 크게 바꿔놓은 것이었다. 5 (1510 이것은 중종 년

년 삼포 의 ) ( ) 東萊 富山浦 ·熊川의 乃而浦·蔚山의 鹽浦)에 거류하던 왜인들이 변란을 일으킨 삼

포왜란 이후 ( ) 三浦倭亂 자주 일어난 왜구들의 침입과 노략에 대비한 해방강화책이

왜란이 임박할 무렵까지 그가 군비를 갖추는 데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거북선 건조문제와 수영 앞

바다에 가설한 철쇠장치 였다 철쇄장치는 ( ) . 3 , 鐵鎖裝置 월 하순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이며 거북선은 일

본군의 침공 직전인 4 11 ( ) ( ) 월 일에 범포 제작을 帆布 끝내고 다음날 선상에서 지자포 와 地字砲 현자포

( ) . 1 玄字砲 를 시험 발사하였다 이로써 수사 이순신이 부임한 후 년간에 걸쳐 전라좌수군은 적침에 대

비한 방어태세를 철저히 완료한 셈이었다.

다시 말하면 전라좌수군의 경우 을묘왜변 이후에 도입된 새로운 해방체제에 의해 좌수영 관내에

거주하는 다양한 신분층의 광범위한 수군병력을 확보하였으며 아울러 , 이순신이 부임한 뒤 수사의 행

정력을 총동원하여 전선 화포 · 등 모든 군비를 갖춘 다음 임란을 맞이

한편 조선수군의 전력은 실전을 수행한 군사들의 전투력에서도 월등하였다. 수군병력의 대부

분이 해전에 강한 해안지방의 토착민이라는 점도 작용하였지만 특히 , 수군편제 안에 연계된 비

정규적 토병제도는 전투력증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 . 수영 가까운 곳에

거주하였던 토병들은 전시에 수군진에 전속된 일종의 용병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187) 이 같

은 토병의 존재는 전라좌수군의 예를 통하여 확인되는데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 중 조선수군이

기능적 특수군까지 갖춘 상태에서 일본군을 격퇴

육상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과 같이 해전에서도 해상에 익숙한 연해민 들이 ( ) 沿海民 봉기하여 수군과

결합하였으니 해상의병 이 , ( ) . 海上義兵 바로 이들이다 해전은 육전과는 달라서 전선과 특수한 장비를 갖

추지 않고서는 아예 전투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상의병의 대부분은 육상의병과는 달리 독자적인 활

동을 편 것이 아니라 수사 휘하에 들어가 활약

옥포 해전으로부터 한산도 해전

에 이르기까지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해전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시에 그간의

병력손실로 인해 상당한 충원이 필요할 시기였다 따라서 . 8월에 들어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영

관내의 제읍에 격문을 띄어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함평출신으로 . 이들 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이들을 편의상 정

유재란 시 해전의 전공자들까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윤 붕 본관 ( , : ) ( ) 尹鵬 파평 선조 〓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순신 휘하에서 일령장 一領將 으로

당항포 싸움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 정유재란 때에도 빛나는 무공을 세웠으며 선무원

종 2 . 등 훈에 록훈되었다

◇정충량 호 ( , : - , : , : - ) 鄭忠良 송계 본관 松溪 진주 시호 충렬공 忠烈公 〓임진란이 일어나자

사촌 아우 득량과 함께 남문의병청에 들러 그들을 격려 지원했고 돌아와 그는 도원수 김명원의 막하로 갔다 김명원은 . 그들의 기량을 보고난 후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휘하에 배속시켰

다 이억기 . . 우수사는 충량의 지략과 용맹을 알고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이 무렵 전라좌수사 이

순신이 구원병을 청해왔는데 이억기 우수사가 전라 우수영의 관할 경계선을 넘기 주저했다. 이 때

충량이 “호남은 우리나라의 보루요 호남 , . 없이는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없소 위중한 이 때에 어찌

관할 경계만 따질 수 있습니까 이 ?” 말에 이 우수사가 용단을 내려 병선 25척을 이끌고 당항포 앞

바다에 이르러 연합하였다. 견내량 전투에서는 도망치려는 적을 선두에 나아가 들이쳐 적장을

사살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틀 후 안골포 전투에서는 우리 전선과 적의 전선 간에 백병전이

벌어졌을 때도 지략과 용맹으로 대승리를 하였다



★ 이도범 ( , : , : ) 李燾範 본관 함평 호 東雲

천도교인으로 3·1 3 운동 때 손병희의 거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감 . . 


땅 한평의 가치와 숨은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싶으신붑은 아래의 함평군 사이트로 들어거보이소. 

https://www.hampyeong.go.kr/upload/gunsa/01.pdf